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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May 10. 2020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어쩌다 보니 국립공원에 삽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룩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 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mus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64 중에서>



20년 만에 등산화를 신어보다.


 수술한 왼쪽 무릎의 상태도 확인하고 몸 전반의 컨디션 점검도 해볼 겸 내일 가볍게 등산이나 해볼까! 갑자기 산이 나를 유혹하듯이 잡아 끌어당긴다. 문제는 아직 내겐 등산화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있었는데 아주 오랜 전에 없애버렸다. 그 당시에는 그래야만 했다. 산이 없는 런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산께나 타본 사람이라면, 월출산 정도의 험산에 오르려면 등산복이나 배낭은 물론이고 등산화는 반드시 신어야만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생각해보니 등산화를 신어본지는 20년도 훨씬 지나버렸다. 산의 유혹은 요했다. 저녁도 한참 지날 무렵에 쿠팡에서 등산화를 주문하게 만들었다. 설마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등산화가 이곳 산골까지 배송되어 왔다. 로켓 배송이 얼마만큼 빠르다는 걸 자랑하고 과시하는 듯하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많은 브런치 작가님들이 이미 수차례 지적했듯이, 이 편리함 뒤에는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땀방울과 희생이 숨어있는지 곱씹어볼 일이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일들이 어느 날 의미를 가지고 찾아오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산중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살던  서울 외곽의 신도시에는 유독 한 건물만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 건물은 사무실도 공장도 아닌 물류창고처럼 보였다. 저녁이면 주차장도 모자라 길거리까지 차들이 빼곡히 주차되기 시작했다. 밤샘 작업을 한 노동자들은 아침이 밝아서야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피곤한 눈을 부비며. 편리함의 이면에는 이처럼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알지만 어쩌면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삶은 그래야만 한다. 단순하게 살아도 머리가 아픈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대리기사라는 밤의 직업도 마찬가지다. 술만 마시면 아무 생각 없이 대리기사를 부르던 부장님이나 사장님이 어느 날 대리기사가 되는 세상이다. 누군가가 등을 떠밀어서가 아닌 자발적인 일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등산화가 가져다주는 쓸데없는 사색과 사랑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사유


 산중에서 등산화 하나를 가지고도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다. 생각이 많아지면 똥이 될 수도 있지만 깊은 사색을 거쳐 사유의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많지는 않지만. 똥이 될지 사유가 될지는 생각하는 사람이 섭취하는 지식과 정보와 그 둘을 소화시킬 수 있는 튼튼한 뇌의 소화력이 결정해줄 것이다. 제대로 된 된장이나 간장은 십 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법이지만 항상 그렇지도 않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장독대에도 삼신할머니나 정령이 산다고 믿었다. 그래서 장독대에 정안수를 놓고 장들의 무탈을 빌었던 것이다. 물론 자식들이 잘되라는 기원도 잊지 않으셨으리라! 그만큼 장독대는 귀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마트에 가면 널려 있는 것이 된장과 고추장 그리고 간장이자만 그 시절엔 그랬더랬다. 숙성이 될지, 상할지는 처음부터 알아볼 수도 있지만 수많은 주변 환경의 매개변수에 의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만큼이나 장의 숙성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변하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결혼식장에 가보면 알 수 있다. 별거나 이혼을 전재로 만인 앞에 당당하게 혼인 서약을 해가며 결혼식을 하지 않는 이치와 같다. 우리의 부모도 그랬고, 우리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나의 아이도 그럴 것이다. 사랑 때문에 삶의 활력을 찾고 사랑 때문에 좌절과 절망을 느낄 것이다. 사랑은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뭐가 그래야만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혼인 서약대로라면 사랑은 장처럼 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말아야 하고, 식지도 말아야 한다. 더군다나 별거나 이혼 따위는 생각해서도, 생각할 수도 없는 산 넘고 바다 건너 남의 일일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 식는 것은 차처하고라도 설사 뭔가 심각하게 뒤틀리고 잘못되어도 자녀들을 위해, 가정을 위해 나 자신 정도는 기꺼이 포기하고 희생하도록 사회는 강요하고 있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우리의 건강하고 진솔하며 보편적인 삶인 것이다.     


 오빠 그것 보라구! 내 말 안 듣더니! 싼 게 비지떡이라니깐.



 새벽은 아니지만 아침 일찍 배송된, 사만 원이 채 안 되는 등산화는 디자인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가벼워서 좋았다.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마무리였다.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어렵다. 등산화 끈 끝 부분의 기다랗고 동그란 플라스틱이 빠져나가서 올이 풀리고 있었다. 그냥 신으려다 사진을 찍어서 보냈더니 며칠 후 제대로 된 끈을 보내주었다. 이왕이면 이참에 좋은 걸로 하나 장만하라던 여동생의 말이 떠올랐지만 내가 얼마나 자주 등산을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왼쪽 무릎은 수술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허리 디스크도 여전히 손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평생 손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허리에 칼을 대면 안된다는 말은 이제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의 최저가 등산화의 끈을 매고 산에 올랐다. 등산화 하나의 선택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동생의 말이 옳긴 하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역시 그래야만 했다.

     

 사람 욕심이란 참 묘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해하는 산이 바로 월출산이라고 한다. 하지만 올라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쫄았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정상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중간에 내려오리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올라갔기 때문이다. 중간 지점인 바람폭포나 구름다리까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올 심산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자칫 무리하다가 3개월 전에 수술한 왼쪽 무릎이나 어쩌면 언젠가는 칼을 대고야 말지도 모르는 허리디스크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리던 탐방로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녔지만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잔머리를 굴려서 완만하고 코스가 짧은 바람폭포 방향으로 올라갔다. 적절한 곳에 이정표들이 정상까지 안내를 성실하게 잘하고 있었다. 자신이 없으면 오던 길로 하산하라는 경고처럼 보였지만 사람 욕심이란 참 묘한 것이었다. 정상은 코 앞에 보이는데, 거리도 2킬로미터가 채 안되는데, 계획대로 하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없던 자존심이 상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산에는 마주치는 등산객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국립공원 전체를 한나절 전세를 낸 나 홀로 황제 등반이었다. 더욱더 욕심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워낙 험한 산이라 중간중간에 철재 계단이 많았다. 그 계단을 오르는 일조차 버거웠다. 왼쪽 허벅지의 근육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걸을 때 좌우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오른발에 하중이 실리면서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다. 육체는 잠시만 사용하지 않아도 현상 유지는 고사하고 퇴화하고 만다는 사실도 이번 수술을 통해 깨달았다.     



정상과 불행의 유혹! 그것을 떨쳐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월출산 바람 폭포를 지나 5형제봉에 이르렀을 때는 드디어 파노라마처럼 전망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제라도 하산해서 왼쪽 무릎과 허리를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산에서의 욕심은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산은 헬기도 접근하기 쉽지 않은 암벽들로 이루어진 산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이정표를 본다. 이정표에는 천황봉 정상까지 거리가 1킬로미터가 채 남지 않았다고 유혹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올라가 보자. 정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아무런 등산장비나 물도 없이 오직 등산화 하나만 의지한 채 걷고 또 걸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자주 멈춘 것을 빼고는 앉아서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감격은 미미하거나 거의 없었다. 최소, 그동안 억눌린 자아와 진중하게 가라앉은 억울함과 분노들이 활화산처럼 분출할 줄 알았다. 최근 3년 동안 한꺼번에 들이닥친 거대한 불행들로 인한 고통들이 마그마처럼 뿜어져 올라올 줄 알았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천황봉 정상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태고적부터 그랬으리라! 정작 힘들고, 분노하고, 좌절하던 나는 세상에 티끌만 한 영향력이나 존재감도 주지 못한 채 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세상만 원망했을 뿐이다. 허탈했다. 멀리 목포와 지리산이 보일 정도로 멋진 전망이었지만 오직 내려갈 일만이 걱정이었다. 삶의 오르막처럼 산의 오르막은 닮아있었다. 그래서 내리막만이라도 나의 의지로 선택하고 싶었다. 몸 상태와는 달리 가장 험하다는 구름다리 코스를 선택하였다. 올라온 길을 그대로 내려가면 좋으련만!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이놈의 특이한 성격이 문제였다. 같은 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험하다는 구름다리 코스를 택하였고 이내 후회하였지만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그대로 내려오는 것이다. 말이 하산이지,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군대의 유격훈련장을 방불케 하였다. 거의 손이 발이 되어 기다시피 해서 구름다리까지 내려왔다. 지난주 어떤 남자가 5만 원짜리 지폐를 접어서 등산화에 넣고 뛰어내린 그 아픔과 슬픔의 현장이었다. 중간 지점에서 다리 난간을 봍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현기증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몰려온다. 천 길 낭떠러지 밑에도 역시 바위들뿐이었다. 바위틈 사이로는 철 지난 진달래꽃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진달래꽃들은 보아서는 안 될 그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달래꽃들은 축 처져서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남자가 떨어지는 장면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과연 그 위로 안에는 어떠한 의미와 가치가 숨어있는 것일까? 나 자신조차 위로해 주지 못하는 못난 인간이 너무 오지랖만 넓은 건 아닐까! 슬픔이 밀려오기 전에 구름다리를 지나야만 했다. 구름다리 입구에는 벌렁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벌렁 누워서 쉰다는 것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소멸에 제법 진지한 슬픔이 밀려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내 육체가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름다리를 지나자 등산객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다들 땀범벅이다. 아무리 보아도 나처럼 등산화 하나만 달랑 신고 면바지에 티셔츠 차람의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완전무장을 한 채로 이 험산과 한판 겨루어 보려는 듯 씩씩대며 올라오다가 나를 보면서 허탈해하며 웃는다.       


어머! 참 간편한 차림이시네요. 근데 정상이 멀었나요? 얼마나 더 험한가요?    


 등반은 이제부터이고 정상 또한 멀었다는 답변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올라갈 만하다고,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올라가면 금방 아름답고 멋진 정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아무 장비도 없는 것을 묻는 이도 있었다. 어쩌다가 계획에도 없는 정상까지 왔다가 죽을힘을 다해 내려가는 중이라고 해야 하는데......, 나는 또 농담 반 진담 반의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놈의 주체할 수 없는 허영끼를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힘들어하는 등반객들에게 순간이지만 작은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었다. 금방 탄로 날 위로이긴 하지만 그래야만 했다. 여섯 번의 우연이 겹쳐서 토마시가 사비나를 만나 연인이 되었던 일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그래야만 한다."와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그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들을 발견해 내고 있다. 오늘이라는 시간들의 빈 공간을 채워가는 나만의 삶의 방식이다. 어처구니 없지만, 한국에서 나의 등산 인생 다시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허영은 힘들게 올라오는 등반객들에게 다음에도 같은 답변을 하고 말 것이다. 
"아침에 운동삼아 천황봉 정상에 잠깐 다녀오는 중이라고."
"잠깐 산책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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