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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May 15. 2020

당신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삶을 바꾸겠어요?

어쩌다 보니 국립공원에 삽니다.



매일 생각도 사유도 아닌 어색한 혼란함에 눌려 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밝아오는 오늘을 맞이한다. 어머니와 여동생만큼 닮아있는 다가올 오늘과 이별 중이다. 이것이 내가 산에서 살아가는 하루의 방식이다.

 

 어쩌다 보니 꿈에서나 그리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산중에서의 삶을 꿈꾸어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산중에 있는 민박집이나 대피소 같은 곳에서 1년 살기를 해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연인들처럼 산에 뼈를 묻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비록 잠시지만, 산에 내 육체와 영혼을 맡겨보고 싶었다. 매일 저녁이 찾아들면, 내 손으로 직접 톱질하고 도끼로 팬 장작에 불을 지펴서, 작고 투박한 황토방의 구들장을 데워보고 싶었다. 음식은 제철 나물 위주로 소박하게 먹고 싶었다. 그러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집을 나가 우주의 미아가 된 나를 찾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반드시 그래아만 할 것 같았다. 누군가와 비교하거나 비교당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영혼으로 살아보면 가능할지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간절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다. 남의 일로만 알았던 나의 간절한 그 꿈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이렇게 이루어져가고 있다. 아직은 산중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왕초보 단계지만 매일 나 자신만을 위해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나는 누구일까?, 무엇을 찾고 있을까?, 왜 그리고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잘 살고는 있기나 한 것일까? 그렇게 매일 생각도 사유도 아닌 어색한 혼란함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밝아오는 오늘을 맞이하고 잡을 수 없는, 같지만 다른, 오늘과 이별 중이다.

                                                     

 개구리 합창단의 불협화음이 궁금해지는 산중의 밤!


 산중은 날이 상당히 빨리 어두워진다. 해가 천황봉 정상을 넘는 순간부터 저녁이고 밤이 시작된다. 밤이 찾아오면 산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 들판 쪽에서는 개구리 합창단이 노래하고 산 방향으로는 소쩍새들이 울어댄다. 소쩍새의 청아하고 슬픈 목소리에 비해 개구리들의 목소리는 중구난방이고 불협화음이다. 내가 만약 개구리 합창단의 지휘자라면 지휘봉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른다. 밤의 어둠이 진해질수록 이 불협화음은 점점 심해진다. 창문을 닫아야 할까를 생각하다가도 쉽사리 닫을 수가 없다. 창문을 닫으면 그새 개구리 합창단의 불협화음이 궁금해진다. 이 불협화음은 자정이 지나서야 수그러든다. 개구리들도 잠을 자긴 자나보다.
 
  소쩍새가 우는 까닭을 개구리들은 알 것이다. 개구리들이 울어대는 이유를 소쩍새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왜 그들이 밤새도록 그렇게 울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나만 모른다. 그들이 웃는지 우는지 아니면 노래하는지도 모르면서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뇌로 그들을 이해하려 든다. 오늘부터라도 개구리들이 우는 곳으로 좀 더 바짝 다가가서 그들과 진지하게 소통해보고 싶다. 물론 인간의 접근을 알면 극도의 경계태세를 보이며 그 큰 입을 다물고 말겠지만.      


 자연의 디테일을 음미하면서 우주와의 소통이 가능한 언어를 꿈꾸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매일 글을 쓰며 사색을 한다고 반드시 지혜로워지지 않나 보다. 나는 여전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오늘에 붙들려 희망마저 아득해져 가는 포로처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우주의 진리와 만물의 섭리에는 관심조차 없는 인간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보이는 만큼만 알고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만으로 이루어진 어정쩡한 사색과 그 사색을 글로 풀어내려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산중에 와서 깨달아가고 있다. 나는 여전히 어제의 오늘도 우둔하고 내일의 오늘도 우둔할 것이다.   


 며칠 전 "컨텍트"라는 영화를 봤다. 지구의 열두 국가를 방문한 외계인의 비행물체 중 하나가 미국의 어느 지역에 내렸다. 외계인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언어학자 루이스와 과학자 이안은 상식의 틀을 깨 가며 그들과의 소통을 이끌어내고 결국 외계인들과 전쟁 없이 그들을 돌려보낸다는 내용이다. 전쟁으로 파멸을 가져올 수 도 있지만 그 파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통뿐이었다. 외계인과의 대화가 가능하리라고 보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루이스 박사는 확신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내뱉는 언어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언어학자인 그녀의 임무였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르는 위험 앞에서 결국 루이스 교수는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 그들과의 소통에 성공한다.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파멸을 초래할 전쟁 일보 직전에.

 

 루이스와 이안의 마지막 씬의 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외계인은 조연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사랑과 그로 인해 태어나게 될 아이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희귀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루이스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상식적으로 나아서는 안될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아이는 태어난다. 그 아이의 이름이 해나(HANNAH)였다. 앞으로도 뒤로도 같은 이름이다. 아이는 결국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고 만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루이스와 이안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해나(HANNAH)는 태어났고 짧지만 엄마의 각별한 사랑을 느끼며 아름다운 세상을 살다 예정된 운명처럼 떠나갔다.


“그러니까 해나(HANNAH),
너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돼.
그들 외계인이 떠난 날.
(이안: 괜찮아요?)
모든 여정을 알면서도
그 끝을 알면서도
난 모든 걸 받아들였어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하지
H A N N A H
이젠 거꾸로 세어보자
H A N N A H     
이안: 준비되었어?
루이스: 네     
안녕?
괜찮아 금방 갈게
그래, 금방 갈게
아빠!
(이안: 괜찮아요?)
아빠가 간다.
자 준비됐지?
오늘은 별 이야기야
루이스: 이안
이안: 응
루이스: 이안, 당신의 전 생애를 다 볼 수 있다면 삶을 바꾸겠어요?

이안: 그보단 내가 요즘 느끼는 걸 얘기할게요.
난 평생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살았어요.
근데 요즘 제일 놀라운 건
그들(외계인들)을 만난 게 아니고
당신을 만난 거예요.
루이스: 당신 품이 이렇게 따뜻한 걸 잊고 있었어요.
이안: 당신 아이 가지고 싶어?
루이스: 응 갖고 싶어? “     

 

 오늘도 긴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내일 또 맞이하는 오늘이라서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오늘이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입학 전의 희미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그 기억은 나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에 관한 것이었다. 여동생은 항상 나에게 묻곤 하였다.      


 ”오빠! 한 밤 자고 나면 내일이 온다고 했잖아. 근데 한 밤 자고나도 왜 또 오늘이라고 하는 거야. 도대체 내일은 언제쯤에나 와? “      


 아직 입학도 하지 않는 미취학 아동인 오빠가 그 답을 알 길이 없었지만 여동생은 오랫동안 내일이 언제 오냐고 물었다. 그 오빠와 여동생은 들녘으로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울지도 않았다. 여동생에 대한 육아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내가 여동생을 업어서 키웠다고 한다. 여동생도 기억하는 사실을 당사자인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가끔 여동생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 엄마에게 야단맞던 일만이 기억에 남는다. 자존감은 고사하고 자아의 개념조차 형성이 되지 않던 아이에게도 야단을 맞는다는 일은 기분 나쁘거나 슬픈 일이었던 모양이다. 여동생을 힘겹게 보살핀다고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야단을 맞던 날 저녁에도 지금처럼 소쩍새가 울었다. 그 당시의 소쩍새 울음소리도 참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슬프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도 그 감성만은 나이가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아이가 아이를 돌봐야만 했던 "독박 육아"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 슬픔만은 여전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1년 반전에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의 거쳐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아파트 옆의 원룸으로 정해졌다. 나의 몸과 마음이 흘러내릴 때 곁에서 여동생은 헌신적으로 오빠를 돌봐 주었다. 언제 내일이 오냐며 내 등에 업혀서 묻던 꼬마가 그 시절 어머니보다 더 나이를 먹은 든든한 중년이 되어 있었다. 여동생에게서는 항상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들이 꿈틀거린다. 급한 성격이나 인정 많은 마음씨는 물론이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참아주는 법이 없이 그 자리에서 한바탕 쏟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직설적인 성격까지 두 사람은 닮아있었다. 이젠 내가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여동생에게 물어볼 때가 온 거 같다. 엄마! 도대체 내일은 언제 와. 왜 오늘이 지나면 또다시 오늘이지? 하지만 엄마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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