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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May 30. 2020

아주 흔하고 헛된 맹세들!

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걸까?

 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변하지 못하는 걸까?                          


 유채꽃이 만발하던 어느날이었다. 여동생의 카톡 메시지 하나가 나의 생활을 바꾸어놓았다. 그렇게 갑자기 남도의 산중으로 내려오면서 여동생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여동생 부부는 읍내의 아파트에 나는 펜션에서 거주한다. 어쩌다가 통화나 한 번씩 하던 여동생과 같은 집은 아니지만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여동생과 매일 삼시세끼 밥을 먹으며 그간 지 못했던 엄청난 사실들에 놀라고 있는 중이다. 아들부잣집에서 외동딸인 여동생과는 세살 터울이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도시로 나왔고 그 때부터 떨어져 살기 시작하였다. 어릴적 여동생은 외동딸이었지만 선머슴아(톰보이) 기질이 강했다. 놀이든 싸움이든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다. 공부 빼고는 다 잘했다. 중년이 되어서 여동생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모두 다 나의 질병들 덕분이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별걸 다 가지고 감사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여동생은 누나 이상이거나 때로는 어머니처럼 느껴진다. 삶에 지치고 병들어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오직 여동생뿐이다. 천사도 이런 천사가 없다. 하지만 이 천사가 무서운 야누스(천사<=>성깔+성질머리의 악마)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수시로 선과 악의 금(선)을 넘나든다.



충동귀촌, 10년의 미래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훅하고 날아들다.


 여동생 부부는 1년 전 이곳 남도의 명산인 월출산 국립공원으로 귀촌하였다. 예정에 전혀 없던 "충동귀촌"이었다. 서울 인근에 살던중 남편이 사고(?)를 치고 피신겸 머리도 식힐겸 어느날 갑자기 혼자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월출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빈 가게와 펜션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아내와 상의한마디 없이 그 자리에서 건물주와 만나 임대 계약을 해버린 것이다. 그때 계약하지 않으면 평생 찌든 서울살이를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지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식당만 했고 펜션은 몇달 후에 했지만. 아무튼 골프나 치러다니고 반려견들 산책이나 시키던 아줌마가 갑자기 식당 사장님이 되고 말았다. 정말로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이처럼 중차대한 일을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여동생도 언젠가는 귀촌을 해야겠다고 꿈꾸던 일이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고 만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10년이라는 미래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훅하고 날아든 것이다.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거야!"


 남편의 충동귀촌으로 결국 아파트를 팔고 내려갔다. 불과 1년전 일이다. 여동생은 울며겨자먹기로 국립공원에서 식당과 펜션을 운영하게 되었다. 자리잡느라 고생도 하였지만 제법 운영이 되었다. 코로나 이전 까지는. 부부가 하루종일 같이 붙어있으면서 다툼들이 잦아져갔다. 런던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내가 아내와 그랬던 것처럼. 부부가 낮에도 같이 있으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1년후에 내려와보니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루에도 열 두 번은 싸우는 것 같다. 마치 어머니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돌려보는 듯하다.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거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 바로 여동생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화장을 할 때도 가장 많이 울던 사람이 바로 여동생이었다. 그 다음이 아버지와 이모들이었다. 그런데 여동생의 셩격이나 라이프 스타일은 놀랍게도 어머니와 붕어빵이었다. 이 판박이는 비단 우리 집안의 문제만은 아닐것이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글들을 자주 접하지만 그 중앙에 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 또한 나의 운명이리라!


때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를 악물고 웃음으로 승화시키도록 강요받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비록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릴지라도..


 평소에는 상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기까지 한 여동생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정도 많아 국립공원의 길냥이란 길냥이들은 다 돌본다. 녀석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얼굴이 크다고 얼큰이, 코에 점이 있다고 코점이, 검은 색에 흰색이 섞였다고  흑백이... 이런 식이다. 천사같은 그녀지만 일단 화가 나면 국립공원 전체가 들썩인다. 아마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마저도 숨을 죽일 것이다. 화가나면 참아야 하는데 결코 참는법이 없다. 참을줄을 모르는 것인지, 참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을 정도다. 그래도 유일하게 참는다고 참을 때는 손님들 앞에서뿐이다. 이를 악물고 웃는 모습의 비애를 볼 때마다 오빠로서 마음이 아프다. 서글프다. 내가 런던에서 오랜세월 그랬던 것처럼 여동생이 갑자기 그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장사를 한다는 것은 참고 견디는 일이다. 어쩌면 월급을 받는 직원들보다 몇 배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직장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있듯이 식당에 오는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여동생은 일에서만은 "프로참을러"였다. 어떤한 꼰대나 진상들의 꼴갑과 갑질에도 무조건 참는 괴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건 오직 손님에게만이다.

 소상공인의 비애를 매일 보기 때문에 어지간히 바쁘지 않으면 아랫층 식당에 내려가지 않는다. 여동생은 화가나면 일단 화부터 내야 한다. 화가 나는 순간에는 무슨 말이든 집어 던져야 직성이 풀린다. 아버지가 물건들을 집어 졌듯이. 안타깝게도 그 희생자가 우직하고 착한 그녀의 남편이다. 전직 프로복서 출신에 덩치는 소만한데 일방적으로 코너에 몰린다. 가드를 올리고 방어자세를 취하며 눈치만 살핀다. 시트콤이 따로 없다. 같은 남자가 봐도 민망할 정도다. 그런데 참을성이라고는 1도 없는 여동생의 급한 성격이 뜻하지 않는 선물도 안겨준다. 그래서 세상은 재미있고 살아볼 만 한지도 모른다. 여동생의 불같은 성격 덕분에 6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매일 보고 있다. 정도 많고 자상하지만 복잡한 건 질색인 어머니였다. 무슨 말이든 돌직구였다. 변화구나 슬라이더와 같이 한 박자 쉬는 것은 어머니의 DNA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무시무시한 욕부터 던졌다. "염병할놈", "육시랄놈", "찢어죽일놈", "문둥이가 물어갈놈".......,


아침에 콩을 까먹으며 육남매를 낳아서 길러주신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야만의 시대에 육남매를 낳으신 어머니!

 아주 어린 시절, 나에게 어머니는 세상의 전부였다. 어머니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포였다. 어머니의 성격은 아버지와 정 반대다. 정반대이면 서로가 서로를 포기해서 싸울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왠걸, 단 하루라도 아버지와 다투지 않는날이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부인지 앙숙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이가 나쁜 부부에게서 나를 포함해 육남매가 태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믿기지 않는 일이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옛날엔 다 그랬어!" 하며 이모들은 웃어 넘기곤 하였다. 문제는 그 싸움의 끝이었다. 아주 가끔은 인내의 한계를 넘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별로 있지도 않은 세간살이들을 집어 던졌다. 심한 날에는 장독대가 몇 개씩 깨지기도 하였다. 그 폭력의 이면에는 고부갈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어린 내가 보기에도 폭력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었다. 고부갈등의 사이에서 아버지는 중심을 잡지 못하였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아내보다는 본인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우선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는 날에는 보따리를 싸서 서울의 이모 집으로 떠났다가 며칠 후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 며칠의 공백을 할머니가 대신하였지만 어머니의 부재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였다. 다섯명의 아들과 외동딸까지 폭풍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폭력은 자연스럽게 꼬리를 내리며 사그라들었다.


아주 흔하고 헛된 맹세들!

 나를 포함한 우리 육남매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로 맹세" 까지 하였다. 유일한 딸인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처럼도 살지 않을 것" 이라고 내게도 여러 번 다짐을 했었다. 어머니처럼 또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다짐을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니 부부간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사람" 그 자체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떠한 학습으로도 그 본성이나 성격이 바뀌기는 어렵다. 세 살 버릇 여든 가는 속담은 사람이 얼마나 바뀌기 힘든 존재인지를 잘 입증하고 있다. 버릇은 습관이고 그 사람의 타고난 본성 그 자체였다. 스스로 아무리 다짐을 해도, 매일 감사 일기를 써도, 미라클 모닝을 실천해도 그 사람의 본성이 변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느 순간 변했다고 느껴도 잠깐이었다. 다이어트의 요요현상처럼. 습관이나 언행 등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유기체들이 잠시 변한다 할지라도 그 때 뿐일 확률이 높다. 무시무시한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는데, 요즘은 놀랍게도 여동생을 보면서 어머니가 매일 살아서 국립공원에 오신다.      


 요즘 여동생 부부의 가장 큰 이슈는 남편의 음주문제다. 매일 술을 마시려는 남편과 이를 말리는 아내의 실랑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생 벌였던 바로 그 실랑이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여동생 남편은 여동생보다 서너 살 연하다. 술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술을 좋아한다. 한 때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3년 전부터 거대한 불행의 태풍이 들이치면서 저녁은 건너뛰어도 술은 건너뛰지 못하던 날들이었다. 런던에서는 한국의 소주나 막걸리가 비싸기 때문에 주로 생맥주를 마셨다. 가게 근처나 집 근처에는 선술집인 펍(Pub)이 널려 있다.  
    

 나에게는 음주에도 나름 원칙이 있었다. 근무시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직원들 앞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일하고 쉽지 않았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동생의 남편은 관광지 식당 특성상 지인들이 찾아오면 같이 한 잔 정도는 마셔주어야 한다. 그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지인들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접대용으로 한잔씩 마시다 보니 지인들이 오지 않아도 혼자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시면 중독 수준이다. 지인들이 오면 아예 술판이 벌어지면서 빈 술병들이 테이블에 그득해진다. 내가봐도 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이때, 주방에서 긴 머리를 흩날리며 혜성처럼 나타나는 아줌마가 있다. 바로 무서운 여동생이다.      


거부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DNA는 운명이자 형벌일수도..

 어머니의 큰 체구와 반대로 자그마하고 예쁜 여동생은 물불 가리지 않고 헤비급의 남편과 그 일당들에게 핵펀치를 날리고야 만다. 순간 그 큰 식당에는 정적만이 흐를 뿐이다. 그래도 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목소리가 더 커진다. 그러면 그 남편도 왕년의 주먹께나 쓰던 기질이 나오면서 으르렁거리며 대들지만 역부족이다. 괜히 대들었다가 없던 죄까지 뒤집어쓰고 만다. "가게에서 파는 술의 절반은 남편이 다 처먹는다."며 남편에게 술값을 요구한다. 소주든 맥주든 무조건 병당 만원씩이다. 술 말고도 다른 모든 일에서도 불협화음을 낸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둘은 아무 문제없이 잘 산다. 오빠가 한 달 이상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이 부부는 어떻게 된 일인지 매일 매순간 싸운다. 오빠 앞에서도, 아버지 앞에서도, 친구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고 나무래도 소용이 없다. 이모나 삼촌들이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훈수를 두어보지만 소귀에 경 읽기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동생이나 그녀의 남편은 그 가설을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매일 증명해 내고 있다.


"다름"을 머리나 마음에서 인정하는 것과 달리 DNA에 내장된 채 생활에서 받아들이는 그것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방금 전에도 여동생 얼굴에서 씩씩거리는 어머니를 만나고 이층으로 제 빨리 올라와버렸다. 6년전 이때쯤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잔뜩 화가 나 있었고 그 곁에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는 항상 본인이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목소리가 높아지고 다툼이 시작된다. 왜 어머니와 여동생은 자신들의 남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줄 수 없는 것일까?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다름"이 중요하다고 말은 잘도 한다. 하지만 다름도 상대가 이해해줄 수 있는 위 내에서만 가능해 보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달라도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다를 수 있었을까! 여동생과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다름"을 매번 인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고 인생일지도 모른다. 나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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