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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n 24. 2020

미래의 아기야, 네 고향은 런던으로 정했어.

제2화. 삶에 충동구매가 필요할 때

                                                            

2016년, 런던외곽의 어느 브리지


 스피노자는 ”남녀 간의 사랑은 외적 원인을 통해서 얻게 된 쾌락에 불과하다. “라고 했고, 플라톤은 ”성적 쾌락이야말로 최대의 속임수“라고 말했다. 갑자기 인류 역사상 최대의 난제인 ”사랑“이라는 진부한 물건을 들먹이는 이유는 왜일까!  속물근성이 다분한 나를 비롯한 인간이라는 ”종 “의 충동구매를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충동구매란 말 그대로 구매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사는 행위를 말한다. 사전에는 ”물건을 살 필요나 의사가 없이, 물건을 구경하거나 광고를 보다가 갑자기 사고 싶어 져 사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나는 자주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은 TV를 보려고 노력한다. 시청료가 아까워서라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한국의 TV 채널을 보면 짜증이 밀려온다. 홈쇼핑을 하라는 것인지 TV를 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상업적이다 못해 타락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일장도 아니고 상설 시장이 TV 채널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채널 하나를 넘기면 반드시 홈쇼핑 채널 하나를 거쳐야만 한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 기가 막히다.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도 없어 보인다. 내가 보기엔 청와대 "국민청원" 감인데! 가끔은 리모컨에 "점프 기능"을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대기업 입장에서는 이 같은 훌륭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홈쇼핑을 즐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리 인상을 쓰거나 짜증 낼 일도 아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홈쇼핑을 즐긴다는 사실을 TV 채널이 확인시켜줄 뿐이기 때문이다. 채널을 넘기다가 자신도 모르게 채널이 고정되면서 무언가를 사는 것이 바로 충동구매다. 이러한 충동구매는 교환 반품이 가능하다. 특히,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반품 비율이 높을 것이다. 사지 않으면 손해라도 볼 것 같은 상술은 마트나 백화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놀라운 일은 이보다 더한 충동구매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사랑이다.
  

2016년, 런던 외곽의 어느 쇼핑몰 앞


사랑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충동구매가 아닐까!


 사랑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충동구매였고 여전히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그럴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한 커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랑은 0.1초도 되지 않는 ”찰나“에 승부가 난다고 한다. 오싹하다. 1초도 아니고 0.1 초라니!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랑이 이루어질 확률과 헤어질 확률 등을 뇌로 연산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이성에게 끌리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뇌는 사랑 관련 호르몬들을 내보내며 본격적인 사랑을 시작하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가장 신중해야 할 사랑이 가장 신중하지 못한 충동구매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반면, 이별이나 이혼 등은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정한다. 0.1초에 시작된 사랑을 1년 또는 수십 년을 망설이다가 반품하는 일이 그 숭고하고 잘나 빠진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결혼해서 10년쯤 살아본 사람이라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물론 교환이나 반품을 한번 도 결심하지 않고 흰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2016년 봄, 이사벨라 가든, 리치몬드 파크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전 제법(?) 많은 사랑을 해 보았지만 모두 순간적인 찰나의 결정들에 의해 연인이 될지 아닐지가 판가름 났다. 그 순간은 그리고 일정기간은 분명 사랑이었다고 느꼈는데 지나고 보면 사랑이 아니었다고 부인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해석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인연이 아니었다는 그럴싸한 논리들을 내세워 ”자기 합리화“로 포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나의 경우에는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했던 경험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결혼에 대해서는 심기가 불편하기까지 하였다. 그렇다고 ”비혼 주의자“도 아니었다. 무신론자이기는 했지만. 내가 꿈꾸는 삶은 항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가 되면 꽃이 피듯이, 때가 되면 매미가 울듯이, 때가 되면 낙엽이 지듯이, 때가 되면 술이 익듯이, 때가 되면 철새가 떠나듯이,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에게 차이고 까이고 사기꾼 소리까지 들었는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귀던 아가씨 부모님으로부터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당할 뻔한 사건도 있었다. 나는 그 아가씨에게 단 한 번도 혼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 아가씨 부모님은 남녀가 사귀면 당연히 결혼을 전제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몇 번 만나지도 못하고 우리의 사이가 깨지기가 무섭게 나는 고소를 당할 뻔했다. 아가씨 어머니가 직장에까지 찾아오셔서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 자기 딸하고 결혼하든지 아니면 콩밥을 먹든지 양자택일 하라고. 지금 생각해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해프닝이었다. 내가 얼마나 칠칠맞고 우스워 보였으면 그랬을까!

2019년 여름, 스위스 쮜리히의 사랑의 다리


 쇼펜하우어는 "사랑이란 종족보존을 위한 신의 기묘한 장난"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의 눈빛 속에는 이미 아기의 살려는 의지가 들어 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태어날 아기의 살려는 의지가 원하는 설계에 그들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아내를 보는 순간 단순히 사귀는 것을 넘어서 마음속으로 결혼을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 짧은 찰나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랑과 연애와 임신과 결혼과 퇴사와 이민까지 제법 정교해 보이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사실 일생일대의 충동구매였다. 그렇다고 그 시절의 나의 행위를 후회한다거나 옳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가오지 않은 먼 미래에 심각한 오류나 문제가 생겼다 할지라도 어쩌면, 나의 평탄치 않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간들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술만 마시면 사표쓰고 직장을 때려치운다는 허풍이 가득한 “퇴사”와 마음속에 희미한 안개처럼 걸려있던 “이민”까지 일사천리도 진행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 날들이었다. 인생에 한 번쯤은 과소비를, 그것도 충동구매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 장애 환자처럼 “내일”이나 “다음에”만을 외치다가 말았을 것이다. TV 홈쇼핑 채널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해가 간다. 돌리는 채널마다 전화통이 불나고, 사이즈와 색상이 조기 마감되고, 금방 사지 않으면 대박 찬스를 영원히 날려버릴 것처럼 불안감까지 조성하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2017년 여름, 런던의 어느 마켓 분수대

  

 태어날 미래의 아이에게만은 고향이 한국의 어느 두매 산골이라고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강남땅에 사는 교수님이 물어보시면 떳떳하게 "런던"이라고 대답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민 문제는 결혼 못지않게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지금이야 비행기 타고 놀러 다니는 일이 일상처럼 친근해졌지만 20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바둑 격언에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있다. 하긴 결혼도 그렇고 세상만사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하다 보면 되는 일이 없다. 될 일도 안 된다.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조심성은 좋지만 돌다리 두드리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일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 할 시기가 찾아온다. 그럴 때는 지르고 보는 배짱도 필요하다. 홈쇼핑에서 일단 지르고 보듯이 말이다.      


 나와 아내는 그렇게 몇 달 만에 만나서 결혼하고 한국을 떠나왔다. 결코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혜택을 아이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내 아이에게만은 가난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그렇게 시간과 공간의 장벽들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무대 자체를 확 바꾸어야만 했다. 대학시절 막걸리 마시는 자리에서 지도교수님께서 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미 “빈정”이 상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바로 아버지 직업을 물어오는 수순이 보였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질문은 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으셨다. 나는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의 직업을 “비즈니스맨”이라고  답해버렸다. 그냥 “농부”라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더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에는 “런던”이라고 대답해 버렸다. 모두가 큰소리로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결국 나는 아니지만 태어날 미래의 아이에게만은 고향이 한국의 어느 두매 산골이라고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강남땅에 사는 교수님이 물어보시면 떳떳하게 런던이라고 대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암표를 사서 입장하듯이 떠났다. 한국이 싫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한국이 싫었다면 많은 나라들을 두고 다시 한국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이의 고향은 런던이 되었고 영어가 모국어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어는 제2외국어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겨우 알아만 듣는 수준이다. 이민 초기 먹고살기도 바빴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이야기도 곧 풀어놓겠지만 아무리 자식이라도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아이다. 우리 아이 또한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많이 따지는 아이니까 아이의 허락을 받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해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재는 20년 전에 내가 생각하던 미래였다.


 배가 생각하는 방향대로만 나아가지는 않지만 목적지는 중요하다. 결국 미래는 현재 나의 생각의 선상에서 이어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 런던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무대는 바뀌고 있었다. 런던까지는 12시간 반이 걸렸다. 임산부 아내에게는 쉽지 않은 조마조마한 비행이었다. 마침내 비행기는 런던 히스로 공항에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내렸다. 비행기 창 밖으론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가 사정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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