갈매기의 꿈, 풍랑주의보로 무인도 대신 찾은 강화도의 선수 포구에서, 2020년 4월 4일 토요일
무인도에 카페를 오픈한다고?
무인도에서 카페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꿈인 사람이 있었다. 7년여 만에 마침내 카페를 오픈했다며 지인을 통해서 초대를 해왔다. 그가 마침내 꿈을 이룬 것이다. 무인도에 가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지난주 토요일과 이번 주 토요일 연달아 "풍랑주의보"로 가까운 바다와 먼바다의 배가 모두 통제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두 번이나 발이 묶여 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치 삶에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이 좌절당하던 일들과 다르지 않았다. 비록 풍랑주의보 때문에 그의 멋진 꿈은 축하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꿈만 놓고 본다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갈매기의 꿈, 풍랑주의보로 무인도 대신 찾은 강화도의 선수 포구에서, 2020년 4월 4일 토요일
꿈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꿈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많은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괴테의 말이다. 나는 이 명언에 딴지를 걸며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비단 괴테만이 아니다. 빌 게이츠, 워런 버펫, 조지 워싱턴, 아인슈타인의 명언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꿈을 잃어가거나 포기당하는 현실은 무능해서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철학을 몰라서도 아니다. 원대한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그 꿈을 지속하는 것과 현실의 먹고사는 문제는 별개다. 요즘 레베카의 양준일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가 20대에 간직했던 꿈이 30년이나 지난 50대에 현실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양준일이 그 꿈을 위해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했는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웨이터라는 직업으로 살고 있고 그 직업을 대하는 그의 긍정적인 태도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꿈을 이룬 현제의 그의 모습에 열광하고 있다. 남자가 봐도 시샘이 날 정도로 멋진 사람이다.
선정릉역 SH타워 11층 모두의 캠퍼스, 8개의 강의실에서는 좋은 강의들이 열리고 있다.
의대를 중퇴하고, 공무원을 그만두고, 회사를 그만두고 꿈을 찾아가는 사람들
분당선과 9호선이 지나는 선정릉역을 내려다보는 곳에 “큐니버스티 모두의 캠퍼스”라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다. 무자본으로 창업하고 각자의 사업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꿈을 키워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간이다. 나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사람도 있고, 매주 하나씩 창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 신용 불량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개 같은 사업 이야기, 무인도만 전문으로 탐험하는 무인도 전문가, 승무원들의 취업을 도와주는 승무원 취업 전문가, 의대를 중퇴하고 대학을 만들어버린 30대 초반의 총장형(총장님이라 부르지 않음),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산골 오지에 비상주 오피스를 열고 성업중인 법인 설립 전문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역사 콘텐츠로 인생을 건 역사 전문가 등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즐겁게 놀이를 하고 있다.
이미 창업한 비즈니스를 화초 키우듯이 키워가는 이들의 공통점은 잃어버린 꿈을 찾았고 그 꿈이 흔들릴 때마다 서로 격려하고 응원해준다는 점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사태에도 굳건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인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다. 꿈은 이루는 것도 쫒아가는 것도 아니다. 단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소중할 뿐이다. 그들은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하는 엉뚱한 꿈들을 사업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멋지고 대단해 보인다. 비록 5천 원짜리 도시락이긴 하지만 점심과 저녁도 같이 먹고 하루 종일 자신들의 꿈을 향해서 묵묵히 나아간다. 절대로 경쟁하거나 달리지 않는다. 경쟁하는 아이템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열심히만 하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논리는 스트레스만 양산할 뿐이다. 그래서 경쟁이 없는 남들이 다 말리는 사업만 하고 있다. 괴짜이고 사기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운영하는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어떤 강의"다.
강의 주제도 강사도 미리 알 수 없는 "어떤 강의"
4월 첫 번째 금요일 11시에 모두의 캠퍼스에서 어떤 강의가 열렸다. 강사도 강의 주제도 모르는 이색적인 강의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부터 듣고 있기 때문에 벌써 1년 반 가량 들어오고 있는 셈이다. 세월 참 빠르다. 나는 이 강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각자 다르게 살아가는 다름을 이해하고 있다. 어떠한 실패도 결코 초라하거나 누추해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이 특별한 강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분석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강사들은 초보였고 이들의 특징은 꿈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다. 꿈만을 쫒는 삶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지 저마다의 실패 사례들로 보여주고 있었다. 감동적이지 않은 강의는 단 하나도 없었다.
드림기버님의 어떤 강의, 선정릉 모두의 캠퍼스에서, 2020년 4월 3일 금요일 11시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사업을 시작한 드림기버님의 어떤 강의
이번 강사는 블로그에서 “드림기버”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진희님이었다. 진희님을 알게 된 것도 역시 3주 전 “디지털쉬즈“라는 닉네임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의 어떤 강의를 통해서였다. ”드림기버”님은 초등학교 때부터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여자 아이였다. 중산층의 집안은 여유가 있었고 그녀는 당연히 판검사 같은 전문직종의 사람이 되는 꿈을 가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도 다른 학생들처럼 지옥의 입시 레이스를 통과했고 그녀의 의사대로 명문대라 불리는 학교의 간호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판검사가 꿈이었던 그녀의 간호대학 시절은 참담했다. 간호사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중요한 사항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결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은 점점 작아지고 초라해졌다. 이처럼 간호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마지막 4학년 때는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인덕원에 있는 계원 예술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이과생이었던 그녀가 아무런 기초도 없이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미대에 들어갔다.
그렇게 간호사의 꿈을 접은 그녀는 미대 졸업 후 디자인 계열의 회사에 입사해 사내 연애를 통해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였고 그녀는 3년 만에 “이혼녀“라는 주홍글씨를 달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녀는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수제 맥주회사 입사했다가 퇴사하고, 동양미술 심리치료 회사에 입사했다가 퇴사하고, 웨딩플랜 회사에 입사했다가 퇴사하고, 웹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가 퇴사하고, ”한국 하이리빙“이라는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에 입사했다가 퇴사하는 등 젊은 방황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열 차단 유리 필름사업 창업을 하게 된다. 문제는 동업이었다. 동업자의 배신에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다시 삶의 쓴맛을 보게 된다. 관공서, 제주 컨벤션센터 낙찰 등 사업은 커져 갔지만 동업자의 문제로 현금흐름이 급격히 악화되고 결국 엄마에게 손을 벌리고 카드 돌려막기로 버텨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처음 카드사 독촉의 무서움을 경험하면서 압류와 근저당 등을 알게 되었다. 7년간의 에스코 사업은 마침내 정리가 되고 다시 무로 돌아갔다. 그밖에도 블로그 마케팅, 주식투자, 재개발, 재건축, 빌라 등의 부동산 공부를 하다가 이번에는 부동산 회사에 취직한다. 입사 2년 만에 부서장으로 승진하며 다시 사랑을 찾고 열심히 일하다가 이번에는 블록체인회사로 스카우트된다. 외근 도중 삼중 추돌사고를 당하며 목과 허리에 부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지면서 드디어 모든 것을 멈추어야만 했다.
드림기버님의 어떤 강의, 선정릉 모두의 캠퍼스에서, 2020년 4월 3일 금요일 11시
37년이나 꿈을 찾아 헤맸지만 결론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을 찾아 정신없이 헤맨 그녀의 37년간의 결론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였다. 도전과 실패의 연속에서 멈춤의 시간이 필요한 순간에 요가에 입문하고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고 나의 과거를 인정하는 와칭을 접하게 된다. 그녀의 감춰진 다른 모습에는 차가움, 냉철, 까칠함, 화, 욱하는 성격들이 응집되어 암처럼 자라고 있었다. 그녀가 방황하며 아프고 힘들었던 이유다. 죄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잎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좌밖에 없었다. 와칭을 통해 새로운 자신의 모습들 즉 꼼꼼하고, 분석적이고, 명분을 중요시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도전하고, 열정, 밝은 성격, 격려, 칭찬, 모 아니면 도와 같은 분명한 태도의 견지, 자신만의 판단의 잣대, 깊게 생각하지 않기 등의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가 매번 실패하는 동안 그녀만의 실패의 패턴도 찾아낸다. 회피, 도망(역경), 흔들리는 중심, 목표의 부제, 강박, 집착, 두려움, 인정 욕구, 조급함, 실패에 대한 자격심이 그것들이었다. 그녀가 와칭 해야 할 것에는 명확한 목표, 나에 대한 믿음, 완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일이었고 드디어 그녀는 "무아"를 깨닫게 된다. 무아란 나에 대한 관념 버리기를 통해 나 자신이 바로 우주의 중심이고 주인이라는 것이다.
요가와 명상으로 끊임없는 자아의 내면 바라보기를 하다가 문득 ”이젠 그만 놀고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한번 해보자 “
이번에는 달랐다.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사랑, 감사, 사회공헌 관련 일을 하려고 생각한 일이 요가강사, 취직, 요가센터 직접 운영 등이었다. 문제는 경쟁은 싫고 사회공헌도 해야 하지만 자유롭게 살면서 돈도 벌고 싶은 욕심이었다. 밝음, 격려, 칭찬 등의 긍정적 에너지로 세상의 빛이 되자는 생각으로 다시 직업을 찾기 시작했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깨닫고 꿈과 희망을 주는 강연가가 되기 위해 책 쓰기 7주 과정에 등록하고 블로그, 유튜브를 시작했다. 그동안의 실패 이유가 ”각종 꿈이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삶을 따라 하고 있는 나“였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명제에 직면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돈, 명예, 사회공헌을 한꺼번에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세상의 빛이 되고픈 열망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는 명제의 필요충분조건과 같았다. 꿈은 확장되고 구체화되어야만 했다. 우연히 어떤 강의와 하루 만에 책 쓰기 과정을 듣게 되었다. 그전에 입문한 종이책 과정은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였다. 그녀는 하루 만에 책을 쓰면서 이젠 매주 책을 쓰고 이북 서점 ”꿈 책방“을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 자신도 어떤 강의의 강사가 되었고 ”내 꿈 찾기 프로젝트“를 무자본으로 시작해서 자신만의 비즈니스 세계에 입문하였다. 자신의 콘텐츠를 먼저 팔고 법인은 나중에 설립하는 방식이 핵심이다.
3년 전 만들어둔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면서 꿈을 찾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그녀의 꿈은 시작되었다. 꿈을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과 함께 이루어가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설렘을 느낀다고 했다. 꿈 이야기만 나오면 굉장히 가슴이 뛴다는 것이다. 그녀만의 ”설렘주의보“ 가 기대되는 이유다.
갈매기의 꿈, 풍랑주의보로 무인도 대신 찾은 강화도의 선수 포구에서, 2020년 4월 4일 토요일
꿈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루어가는 과정을 즐기는 여행이며 내면의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녀는 매주 월요일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왜냐하면 매주 월요일은 하루 만에 책 쓰기 날이기 때문이다. 내가 1년 하고도 3개월 동안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그녀도 시작하며 가슴 뛰는 삶을 시작한 것이다. 벌써 네 권의 책을 썼다.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짜릿함이고 황홀함이다. 오랫동안 씨름하던 종이책에 대한 미련은 이제 버렸다고 도 했다. 그러면서 ”매주 한 명씩 꿈 찾아주기 “ 사업으로 2020년에 40명에게 꿈을 찾아줄 계획이다. 나는 그녀의 1호 고객이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모두 함께 참여해서 소통, 공감, 대화, 토론, 격려, 응원 등을 통해 꿈을 찾아가는 사업이다.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싶은 분이나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분들은 언제든 참여가 가능하다. 이젠 잃어버렸거나 방치된 내 꿈을 전문가와 찾아가기 바란다. 그녀도 나도 자기 계발서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내 이야기어야 하고 내 꿈이어야 한다.
"인생 뭐 있어"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희망에 찬 꿈을 꾸며 격정의 성장기를 지나왔다. 나도 살아가면서 나의 꿈을 이야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꿈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 더 이상 꿈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 뭐 있어"라는 체념인지 달관인지 깨달음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현실의 삶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인생 뭐 있어"를 입에 달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대신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꿈 이야기들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고 접한 사례들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어려서부터 구체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고 그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치열하고 처절하였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성공한 사람들이 과연 모두 행복했을까? 성공의 기준이 어떤 것일까? 농촌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무지렁이처럼 살아온 농부나, 좁고 깊고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대는 갱도에서 평생 석탄을 캐며 살아온 광부나, 평생 변덕스럽고 살기를 품은 파도와 싸우며 치열하게 살아온 어부나, 막노동판에서 견디기 힘든 무더운 여름과 손발에 동상이 걸릴 정도의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막노동자들은 모두 실패한 사람이란 말인가?
갈매기의 꿈, 풍랑주의보로 무인도 대신 찾은 강화도의 선수 포구에서, 2020년 4월 4일 토요일
우리는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하도록 강요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도 어려서는 원대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나나 그녀가 꾸었던 꿈처럼. 나는 어려서는 대통령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꿈이었다. 그 당시에는 거의 모두가 그랬다. 조금 자라면서 국회의원이나 판검사로 작아졌다. 초등학생 저학년이 되면서는 경찰관이나 소방관 또는 의사가 꿈이었다. 물론 요즘 초등학생들의 웹툰 작가나 유튜버와 같은 극히 현실적인 꿈과는 거리가 있기는 하다. 중학생으로 올라가면서 꿈은 점점 작아지다가 고등학생 무렵에는 꿈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문과와 이과를 선택하는 기준도 이유도 애매하였다. 수학을 좀 하면 이과, 수학에 자신이 없으면 문과를 선택하였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실의 벽은 높았고 꿈은 점점 초라해지고 말았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부조리한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비현실적인 "혁명"을 꿈꾸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더욱더 꿈을 포기해야 하는 일은 자연스러워져가고 있다. 당연시되었던 결혼도, 성공도, 취직도 미루거나 없던 일이 되어가는 추세다. 운이 좋게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해도,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낳고 바삐 살아가도, 물려받은 재산이 좀 있어도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꿈을 꾸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꿈을 꾸어봐야 악몽이나 그것도 아니면 가위만 눌릴 뿐이었다. 구체적인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심지어 그 꿈마저도 수시로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 탓도 아니고 누구 잘못도 아니다. 꿈을 꾸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하도록 강요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을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꿈, 조용필, 1991년
가왕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 가사다. 나는 산골에서 태어나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산골 소년에게도 꿈이 제법 많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나의 또 다른 꿈은 세계 일주였고 죽기 전에 달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또 하나는 인생의 반은 이 좁은 한반도의 반쪽을 탈피해서 살아보고 싶었다. 주변 친구들이 꾸던 판검사나 의사 심지어 경찰이나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수시로 바뀌었다. 위인전 한 권에도 꿈은 요동치고 흔들렸다. 아버지가 바라던 대기업에 취직한다거나 어머니가 바라던 중앙부처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는 일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럼 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꿈을 생각하면서 젊은 시절 좋아했던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가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꿈"이었다. 혈기왕성하고 장밋빛 꿈으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 나는 이 노래들을 참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꿈이라는 노래는 특별했다. 왜냐하면 가왕이 나를 위해 직접 노래를 만들어 준 것처럼 가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며칠을 잔잔한 불에 푹 고은 설렁탕이나 불가마 내부의 도자기처럼 깊고 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돌이켜보면 방황의 연속이었던 20대 초반의 나는 현재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나의 원대한 꿈이 작아지고 쪼그라들 때마다 노래 가사처럼 뜨거운 눈물을 먹었다. 나의 하루 일과가 커다란 머그잔의 연한 커피를 마시며 눈을 비비며 시작되듯이, 나의 꿈은 생활이라는 파도에서 수억 년을 견딘 모래알처럼 작아지고 또 작아지다가 어느 날 진흙처럼 굳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돌이 되어가고 있었다. 잠깐 발을 담근 직장에서도, 잠깐 발을 담근 정치권에서도, 잠깐 발을 담근 연애사들에도, 잠깐 발을 담근 봉사활동의 세계에서도, 잠깐 발을 담근 종교의 탐닉에서도, 잠깐 발을 담근 진리를 찾아 나섰던 과정에서도, 잠깐 발을 담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치관도 나의 꿈에 적당한 수분과 온도를 제공하며 정성으로 키워갈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그저 그런 허무한 꿈이었다. 구체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하는 두리뭉실하던 나의 꿈은 20대를 치열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며 허세와 허무와 염세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마치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방황하던 20대의 마지막 해의 시계는 자주 멈추어 섰다. 태엽을 감아주어도 배터리를 바꿔 주워도 시계는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잉여의 시간들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던 나는 점점 작아졌다. 어떤 꿈도 현실의 벽과 마주해야만 했다. 현실은 시도 때도 없이 말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너 따위의 촌놈은 분수에 맞는 작은 꿈을 꾸며 조용히 소시민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치려 들었다. 나 따위가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설친다고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좌절과 절망은 히말라야의 도처에 산재해있는 공포의 크레바스만큼이나 깊고 암울했다. 이대로 30대와 마주하고 싶은 용기가 나질 않았다. 신촌에서 3차까지 술을 마시고 수유리 하숙집으로 향하던 20대 마지막의 12월 31일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며칠 전 찾은 대학로, 사진의 맨 끝쪽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우측에 그 고등학교가 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의 뇌와 심장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날 20대의 마지막을 끝으로 짧고 허무한 인생을 정리하고 싶었다. 맨 정신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 술의 힘을 빌렸다. 술이 떡이 될 정도의 만취 상태에서 신촌에서 택시를 탄 시간은 이미 해를 넘겨서 새벽 3시 무렵이었다. 모든 신호를 무시하는 택시는 총알이었고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중간지점인 혜화동의 모 고등학고 앞에서 내렸다. 서울의 겨울 밤하늘은 반 고흐의 별 헤는 밤처럼 푸르지 않았다. 별도 달도 없았다. 절망적이었다. 얇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만 눈이라고 하기는 뭔가 어색하였다. 찬바람을 들이키자 울렁거리던 속은 좀 진정이 되었다. 학교 정문은 굵고 투박한 쇠막대로 만들어졌고 크고 묵직한 녹슨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술에 취한 나는 마치 집에라도 도착한 것처럼 "Hand made"라고 영어로 적힌 라벨이 손목 위쪽에 붙은 모직 코트와 줄무늬 흰색 와이셔츠를 벗어서 교문 고리에 걸었다. 구두를 벗고 구두 옆에 양말을 벗어서 놓고 그 차가운 쇠막대의 문에 등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잠들기 직전 나는 소망했다. 30대의 첫날에 결코 깨어나지 않기를. 이렇게 길거리에서 잠을 자다가 저체온 증으로 조용히 삶의 끈과 인연과 이룰 수 없는 꿈들을 함께 냉동시키고 싶었다. 나의 뇌가, 나의 심장이 얼어서 멈춰 서길 희망했다. 고통도 회환도 미련도 없이 그렇게 나의 모든 것들을 영원히 멈추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죽는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반 고흐의 영혼의 편지에서 나오는 구절처럼 나는 가장 초라하고 못난 30대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자살을 시도했는데 물이 너무 차갑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강둑으로 올라가는 사람처럼. “
새벽 5시 정도였을 것이다. 청소부 아저씨들이 나를 흔들어 깨우고 구급차를 부른 것이다. 구급차에 타지 않고 대신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정신이 조금 들었다. 온몸은 얼어있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고 죽지 못한 내가 안쓰러웠다. 그렇게 죽지 못한 나는 살아갈 다른 이유를 찾기 시작하였다. 카스트로 형제나 체게바라처럼 목숨을 걸고 거창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따위를 이루기보다는 내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기로 하였다. 내가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상 삶의 이유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것들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현실 복지에 참여하고, 사회문제들을 하나씩 둘러보는 작은 일부터 시작되었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이민을 가고 아이를 낳고 사업을 하며 살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주인과 직원의 경계에서, 주인과 손님의 사이에서, 밀고 나가려는 자아와 멈추려는 자아의 충돌에서, 자본주의의 부당함과 그것의 달콤함 사이에서, 이민자로서의 주변인과 토박이들의 텃세의 경계에서, 지식인과 노동자의 경계에서 나의 꿈은 흔들렸고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풍랑주의보, 강화도의 어느 포구에서, 2020년 4월 4일 토요일
잃어버린 꿈을 찾는데 기꺼이 그 비용을 지불하다.
그러던 차에 ”드림기버” 님의 내 꿈 찾기 프로젝트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었다. 과연 나의 꿈은 무엇일까? 내가 매주 한 권씩 책을 쓰고 있는 일이 나의 잃어버린 꿈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과연 나는 꿈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그녀의 1호 고객이 되었고 멤버십 비용도 지불하였다. 내 꿈을 찾는데 그 정도의 대가는 결코 아깝지 않았다. 내 꿈을 찾아가는 소소한 과정을 기록해 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인연들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풍랑주의보“로 무인도의 ”섬 카페“ 초대에 두 번 연속 가지 못하고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돌아와야 했다. 꿈을 향해 나아가다가 "풍랑주의보"와 같은 절벽 앞에서 되돌아온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내 꿈 찾기가 기대되는 이유다. 나는 과연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보여주는 나와 내면의 나의 꿈은 어떻게 다를까? ”설렘주의보“와 ”풍랑주의보“ 가 드디어 만난다. 설렘이 풍랑을 이번에는 넘어설 수 있을까! 나는 감히 모든 것을 가졌던 괴테에게 되묻고 있었다. 당신의 말이 정말이냐고. 당신은 그 많은 꿈을 이루었는데 정말 그리고 얼마나 행복하였느냐고.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꿈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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