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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n 10. 2020

영국소녀들은 고양이 대신 아이를 키운다!

제16화. 너에겐 수줍어할 권리가 없다!

                                                                


 집에서 수줍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속옷 차림으로, 때로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 때로는 심지어 여름에는 심지어 알몸으로 집안을 돌아다녔다. 계부는 알몸으로 어슬렁거리진 않았지만 테레자가 목욕하는 순간을 노려 욕실로 들어오곤 했다. 어느 날 욕실을 잠그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신경질을 냈다.     
 네까짓 게 뭐라고? 네가 얼마나 예쁘다고? 아버지가 널 잡아먹는다디?(딸에 대한 어머니의 증오는 남편이 야기한 질투심보다 강했다. 딸의 죄는 무한하여 남편의 바람기조차 능가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딸이 해방을 원하고 감히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문을 잠그고 목욕하는 것-테레자에 대한 남편의 은근한 성적 집적거림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중략)---
 그녀가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 욕실의 문을 잠그는 것은 금지였다. 그 점에 대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를 바 없다. 너에겐 수줍어할 권리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감출 이유가 없다. 어머니의 세계에서 모든 육체는 같은 것이며 줄줄이 발을 맞춰 행진하는 형상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테레자에게 있어서 나체는 집단 수용소에서 강요하는 획일성의 상징이었다. 모욕의 상징이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공포는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뇌에 잔존하다 소멸해 간다. 만약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 망각의 기능을 부여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우리의 뇌는 온갖 기억으로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 기억들 중에서도 나쁜 기억들은 특히 그러하다. 그 나쁜 기억들은 모욕과 상처 등으로 이루어진 공포다. 이 공포는 “트라우마” 형태로 우리의 뇌에서 똬리를 틀고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힌다. 어쩌면 죽기 전날 아침까지도.   
   

 누구나 공포 하나쯤은 마음에 데리고 살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나에게 가장 큰 "공포"는 어머니의 부재였다.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던 날 어머니는 보따리라고 하는 짐을 싸셨다. 지금으로 치면 기내용 캐리어 정도의 짐이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다는 의미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테레자에게 공포는 욕실의 문을 잠그지 못하고 목욕하는 일이었다. 호시탐탐 그녀가 목욕하기만을 노리고 있는 계부 몰래 목욕을 해야 하는 불안감은 여자 아이에게는 가장 큰 공포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참 민감한 사춘기 정도의 여자 아이가 목욕 중인데 계부가 불쑥 들어와도 욕실 문을 잠글 수가 없다. 그녀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규정된 획일성의 공포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토마시에게 집착을 했는지도 모른다. 토마시에게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꿈에 나타나서 그 공포를 토마시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자신의 육체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획일화되고 공유될 수 있는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내려고 토마시와 함께 산 것이다. 하지만 토마시 또한 자신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슬픔 그 자체였을 것이다. 토마시는 다른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그 여자들의 육체와 자신의 육체는 어머니 말대로 별다를 것이 없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토마시가 보여주고 있었다. 테레자는 사춘기 시절의 목욕하는 장면을 계부가 들어와서 보는데도 제지하지 않는 어머니와의 관계설정의 단계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아니, 되돌아왔다기보다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토마시의 꿈에 나타나서 그 “모욕이나 모멸감이 공포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테레자에게는 계부나 토마시보다 어머니의 “성”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더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가 집에서는 거의 알몸으로 활보할 때마다 어린 테레자는 커튼을 닫아야만 했다. 그런 어머니의 거침없는 활보는 그녀가 수줍어할 권리마저 착취하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수많은 딸들이 다시 어머니의 길을 걷는 것은 분명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영국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영국에서는 삼십 대 중반의 할머니와 오십 대 중반의 증조할머니가 흔한 일이다. 심지어 80대의 증조할머니의 어머니까지 5대가 생존해 있는 경우도 많다. 영국에서의 18세는 성인을 의미한다. 여자 아이들은 마치 성인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18세가 되기 무섭게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물론 18세 이전에도 많은 여자아이들이 임신을 한다. 심지어 아빠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일이 유독 영국에서 많은 이유는 영국의 복지 정책 탓도 있지만 기어이 어머니의 전철을 밟고야 마는 딸들의 "의지"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반대의 의지, 즉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이러한 모순은 현실이 되어가곤 한다.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를 외치던 엄마도 할머니처럼 18세에 아이를 낳았고, 그 엄마의 딸도 할머니와 엄마처럼 18세에 아이를 낳은 것이다. 18세에 아이를 낳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윤리나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도 아니다. 정부에서는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다. 줄어드는 인구를 위해 이민자를 받는 것보다는 그래도 훨씬 나은 일이기 때문이다. 드러내 놓고 장려할 수는 없지만, 앵글로 섹슨이나 케일의 후예들이 영국의 대를 이어가는 일은 무척 바람직해 보인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들어온 이후에도, 그들이 영국의 토박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들이 출산을 하면 그 환영의 의미로 영국 정부는 사회복지혜택을 총동원한다. 집은 물론이고 일을 하지 않고도 아이의 육아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제공해준다. 현실적으로도  싱글 맘이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의 아빠도 없거나 모르는 싱글 맘들은 어쩌면 가장 빠르고 안전한 직업을 찾아가는 하나의 해법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전업 육아라는 직업 말이다.

 비혼이지만 아이는 낳아서 기르고 싶은 여자의 욕망은 지극히 당연하고 본능적인 일이다. 그 욕망이 현실이 되게 할 수 있는 국가의 지원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 저서인지 영국은 실제로 인구 감소를 걱정하지 않는다. 고양이를 입양해서 키워봐야 보조금이나 혜택은 전혀 없다. 차라리 아이를 하나 낳아서 키우는 것이 인간의 지극히 본능적인 욕망도 해결하고 국가에도 애국하는 일석 이조가 아닐 수 없다.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아이가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신의 인생은 엄마처럼, 엄마의 인생은 할머니처럼 되고 만다.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10대의 부모가 그것도 아빠도 없이 또는 누가 아빠인지도 모른 채 육아를 한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런던의 거리에는 “유모차 부대”라고 불리는 어린 엄마들이 눈에 많이 띈다. 마치 큰 바비인형이 유모차를 끌고 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물론 이들 중에는 아빠를 알거나 아빠가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아빠가 있는 경우는 싱글맘이 누리는 혜택을 다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빠는 수컷의 본능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자발적 싱글맘이 되는데 걸림돌일 뿐인 것이다.     

 그녀들에게는 수줍어할 권리는 있지만 테레자처럼 수줍어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수줍음 자체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낳아서 기를 아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낳아서 기르고 30대 중반이 되면 그때 자기의 멋진 라이프를 즐기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비록 할머니란 타이틀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손녀딸을 봐주면서. 자신이 자신의 엄마와의 관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수줍음이란 애당초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필요가 없는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서 선악과만 따먹지 않았더라면. 아마존의 원시 부족처럼 옷을 입을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런던 거리에서 어린 소녀들이 밀고 다니 "유모차 부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하지만 지금도 영국의 많은 곳에서 어린 10대의 소녀들이 부풀어 오르는 배를 어루만지며 다가올 출산의 공포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그 공포를 어린 나이에 경험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일은 슬픈 일일까! 아니면 기쁜 일일까!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6:00~18: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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