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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May 21. 2020

보신탕을 드시던 아버지에게 반려견이 생겼다!

아버지에게 반려견은 처음이라서...

 


 얼마  시골의 고향집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아버지 홀로 계시는 고향집 마당에 강아지보다    개가  마리 있었다. 나와의  대면이었는데도 녀석은 짖지 않았다. 경계태세를 갖추지 않고 오히려 꼬리를 흔들며 달려든다. 개의 본능은 낯선 사람과 마주하면 일단 적의를 드러내어야 한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려야 한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시골 마을에 극성인 도둑을 지키라고 강아지  마리를 지인에게서 얻어왔다는 것이다. 혈통 자체가 토종 사냥개라서 도둑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녀석은 아버지의 예상을 완전히 깨고 말았다. 오히려 도둑을 반길 녀석이라며 혀를 차신다. 그래서 녀석이 별로 마음에  든다고 하신다. 마당에 묶어두고 키우는데 그래도 매일 시간  때마다 산책을 시킨다며 은근히 녀석의 총명함을 자랑하신다. 외롭기는 아버지나 녀석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아버지에게도 서로 의지할 대상이 생겼다는 사실에 자식들은 모두 좋아했다. 런던에 있는 나의 고양이 단오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다롱이와 매일 친구처럼 지낼 것이다.


          

 녀석의 이름은 "다롱"이라고 하셨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서 개들의 이름들은 비슷비슷했다. 누렁이나 흰둥이 또는 검둥이가 대부분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개들은 여름철 복날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만 해도 개는 애완이나 반려동물이 아니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 보면 개는 어디론가 팔려나가고 없었다. 나와 여동생은 개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마을의 개들은 그렇게 식용으로 팔려나가거나 마을에서 도축되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마을에서 자행되었다. 개를 식용으로 먹는 나라는 우리 말고도 많았지만 유독 한국이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잔인한 도축방법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시골의 고향 마을도 변했다. 더 이상 공공연하게 개고기를 먹진 않는다. 먹어도 몰래 숨어서 먹을 것이다. 우리 집에도 많은 개들을 키워왔지만 아버지가 개에게 이름을 손수 지어주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린 개에게 이름까지 지어주신 걸로 보아 아버지가 달라지긴 달라지신 거 같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보신탕을 드시는 아버지가 반려견을 키운다는 일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보신탕을 드시지는 않았다. 내가 대학생 무렵까지는 가족 누구도 보신탕을 먹지 못하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아버지였다. 이유는 그 당시만 해도 아버지의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의 윤회를 자주 강조하시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부터 달라지셨다. 특정 종교를 믿으시면서 오히려 보신탕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보신탕을 드시는 아버지를 자식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마저도 보신탕은 질색을 하실 정도로 싫어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여동생을 포함하여 자식들은 아버지를 설득시켜 보려고 안감힘을 쓰고 있다. 보신탕이 몸에 좋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전혀 근거가 없으니 재발 보신탕만은 드시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보신탕이 드시고 싶을 때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자연산 광어회나 흑산도 홍어를 사드린다고 협박(?) 아닌 협박도 해보았지만 효과가 없다. 여전히 보신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다.


 이 협박(?)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은 오래전부터 반려견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매주 한 번씩 반려견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간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여동생 내외와 반려견들이 채워주고 있다. 무슨 보릿고개를 넘고 있는 중도 아닌데 보신탕이라니! 나와 여동생은 아버지의 보신탕 예찬론이 나오면 극도로 흥분한다. 세상에 먹을 음식이 널려있는데 아직도 보신탕이라니!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신다. 보신탕을 먹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고 불법도 아니라고 하시며 개인의 식생활까지 간섭하지 말라고 하신다. 흥분한 여동생은 보신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다롱이를 데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번 여름에도 초복, 중복, 말복이 찾아올 것이다. 다롱이가 삼복더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아버지가 술 한 잔 드시고 동네 어른들과 작당을 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괜한 오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버지가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아버지는 이미 다롱이와 정이 많이 들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고향에 홀로 남으신 아버지에게 다롱이는 단순한 반려견이 아닐 것이다. 자식이나 손주 이상으로 생각하고 계실 것이다. 아버지 인생에서 반려견은 처음이라서 강아지였던 다롱이를 데려왔을 때만 하더라도 입맛을 다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식용이 아닌 반려견으로 키워보니 아버지도 당황하신 눈치다. 매번 고향집에 가면 아버지는 다롱이 자랑부터 하신다. 많은 개들을 보았지만 다롱이처럼 날렵하고 똑똑한 녀석은 처음이라고. 사실, 세상의 모든 개들은 다 날렵하고 똑똑하다. 고양이와는 달리 학습이 가능하고 주인에게 충성심도 보여준다. 기나긴 역사에서 인간에게 길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동물 중 하나가 바로 개였다. 아니면 들개나 늑대로 험한 야생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개와 인간의 공존은 개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인간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당한 슬픈 생존법일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를 우리 다롱이가 잘 채워가길 바란다. 아버지의 자식들도 다롱이를 핑계로 더 자주 고향집에 갈 것이다. 이번 여름이 고비긴 하지만 그전에 아버지는 보신탕을 끊으실 것이다. 자식들의 끊임없는 협박(?)과 회유를 아버지도 더 이상 무시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용돈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현금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아버지다. 아버지는 평생 그 흔한 신용카드 한번 만들어보지 않으셨다. 아직도 현금 만 사용하신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전화를 걸고 받는 용도로만 사용하신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급변하는 세상은 아버지식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바꾸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음식까지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께 죄송하지만 그래도 보신탕만은 이제 포기하시길 바란다. 세상에는 먹을 음식들로 넘쳐난다. 고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보신탕을 드시지 못하게 하는 일이 불효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다롱이가 눈에 선하다. 녀석이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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