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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May 04. 2020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국립공원에 삽니다


시작은 언제나 설레고 새롭다.     


 “작가님, 저어기! 실례~~지만 사는 곳이 어디세요?”
 국립공원에요.
 “에이! 농담말구요. 좀 진지하게 말씀해 주세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세상에 국립공원에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여기 있다니까요! 그동안 속고만 사셨나 본데 정말이에요.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만 그려왔던 낯선 사람 특히, 낯선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한 장면이다. 생뚱맞게 왜 이런 장면을 상상해 왔는지는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상상하던 장면이었고 가끔 꿈속에서도 이러한 대화는 이어졌다. 아마도 오랜 이민 생활이 주는 외로움과 쓸쓸함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시대에 뒤떨어져도 몇 억 광년쯤은 뒤떨어진 나의 훌륭하면서도 유치한 유머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요즘 서울에서는 어느 동네에 사는지도 물어보면 실례가 되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래도 언어의 유희까지는 아니지만 자기주장이 뚜렷한 현대인들에게는 자신만의 대화법과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대화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작은 시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나의 대화법 중 낯선 이와 서먹함을 쉽게 깨트리는 방법은 아주 저급하고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 단골 메뉴가 바로 어디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내가 아주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이랍시고 자주 사용하는 질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취미가 뭐죠? 좋아하는 색깔은요? 감명 깊게 읽은 책은요? 등등의 상식을 파괴해버리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은 웬만큼 신중하거나 과묵한 사람이 아니라면 초면이지만 웃지 않을 수 없다. 어이가 없어서 웃다 보면 금방 친해진다. 물론 상대방이 이성이어야 효과가 있다. 같은 남자끼리 사용하면 똘.아.이 소리를 피할 길이 없다. 물론 여자라고 다 먹히진 않는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초면의 어색함을 깨는 일이다.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는 물론이고 그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이러한 식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안타깝게도 나 자신과의 대화는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누군가의 꿈이 너무도 간절하면 온 세상은 물론 우주조차도 언젠가는 반드시 도와주고야 만다는 이야기가 연금술사란 소설에 등장한다. 늙은 왕이 말했는지 연금술사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대화가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산에 대한 나의 꿈은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2년 전 영국에서의 일이다. 나의 육체와 정신은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멸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삶은 피폐해져 갔고 자존감의 바닥은 그 끝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폭락 장세에서 반등을 하려면 바닥을 찍어야 하는데 그 바닥이 보이질 않았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이라고는 음습하고 암울한 터널밖에는 없었다.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두 가지 꿈을 매일 포스트잇과 다이어리에 적고 또 적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겐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 사치였다. 마치 자연을 넘어서 우주의 진리를 알려고 조바심 내는 일만큼이나 우스꽝스러웠다.     


 거꾸로 흐르거나 너무 빨리 흐르려는 시간의 횡포를 견뎌냈던 것은 바로 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액체 같이 흘러내리던 한 인간을 수습해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아 항상 우울하고 두려웠지만 그 꿈을 생각하면 생기가 돌았다. 비록, 아주 잠깐이지만 풀이 죽어 늘어져있던 나의 모세혈관들과 신경세포들은 반색하며 좋아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빠르고 큰 포기가 가장 큰 꿈을 이루어준다.

  

 하지만 그 꿈을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것은 포기하고 싶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에서만 그려보고 또 그려봤던 포기가 현실의 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매일 적고 또 적어온, 그래서 익숙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산중에서 사는 일이었다. 자연인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매일 자연과 교감하고 싶었다. 아침마다 새들의 노래와 풀벌레들의 화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낮에는 나무와 풀과 꽃들의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바위와 태양의 언어가 침묵이라면 바람과 구름의 언어는 무엇일까도 직접 마주하고 싶었다. 산중의 소박하고 단순함 속에서 글을 쓰고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싶었다. 그 산이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알프스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1년 반전에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이미 이루었다. 그 꿈은 바로 이민생활을 정리하고 내가 태어나서 자란 땅으로 귀국하는 일이었다. 마치 연어 때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산란을 마치고 장렬하게 죽어가는 것처럼 나의 귀소 본능은 오래전부터 꿈틀거리고 있었다. 연어처럼 머지않아 다가올 소멸을 위한 아름다운 의식일 수도 있었다. 그 의식은 중력이나 블랙홀처럼 나를 일정한 방향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 방향이 알프스를 한참 지나 동쪽으로 8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아늑한 품과 아버지의 술주정이 어우러진 엘도라도 같은 향수가 깃들어 있었다.      


 오래되고 익숙한 꿈은 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소박한 것이었지만 그 꿈은 항상 굴절되어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가정이라는 넘지 못할 거대한 벽이 도사리고 있었다. 빛이 물속을 통과할 때 굴절되어 보이는 현상처럼 가정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미련은 알 수 없는 방향들로 꿈들을 굴절시키며 튕겨져 나갔다. 꿈이 굴절될 때마다 영혼도 굴절되어 튕겨져 나갔다. 석가모니까진 아니지만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는 승려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평생 수도원에서 기도하다가 죽어가는 수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버리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룬다는 것은 언제나 욕심이었다. 꿈이 비현실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처럼 굴절되어 보인 이유다.   

   

 1년 반 전의 결단은 하나의 끝이었고 동시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20년 동안이나 공들여 쌓아 온 생활터전과 가정이 있는 영국을 떠나오면서 눈물을 밖으로 밀어낼 수 없었다. 그 슬픔의 깊이에 영영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어쩌면 익사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언제든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나의 질병들이 허락할 것 같지 않다. 질병으로 인한 통증은 때로는 견딜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곤 하였다. 소멸의 가능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의 하늘은 무너졌고 동시에 꿈도 무너진 하늘 아래서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나만 살자고 가정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 또한 견딜 수 없었다. 작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국 내 한인 커뮤니티의 이목과 가게 직원들의 눈에 비칠 사장님인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만큼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그 어디에도 하소연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심지어 아내나 아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하였다. 애꿎은 허리디스크에게만 죄를 뒤집어 씌었다. 그렇다고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판단조차 서지 않는 영국의 무료 의료체계인 NHS만 탓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개인 주치의가 있는 GP에 찾아가도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도, 아들도, 사업체도 중요하지만 내가 없는 세상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가 살아야만 했다.      


때로는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배짱있게 무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서울과 런던에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도시를 떠나는 일은 여행에서나 가능하였다.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한국을 방문하면 시골의 고향집에 내려갔다. 그럴 때마다 텅 빈 시골의 고향은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어머니까지 돌아가시자 고향의 기능은 작동을 멈추고 말았다. 그 기능은 물론 마음의 고향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 산골 생활을 꿈꾸는 일은 이율배반적이었고 모순임에 틀림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지만 그 꿈이 굴절되고 움츠러들 때마다 나는 길 잃은 어린양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요즘 시골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귀촌을 결정하려면 용감하거나 무식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신만의 계획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오히려 계획이 있었더라면 결단은 여느 때처럼 또다시 자기 합리화와 함께 도시를 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붙들고 늘어지다가 유예되고 말았을 것이다. 퇴사나 이민 앞에서 수없이 망설이고 방황하는 일처럼, 나에게 귀촌은 아름다운 꿈에 불과한 그저 그렇고 그런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흔히들 인생을 이야기할 때 평탄한 세월도 평탄한 인생도 없다고 말한다.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듯이 이번에도 반전이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이번 봄이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을 때 그 꿈이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어둠이 내릴 때까지 산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아직도 믿기지 않을 만큼 꿈은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슬그머니 현재 진행형이나 현재 완료형으로 자릴 잡아가고 있다.      


 산중 그것도 국립공원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는 여동생의 톡 메시지 하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여동생은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과 펜션 옆에 가게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내려와서 운영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자다가 일어나서 그 톡을 보았고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톡을 보냈다. 그게 전부였다. 가게 자리가 어떻고, 장사가 어느 정도 되고, 보증금에 월세는 얼마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권리금 문제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그때도 벚꽃이 지고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었다. 서울 외곽에 살던 여동생 부부가 갑자기 귀촌을 선언하였다. 땅 끝 마을이 지척인 영암 월출산으로 내려가기까지 채 보름이 걸리지 않았다. 살던 아파트는 부동산에 내놓기가 무섭게 나갔다. 그때의 여동생처럼 나도 톡 하나 받고 살고 있던 월세 오피스텔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코로나 19 여파로 쉽게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피스텔은 그다음 날 나갔고 나는 허겁지겁 짐들을 택배로 보내고 예정된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가보는 여행다운 여행이었다. 제주도는 텅 비어서 유채꽃의 색깔만큼이나 아름답지만 슬퍼 보였다. 그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남은 짐들을 차에 싣고 산중으로 들어왔다. 내 저질 체력으로는  하루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홀로 계시는 고향집에 들러 1박을 하고 나서야 국립공원 입주는 마무리되었다. 월출산 입구에는 40만 평에 달하는 유채 밭에 노란 유채꽃이 역시 슬프게 피어있었다.    

 

 모든 새로운 시작은 포기와 함께 찾아왔다. 이민을 비롯하여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뭔가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포기하고 비울 때마다 뭔가가 채워져 가고 있었다. 간절하면 우주도 도와준다는 말이 자꾸 귓전에 맴돈다. 비가 내리는 오늘도 산을 바라보고 있다. 산에 올랐을 때는 정작 보이지 않던 산이 보인다.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의 말이 산을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산속에는 우리가 찾는 보물과 진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침묵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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