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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pr 19. 2020

떠나지 못하게 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산중에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 바람이 허락도 없이 나의 빰과 귓불과 억센 머리를 더듬고 줄행랑을 친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는데 아침의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바람처럼 떠나고 싶은 날이 많았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던 시절도 있었다. 바람처럼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삶을 원점으로 리셋하고 싶은 때도 있었다. 바람처럼 영영 사라져 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결코 사라지지도 리셋되지도 않은 채 삶의 애환들을 부풀려서 풍선의 크기만 키워가고 있었다. 미지의 것들과 황금과 모험, 그리고 피라미드를 찾아 떠났던 사람들의 꿈과 땀냄새가 배어 있었던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의 바람처럼.


 이른 아침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이름도 모를 새의 가족들이 제법 떠들썩하게 산장의 아침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가 오려나 보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니, 아침부터 새나 개미들이 바삐 움직이면 그날은 온종일 비가 내렸었다. 새소리에 눈을 뜨는 삶이 갑자기 현실이 되었지만 여전히 꿈을 꾸는 느낌이다. 사실 꿈속에서도 쉽지 않은 장면들이다. 도시에서의 꿈들은 가위가 눌리거나 악몽인 경우가 더 많았다. 좋은 꿈들은 거의 없었다. 꿈속에서는 나에게 사기 치고 도망친 사람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목이 졸리기도 하였다. 가위눌리는 것은 예사였다. 그래서 그런 악몽들을 꾸지 않을 자유를 찾아왔다.

 창밖에는 구름 커튼에 절반쯤 모습을 드러낸 월출산의 바위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태고적부터 그랬을법한 바위들의 묵직한 몸짓에 비로소 산중임을 느낀다.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산중에 와 있다. 분명 내 앞의 장면들은 유선이나 무선을 통해 전파되는 몇 시간 또는 몇 초 전에 죽은 것들이 아닌 생명을 가진 날 것들이다. 날것의 비린내는 공기 속에도 묻어난다. 아직 왕초보 산중 생활이지만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 진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새침한 바람은 금방이라도 비구름을 몰고 올 것만 같다. 산장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켠다. 도시에서는 꿈꿀 수 없는 기지개다. 한참을 넋을 놓고 바위들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어떠한 비하도, 무시도, 왕따도, 격멸도, 압박도 없다. 어제 이삿짐 푸느라 드문드문 보았던 바위 봉우리들과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던 찰나, 우리의 애틋한 사이를 방해하는 훼방꾼이 등장하고 말았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매번 많은 종류의 저항과의 싸움이었다.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저항부터 두 어깨를 무섭게 짓누르는 감당할 수 없는 저항까지.

 결국 우리의 심오한 대화는 채 10여분을 넘기지 못하였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는 온종일 내렸고 결국 모든 세상을 정지시켜 놓고 말았다. 산중에서의 비는 여유와 휴식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생각마저도 멈추게 하였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이지 모르지만 멈춤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조금씩 깨닫게 되길 희망한다. 자연이 주는 단순한 풍경은 잡념들이 비집고 들어와 생각의 가지를 확장해 나가는 의미 없는 추상적 관념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누구와 비교하려 해도 오로지 자연뿐이다. 나를 자연과 비교하는 일 자체가 우습다. 도시에서 그렇게 비교하며 또는 비교당하며 울분을 터트리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인간의 깃털보다 가벼운 생각은 결국 함몰되고 만다. 새의 깃털에 물이 스며들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직 대지의 생명들만이 생각을 하고 비와 사랑을 나눌 뿐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 대지의 의지로 비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도 비는 내리고 또한 내리고 싶은 만큼 내리고 만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어날 일은 무슨 수를 써도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온 질병들마저도 미워하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즐겁게 같이 생활하고 같이 가야 할 동반자일 뿐이다.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처럼 보물을 찾아 세계 도처를 유랑하다 결국 깊고 험한 산골까지 들어왔다. 그것도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서였다. 당연히 보물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 어쩌면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 보물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보물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바로 보물을 찾아가는 지난하고 험난한 여정이 바로 나와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이다. 태초의 인간부터 지금의 우리까지 어쩌면 같은 여정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찾거나 정체를 알고 싶었던 자아와, 실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그 불안에서 야기되는 우울들은 모두 여정에 불과하였다. 사유와 통찰을 통해 얻어지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박함은 결국 물과 먹이와 밤이슬을 막아줄 지붕을 찾는 양들의 여정과 다를 바 없었다. 양들은 물과 먹이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사실 우리 인간도 양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려 안달하고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학습을 하고 취업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취업을 하면 당연히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취업은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에, 결혼은 통제할 수 없는 호르몬을 통해 사랑이라는 굴레로,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산고와 죽을 만큼 힘이 드는 육아는 사회나 국가 심지어 종의 보존을 위한 성스러운 작업으로 미화시켜왔다. 하나의 독립적인 개인에게는, 철저하게 사회나 국가의 통제하에 사회가 원하는 대로 유기체로서의 삶을 살아주어야 할 의무가 부가되어왔다. 하지만 여기에 반기를 든 세대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의무에 반기를 드는 세대의 출현으로 사회도 국가도 당황하고 있다. 물론 개인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수천수만 년의 질서에 저항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당연시 여겨왔던 기존 제도와 관습에의 저항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부모나 부모의 부모 세대들이 잃어버렸던 보물을 이젠 젊은 세대들이 찾아 나서고 있다. 그 보물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들 자신도 그들이 속한 세상도 모른다. 현자들이 가르쳐주던 진리가 더 이상 모든 이에게 진리가 아닐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택 앞에 무기력했던 개인들은 드디어 다른 선택지를 뽑아들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익숙함과의 결별의 시대는 콜럼버스의 대항해 시대만큼이나 혼돈과 실수의 연속이지만 결국은 또 다른 익숙함을 만들어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익숙함을 즐기는 종이 새롭게 출연할 것이다.


 난 보물과 양들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셈이군. 산티아고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과 가지고 싶은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중략]
 이 바람에는 미지의 것들과 황금과 모험, 그리고 피라미드를 찾아 떠났던 사람들의 꿈과 땀냄새가 배어 있었다. 산티아고는 어디로 갈 수 있는 바람의 자유가 부러웠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떠나지 못하게 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자신 말고는. 양들, 양털 가게 주인의 딸, 그리고 안달루시아의 평원은 그에게 단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가는 과정들에 불과했다.
[파울로 코엘류, 연금술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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