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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pr 21. 2020

당신은 어떠한 보물을 찾고 있나요?

그 남자의 산중일기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에서>    

 

 나는 보물을 찾듯이 거쳐를 옮겼고 이사를 다녔다. 지난주에 막상 산중으로 이사를 왔지만 아직 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산에 대해 배워가는 중이다. 산에서 보물을 찾으려면 일단  산의 언어부터 배워야 한다. 산이 가르쳐주는 언어들을 배워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 자신의 우울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정도는 스스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그러다 보면 내가 찾는 보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산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어제의 슬픔을 애도라도 하듯이 사막의 무서운 침묵만큼이나 산 또한 침묵하고 있었다. 산은 매 순간마다 사막처럼 옷을 갈아입었고 나약한 인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변덕스러웠다. 심지어 무서운 바람소리로 위협하기도 하였다. 산중에서 처음 맞이하는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강한 바람이 몰아친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바람 앞에서 대지가 휘청일 때조차 산을 이루는 바위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단지 강한 척 뽐내는 여리디 여린 바람의 언어를 이해하고 투정 정도로 받아주는 바위산은 듬직함을 넘어서 마치 작은 행성이나 우주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바람의 언어를 바위들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바위들만의 언어를 바람이 이해하듯이.    

  

 대지의 모든 사물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베두인족 친구의 말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아메리카의 사라져 가는 인디언 부족에게도, 아마존의 이름 모를 원시 부족에게도, 세렝게티 초원의 부족에게도 이 정령들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정령들의 언어들을 배우고 싶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에 오른다. 새는 새의 언어로, 나무는 나무의 언어로, 바위는 바위의 언어로, 바람은 바람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그 언어는 같은 정령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처럼 읽고 쓰고 말하는 언어야말로 인간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인간을 아프게 하고 만다. 종국에는 인간이 인간을 파괴시키게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해고 통보를 문자로 받는 세상에서 언어의 잔혹성을 실감한다. 빚 독촉 전화나 문자를 받을 때의 그 상실감이나, 이혼이나 기타 송사에 휘말려 변호사나 법원의 문자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말이면 다 말인 것처럼 거리낌 없이 지껄이는 유명 인사들을 보면서 차라리 언어 자체를 없애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침묵의 언어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새 교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생각을 지껄이고 있다. 나는 산에게 무엇을 줄 수 있고 산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산과 거래를 하려 든다고 산의 정령이 노할 수 도 있지만 나는 그만큼 절박하다.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통증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으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때로는 익숙함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는 발칙한 시도도 빼놓지 않는다. 그래서 도시를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온 것이다.   

   

 현대 의학기술로는 원인도 잘 모르는 질병 앞에서 의연하게 사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주어진 운명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 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내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내가 살 수 있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락한 방들을 만들어 두어야만 한다. 살아있는 그날까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아껴주고, 나를 사랑하고 싶다. 지금까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에게 친절하지도, 관대하지도 않았다. 마치 내 안의 나를 타인을 대하듯 냉대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마지막 연인과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이별 여행을 떠났던 이유도 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남의 탓이라고 여기며 살아오던 나였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밀밭에서 그녀와 나누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녀에 의하면 나는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여 고통스럽게 살아오고 있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일은 더 큰 고통이었다. 육체와 영혼이 엇박자를 보일 때마다 중재자가 필요하였지만 세상은 아무런 중재를 하려 들지 않았다. 정령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그 해답은 연금술사에서 나오는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가 보물을 찾아 나서는 과정과 유사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보물을 찾고 있었는가?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그 보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찾아 헤매고 다녔다. 그 보물은 세계 도처를 다녀도 찾지 못하였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허무했고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나 자신의 무능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었고 그렇게 자학하고 자책할 때마다 주위의 친구들과 연인들이 떠나갔다. 아마 그 결과가 지금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너무 심한 자학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다.

      

 이른 아침은 아니지만 바람소리에 눈을 떠야만 했다. 바람소리가 강한 날이어서인지 첫날처럼 새들은 울지 못했다. 울었는데도 바람소리에 묻히고 말았거나 내가 너무 늦게 아침을 맞이해서일 것이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 범하는 아침에 대한 무례였다. 그래도 느긋했다.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와 거대한 암벽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고 산에 오른다. 벌써 해는 떠올라 저만치 높이 솟아있었다. 차분하고 너그럽게 나의 게으름과 바람의 심술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산중은 무섭도록 적막하고 고요하다. 산사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새들도 울지 못하고 있다. 아주 가끔 마주치는 등산객마저도 표정이 어둡거나 무표정하다.      


 그 정적 속에서 문득 어제의 사고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 오후에 구름다리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는 신고를 받고 119 구급대원들이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남자는 등산화를 벗고 신발 속에 5만 원을 고이 접어서 넣어두었다고 했다. 그가 구름다리에서 뛰어내린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5만 원의 의미를 해석해낼 수 없었다. 왜 5만 원을 지갑에서 꺼내서 신발 속에 넣어두었을까. 세상을 버리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군가를 배려했던 마음이 따듯한 남자였으리라는 추측만 해본다. 어제는 지난 일요일처럼 하루 종일 비도 오지 않았고 오늘처럼 바람도 불지 않았다. 지천에 핀 꽃들과 연초록의 향연으로 숲은 고요하지만 정신이 없다. 산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날씨마저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런 날에도 누군가는 삶의 끈을 놓아야만 했다.      


 119 구급대원들이 죽은 자를 수습해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끝내 내다보지 못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할 용기가 없어서도, 죽음이라는 실체와 마주하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두고 떠났어야만 하는 그의 슬픔이 너무 선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물론이고 타인의 죽음에 애도할 줄 모르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나의 모습인 줄 알았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다. 그 타인은 어쩌면 산책하면서 나의 곁을 지나가던 무표정한 등산객 중의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5만 원을 등산화에 고이 넣어둔 이유는 어쩌면 사례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험한 산 정상 부근까지 올라와 자신의 시신을 수습해야만 하는 구급대원들이 막걸리나 소주라도 한잔 하라는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더라면, 이처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세상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경제 즉, 돈 문제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자산가도 많지만 빚에 허덕이는 이들도 많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에는 사막만큼이나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 위험들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름답게 포장되어 우리를 유혹할 뿐이다. 사막의 신기루를 좇다 보면 곧 오아시스를 발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한다. 그 오아시스는 야자나무와 종려나무에 둘러싸인 샘이 솟아오르는 사막에서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근거를 알 수 없는 확신으로 사막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몇 년 전 모로코의 사막을 여행한 적이 있다. 연금술사에서 대상들이 모로코의 탕헤르에서부터 이집트의 카이로까지 사막을 횡단하는 여정과는 다른 극히 일부의 사막 투어였다.   

 조용하고 평온할 것 같은 사막에는 오늘처럼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존재를 알 수 없는 바람들은 사막의 모래를 옮기며 순식간에 작은 산을 만들어 보이기도 하였다. 파도가 끊임없이 모래를 괴롭히듯이 말이다. 런던에서 만난 베두인족 출신의 친구가 동행하였고 사막에서 1박을 하는 여정이었다. 일종의 패키지 상품에 끼여간 것이었다. 일행은 총 6명이었고 사막에는 이미 우리가 하룻밤 묶을 텐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영국인과 프랑스인 그리고 미국인이 섞여 있었다. 친구와 가이드는 사막을 걷는 중에도 여러 차례 동쪽을 향해 절했고 나와 외국인들은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 친구는 사막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이드는 다른 일행과 주로 내화를 나누었다. 친구는 사막의 정령들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과 사막의 부족들이 왜 전쟁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와 닫지 않았다. 같은 알라신을 믿는 사람들 간의 죽고 죽이는 일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였지만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어디나 같은 일이 반복되며 정의롭지 못한 승자의 역사를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막 여행은 생각처럼 낭만적이지도 멋지지도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태양 아래서 마치 북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사막에서 왜 아침과 저녁에만 움직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막에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걸으면 다 길이 되는 곳이 사막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막이 떠오른 이유는 산중의 적막과 함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사막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생명을 가진 동물 중 거의 유일하게 자신을 스스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세상의 어떤 삶도 의미 없는 삶은 없을 것이다. 그깟 인간이 발명해서 사용하는 종이 쪼가리들이 인간을 죽이고 살린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아침이다. 하지만 그 또한 우리가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현실이고 세상일 뿐이다. 가진 것이 없다고 투덜대던 나는 사실 부자다. 집도 절도 없는 나는 그래도 부채마저 없기 때문이다. 사막의 정령들 마저도, 그 간절함 순으로 목마름에 지친 자들을 오아시스로 안내해 준다는 베두인족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무슨 일이든, 어떤 질병이든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무장하면 정령이나 하늘뿐 아니라 온 우주가 돕는다고 한다. 시간을 하루만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어제 투신한 사람을 만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싶다. 그가 가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부질없는 확신이 드는 슬픈 하루다. 그 남자는 과연 어떠한 보물을 찾아 나섰다가 실패한 것일까? 실패한 과정 자체에서는 보물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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