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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May 27. 2020

가슴뛰는 일엔 북소리가 들렸다!

방랑벽은 일종의 가슴 뛰는 일이었고 북소리가 울렸다

                                                     


 어릴 적부터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나와 가족과 친구들이 살고 있는 이 작은 산골마을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는 이 산골 마을보다 더 큰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그 몹쓸 놈의(?) 증세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좁디좁은 산골 밖의 세상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사회과부도“라는 지도책이 문제였다. 지도책은 글자를 몰라도 볼 수 있었다. 지도를 보기 위해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형들에게 졸랐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제일 한가해 보이는 할머니에게 부탁했지만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글을 모르셨다. 결국 지도책을 보라고 던져주신 아버지께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100일 속성 한글 교실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글 교과서 말고도 필요 없어 보이는 회초리도 100개를 준비하셨다. 그 회초리는 찰랑찰랑하면서 나긋나긋한   한국산 싸리나무였다. 마당을 쓸 때 필요한 싸리비의 재료가 회초리로 변한 것이다.

 그렇게 100일 만에 회초리의 위협 아래 나는 아버지의 한글학교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100일도 안되어서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나는 워낙 말도 늦고 머리가 나빠서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억이 거의 없다. 있어도 회초리로 종아리를 던 자극적인 기억밖에 없다. 100개의 회초리 중 10개 정도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회초리가 부러질 정도로 종아리를 맞아가면 한글을 배웠다. 산골에서 개인과외를 받는 아이는 내가 유일했다. 물론 한글을 배우고 나서 아버지로부터 다른 과목 선행학습도 받았다. 될성싶은 나무나 수재가 될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한다. 모든 게 느리고 어리숙한 당신의 넷째 아들을 방치했다가는 바보가 될 것만 같아서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무서운 교육법 덕분에 나는 공부와 글의 재미에 일찌감치 빠져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신나는 일은, 한글을 막 깨치고 나서 지도책을 보는 일이었다. 세상을 보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때부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작은 꿈들이 지도 책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곤 하였다. 어른이 되면 이 많은 나라들을 꼭 가보고 싶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비슷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다.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았다.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서울의 이모집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을 것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혼자서 고속버스를 탔다. 시골집 앞에서 전주행 직행버스를 타고 전주 종합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서울행 고속버스 차표를 샀다. 혼자서 전주를 나와본 기억도 처음이었다. 전주는 생각보다 거대한(?) 도시였고 차도 많았고 높은 빌딩들도 많았다. 서울은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그 북소리는 환희보다는 불안에서 오는 북소리였다. 멀미 탓도 있었다. 당시에는 차만 타면 기름 냄새와 매연 그리고 흔들림으로 멀리를 하였다. 시골 촌놈들은 대부분 그랬다. 어쨌든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20분이나 늦게 출발하였다. 전주를 떠날 때의 그 불안과 북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강남 고속터미널에서는 이모 아들인 사촌 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었다. 혹시라도 사촌 형을 만나지 못하면 나는 서울에서 미아가 될 수도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내부는 나의 불안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오줌이 마려웠다. 긴장하면 생기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고속버스가 휴게소에서 쉬려면 최소 한 시간 이상을 더 달려야 한다고 했다. 당시의 묘한 긴장감은 어린 나에게는 불안을 넘어 일정 크기의 공포였다. 어쩌자고 혼자 서울에 가겠다고 나섰는지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를 홀로 보낸 어머니와 아버지도 미웠다. 그 많은 형들 중 하나와 같이 다녀오라고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의 독립심(?)을 10살 때부터 심어 주시려고 하셨던 것이 틀림없었다. 육 남매 중 넷째 아들만이라도 좀 더 크고 넓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려는 일종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내가 탄 고속버스는 천안삼거리 휴게소에서 15분간 정차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당시에는 안내양이 있었다. 고속버스 안내양은 나보다 10살 정도 많아 보이는 누나였고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버스 기사 옆에는 안내양 누나가 앉을 수 있는 접이식 의자가 있었다. 오줌을 참고 참은 나는 버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면서 멘붕이 일어난 것이다. 나의 양쪽 눈의 동공이 무한히 확장되며 내가 내렸던 고속버스를 찾았다. 하지만 휴게소에 정차되어 있는 고속버스는 100대는 족히 넘어 보였다. "금호고속"이라는 버스만 기억할 뿐이었는데 금호고속버스가 너무 많았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였다. 다시 가슴이 요동치며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위기였다. 최대한 침착해야 했다. 일단 북소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였다. 정차시간이 15분이니 나에게는 12분이나 남아있다. 침착하자! 그런데 고속버스는 모양이나 색깔까지 비슷하였다. 전주에서 서울행도 한 대가 아니었다. 나는 안내양 누나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안내양 누나뿐이었다. 한 줄로 늘어선 고속버스 옆에서 타는 사람들을 아무리 보아도 안내양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버스들을 한 대씩 다 찾아다녀야만 했다. 대부분이 서울행이었기 때문에 출발지가 "전주"라고 되어있는 버스들을 찾았고 결국 내가 탔던 버스를 찾을 수 있었다. 안내양 누나한테 꿀밤을 한 대 맞고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 때문에 버스는 10분 정도 출발이 지연되었다. 자리에 앉고서야 북소리는 멈추었다. 하지만 서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인한 다른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어린 아들에게 이처럼 혹독한 경험을 하게 한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탄 버스가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사촌 형을 만난 순간, 해냈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신감"이라는 것을 처음 느껴보았다.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것처럼, 세상이라도 정복한 것처럼 기뻤다.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이 맛보았을 그 경험을 너무 이른 나이에 하는 기분이었다. 서울의 이모 집에서는 거의 한 달가량 지냈다. 이모집은 미아리 고개를 지나 성북구에 있었다.  머리 털나고 서울은 처음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놀랐고 이처럼 크고 넓은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매번 방학이면 염치도 없이 서울의 큰 이모와 작은 이모 집에 와서 지냈다. 그 시간에 다른 형제들은 논밭에서 그리고 방앗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나에게 일종의 특혜를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시골에서 아이들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일부였다. 그래서  아이들을 많이 낳았다. 그 노동의 시간들에서 나는 언제나 열외였다. 그 시간에 아버지는 내게 책을 읽게 하였고 지도책을 보게 하였다. 어머니는 방학이 되면 서울로 보내서 넓은 세상을 피부로 느끼게 하였다. 일종의 경각심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고향이 서울이었다는 사실이 나에겐 큰 행운이었다. 만일 이모들도 모두 시골에 살았더라면 초등학교 3학년인 내가 서울에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몸에는 여름이나 겨울이면 어디론가 떠나야만 한다는 DNA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불안감"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아마존의 열대우림이나 아프리카 사바나의 초원에 사는 사람들도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철저하게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다. 비단, 동물 사회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인간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가장 힘들고 좌절하던 젊은 날들은 어디론가 떠나지 못할 때였다. 나의 뇌와 심장에서는 어디론가 떠날 것을 끊임없이 주문하였다. 반면, 부모님은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이모들처럼 서울에 정착하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타의로 길러진 엉뚱한 자립심(?)은 여행에 대한 동경만을 키워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지도책의 나라들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느 나라부터 여행을 떠나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대학생이 되고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야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국내도 아니고 해외여행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하였다. 가난한 나에게 대학 학비와 생활비도 버거운데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대학을 가지 못한 다른 형제들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도 상당한 부담감이었다. 그래서 선뜻 비행기에 오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많은 나라에서 들려오는 요동치는 북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 북소리는 가슴이 요동치는 벅찬 소리였다.


  




 무라카미 하루끼가 이야기한 "북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는 멀고 긴 여행을 의미하였다. 어디로든 떠나지 않으면 그 북소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급한 대로, 방학 때마다 하숙집에서 짐을 빼서 자취하는 친구 집에 맡겨야만 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번 방학이면 나는 짐을 쌓고 친구의 자취방에 보관을 부탁하고 가까운 동남아로 떠났다. 친구들 몇 명이 의기투합해서 물가가 싼 나라를 찾다 보니 필리핀이 걸려들었다. 당시 서울에서 두 달 하숙비는 필리핀에서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때가 되면 언제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철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게 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그 철학!
     

 몇 번 필리핀을 들락거리면서 두 달 살기를 하다 보니 동남아도 좁아 보였다. 어느 날부터는 미국과 호주는 물론이고 유럽, 특히 영국에서도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 나라는 서울에서의 두 달 하숙비로는 항공권도 구할 수 없는 나라들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유럽을 들락거리기 시작하였다. 내가 취직을 한 것도 여행 때문이었다. 먼 여행에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소리가 멀리서 들릴수록 그 비용 또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은 여행만으로는 그 북소리를 잠재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택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북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북소리가 울리는 나라로 이민을 떠나야만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라로 무작정 이민을 떠난 이유다. 그렇게 20년을 영국에서 살았지만 북소리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는 그 북소리가 한국으로부터 들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국으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생활터전과 사업체가 있는 런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심장으로부터, 때로는 뇌의 깊은 곳으로부터 북소리가 들려왔다. 미칠 것 같았다. 괴롭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지독한 현실일 뿐이었다. 그 북소리를 외면할 때마다 나는 외롭고 아프기 시작하였다. 북소리를 따라갈 수도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북소리를 외면한 대가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육체와 영혼을 내주고서야 북소리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1년 반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북소리를 따라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거처를 다산신도시에서 한강신도시로 그리고 이번에는 남도의 끝자락에 우뚝 솟아있는 월출산 국립공원까지 들어온 것이다. 산중에서도 그 북소리는 들리고 있다. 이 북소리가 잦아들거나 멈추었을 때 나는 이름 없는 어느 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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