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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pr 18. 2020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꿈을 현실로 만드는 가장 간단한 방법

      


 어젯밤 화려한 도시를 버리고 산골로 들어왔다. 도시에는 없는 여백을 찾아 떠나온 것이다. 나는 삶의 여백이 필요한 순간마다 결단을 내렸고, 결단을 내릴 때마다 무언가를 포기해왔다. 포기는 지금까지 내 삶의 여백을 지켜준 든든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중요한 선택을 위해 ”결단”을 내릴 때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할지도 모르는 현재의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했다. 포기는 깨끗하게 버리는 것이었다. 미련이 남지만 그 미련마저도 지워버리는 것이 포기였다. 이민을 위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어느 날 조용하게 삶에서 지워버렸듯이.      


 우리는 많은 꿈을 꾸며 살아간다.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던 꿈을 찾아 떠나거나,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만 그 꿈은 좀처럼 현실로 다가서지 못하고 주위를 머뭇거릴 뿐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꿈만 꾸다 만다. 꿈 조자 꾸지 못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나마 행복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꿈이라 함은 자면서 비몽사몽 또는 가위눌리는 등등의 그러한 꿈이 아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제법 그럴듯한 형체를 갖추고 가슴속에서 주인의 눈치를 보며 기생하는 단세포 동물 같은 것이다. 그 단세포 동물 같은 꿈들이 세포분열을 하며 언젠가는 세상 밖으로 나오려 몸부림친다. 저마다의 간절함을 품고 있는 단세포들은 세포 분열할 그 날만을 꿈꾸며 가슴속에 웅크린 채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야기하려는 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많은 꿈을 꾸었고 운 좋게도 그 꿈들을 대부분 이루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대단한 꿈들은 아니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 대가는 바로 양보나 보류 또는 병행이 아닌 ”포기“라는 가장 어렵고도 가장 쉬운 것이었다. 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좌절하며 괴로워하는 이유도 ”포기“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포기“라는 단어를 금기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정의 의미를 내포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포기처럼 긍정적이고 멋진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려하는 이 단어를 나는 삶의 좌우명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그 포기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떠한 꿈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포기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 또 하나의 소중한 꿈을 이루었다. 꿈을 이루었다기보다는 이제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바로 산중에 살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꿈이 현실이 되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온지도 1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년 반의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산골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수도권의 근교가 아닌 땅 끝 마을 인근의 영암 월출산으로 들어왔다. 국립공원이라서 산속에서 살 수는 없다. 아름다운 산의 입구에서 나름대로 경제 활동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지난주 제주도에 갔다가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었다. 김영갑 갤러리와 반 고흐의 빛의 벙커에서 느낀 외로움은 영원할 것만 같은 것들이었다. 또 다른 삶의 여백이 필요한 순간임을 직시할 수 있었다.  사실 산골로의 이주는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그 꿈을 실행할지는 너무도 막연하였다. 꿈을 이루려면 그보다 더한 것을 내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번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산골 생활의 꿈을 이루려면 도시의 많은 편리함과 서울이라는 일터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랬다. 산을 택하기 위해서는 서울을 포기해야만 했다. 학생 시절 스카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꽃다운 청춘을 포기해야만 했다. 졸업 후 공기업을 선택하였을 때에는 대기업의 유연함과 비전을 포기해야 했다. 런던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을 때도 서울을 포기했었다. 가족과 친구들과 멀어지는 일처럼 고통스러운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결혼을 선택할 때에도 많은 멋진(?) 여자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성 친구가 끝까지 친구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서 마음에서도 멀어져 갔다. 이민 생활에서 나름대로 성공(?)했던 이유도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취미와 친구들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 흔한 골프 한번 치러가지 않았다. 건강을 잃었을 때는 이민생활로 다져놓은 터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렇게 무언가를 내주어야만 다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 내어준 무언가가 아쉬웠고 그 대가로 얻어낸 무언가가 좋았지만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삶의 여백을 채워갈 때마다 더 큰 여백이 다가왔지만 그 여백을 재단하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렇게 재단사가 되어 매번 꿈을 여백에 맞게 재단하며 살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취미생활을 포기하고 읽고 쓰는 일에만 매진했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일은 나에게 불가능하였다. 언제나 삶의 여백이 필요하였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때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캔버스 앞에서 느꼈던 화가로서의 두려움과 열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포기라는 강력한 무기는 또 다른 불확실한 삶에 저항하게 해 주었다. 그 저항은 요트의 역풍처럼 배를 앞으로 나가게 할 수 있었다. 역풍을 가르며 바람과 파도에 저항하는 일을 통해 요트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저항을 헤쳐 나아갈 때마다 단단하고 묵직한 미래는 쪼개어지고, 부서지며 없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길이 넓어지고 평탄해질수록 비어있는 여백은 충만한 여백으로 바뀌어갔다.
      

 의욕적으로 일하려면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 거라고 하지.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너도 그런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잖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고 한다.     
  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무엇이든 그려야만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 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빈센트 반 고흐의 영혼의 편지, 1884년 10월에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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