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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n 22. 2020

교수님 아버지는 얼마나 잘나셨는데요?

제1화. 영국 이민! 평범함이 싫어서..

                                                              

 내게 “평범함 “의 반대말은 ”비범함 “이었다. 그래서 반 고흐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결코 평범하지 못했던 고흐의 삶 전체를 들여다볼 때마다 전율을 느꼈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화가였고 예술가였고 인간이었다. 여기서 위대하다는 말의 의미는 내가 정한 범주 내에서의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위대함이다. 그 위대함에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지난하고 고된 일생이 담겨야만 했다. 고흐에게는 그림에 대한 열정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사실 고흐는 화가로서도 대단했지만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성찰은 어느 철학자 못지않았다.   


   

2020년 5월, 제주도 빛의 벙커에서 촬영한 감자 먹는 사람들


 그에게서 엿보이는 인간미는 그의 저서 ”영혼의 편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화가였지만 어느 화가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 사색과 영감과 열정은 그의 창작 의지를 부추겼고 프로방스의 아를이라는 도시에서 화가 공동체 마을을 꿈꾸기도 하였다. 비록 친구인 폴 고갱과의 갈등으로 3개월 만에  무산되고 말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뛰어난 화가가 아니었다. 타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평범한 일상을 채워나가다 끝내는 비범함으로 만드는 끈기와 노력이었다. 38년이라는 길지 않은 일생동안 포기하지 않는 집념은 죽음 앞에서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만 팔렸지만 그의 글들은 어느 작가의 글들보다 나의 심금을 울렸다. 편지의 대부분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자신의 그림이 팔리지 않는지를 고민하는 내용들과 가난이 주는 불안과 공포가 대부분이었다.

 그 불안과 공포에는 그의 인간미가 처절하고 안타깝게 묻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인간의 심오한 고뇌는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즉 누군가에게 "경제문제"를 의지할 수밖에 없을 때의 불안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주인공 김약국의 아내 한실 댁이 큰딸 용숙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그 장면에도 불안과 공포가 숨어있었다. 통영에서 지주의 몰락은 끝내 근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로까지 귀결되고 있었다.    


 "길을 보고 뫼를 못 간다고 내가 여기에 온 것은......, " 한실 댁은 말을 하다 말고 급히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어, 어장이 들어서 흠싹 망했다, 망했어. 게기는 안 나오고, 마, 막아놓은 어장 뜯어 치울 수는 없고 사방에 빚이니 손톱 찍어볼 곳이 없구나. 그, 그래서 니, 니한테 왔다. 남 놓는 이자로 오백 원만, 오, 오백 원만......, (중략) 니한테 이런 구박 들어도 싸지 싸아. 내사 이 문전에 발 딜여놓은 게 잘못이었다. 가자 용옥아." 대문 밖에 나서자 딸도 울고 어머니도 운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니체가 말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 바로 영혼의 화가 반 고흐였던 것이다. 그는 결코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짧은 생의 마지막 해에 정신착란증과 발작이 자주 오고 귀도 잘랐지만 그의 영혼만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못해 고귀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그랬다. 그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비범한 화가였다. 그래서 나는 고흐라는 사나이를 평생 나의 친구이자 스승으로 삼고 있다. 철학계의 이단아이자 독설가이며 잘난 채의 끝판왕 니체와 함께.   


 나는 어려서부터 평범함 그 자체였다. 차도 들어오지 못하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야 채 1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나왔다. 그곳이 지금도 아버지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이다. 당시에는 마을에 직행 버스 승하차장이 있었고 그 바로 옆에 우리 집이 있었다. 정확히 집이라기보다는 떡 방앗간이었다. 나의 형제들은 오랜만에 모이면 그 시절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때 아버지가 조금만 더 안목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앞집이나 옆집처럼 전주나 서울 변두리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지었더라면. 어차피 아버지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농사일뿐이었으니까. 할머니도 그렇게 하길 원하셨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래서 많은 전답을 팔아서 직행버스가 정차하는 네거리에 있는 떡 방앗간을 인수하신 것이다. 당시에 떡 방앗간은 상당한 호황을 누렸다. 특히, 설이나 추석 명절이면 며칠씩 날밤을 세다시피 바빴다. 그래서 아버지의 예상이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나면서 떡보다는 빵을 선호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시골의 인구 유출이 심각해질 정도로 심화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30분에 한 대 다니던 직행버스는 지금은 하루에 두 번만 다닌다.     


2020년 4월 선정릉의 어느 주점에서의 막걸리


 난 어려서부터 협의나 타협에서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우물은 깊을지는 모르지만 아주 좁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대학생 신입생 때였다. 지도 교수님과 과 동기들 몇 명이서 막걸리를 마시는데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아버지 직업이 뭐냐고! 난 그냥 ”비즈니스맨“이라고 둘러대고 말았다. 농사도 지었지만 어찌 되었든 떡 방앗간이라는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남들의 소를 사고파는 중간상인 역할도 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데도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차라리 ”농부”라고 했으면 좀 덜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땐 왜 그렇게 부모님이 시골에서 농사짓는다는 사실이 싫었는지 모른다. 농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었다. 왜냐하면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는 의사나 교수 그리고 큰 사업체를 실제로 운영하는 사업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기는 하지만. 코딱지 만한 시골 마을의 떡 방앗간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는 쏙 빼고 "비즈니스맨"이라고 할 때 나는 아버지의 평범함이 너무 싫었다. 비록 아버지는 평범한 분이셨지만 나만큼은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외국 생활을 동경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언젠가는 이 작은 한반도, 그것도 반쪽짜리의 나라에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 막걸리를 마시면서부터였다. 그날 나는 얼마나 많은 막걸리를 마셨는지 혀가 꼬부라져서 교수님에게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마치 대들듯이. “교수님 아버지는 얼마나 잘나셨는데요?” 그날 이후 나의 대학생활은 먹구름이 밀려왔고 거의 10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1학년을 마치자마자 군에 갔고 3년을 채우고 나와서 곧바로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1년간의 휴학 규정을 어기고 반년을 더 배낭을 짊어지고 유럽을 떠돌았다. 역이나 교회 앞에서 노숙을 하면서도 나는 그날 막걸리 자리를 떠올리곤 하였다. 복학을 해서도 전공과목은 필수만 듣고 대부분 다른 과의 과목들을 얼씬거렸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다. 안정되고 연봉도 괜찮은 직장이었지만 그 조직에 속한 나는 일개미나 다름없었다. 대학생 때처럼 여전히 하숙집을 오갈 뿐이었다. 아주 가끔은 내가 대단하다고 느끼기도 하였다. 교육과 세미나를 담당하던 부서였기 때문에 나는 외근을 자주 했다. 대사관이 몰려있는 한남동으로 자주 갔다. 당시에는 한남동에 대사관이 많았다. 한 번은 대통령이 중남미를 방문한다고 중남미의 경제개발계획과 투자유치 등을 위해 미리 사전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대사나 공사를 만나 우리 건설기업이 참여해서 수주할 수 있는 프로젝트 설명회를 추진하기도 했다. 대사를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테이블 중앙에 해당 국가의 국기와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우리 부서에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은 내가 유일했다. 그래서 그런 미팅에는 무조건 나를 보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하면서 퇴근할 때는 비범한 나를 발견했다. 아! 내가 다른 나라의 대사와 미팅을 하고 협상을 하다니! 이런 모습을 교수님께 보여주어야 하는 건데. 나는 결코 평범한 시골 촌뜨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였다. 숙대 앞 하숙집에 도착하면 나를 맞아주는 건 하얀 하숙집 강아지뿐이었다. 주인 할머니도 “저녁 묵으라! “라는 말이 전부였다. 나의 방은 옥탑 방은 아니었지만 가장 높고 끄트머리 쪽의 작은 골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청파동 일대가 지대가 높은데 마치 달동네의 옥탑 방에 사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내 집도 아니고 하숙집에서. 역시나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2020년 5월, 안개 낀 제주도 한라산 영실 근처 도로


 어떡하면 이 평범함에서 벋어 날 수 있을까! 매일 퇴근할 때마다 달동네 같은 하숙집이 싫었다. 숙대 앞에 하숙집을 잡은 이유는 오가며 여대생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운이 좋으면 숙대생과 연애라도 한번 할 수 있는 확률이 있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에 마주치는 여자들은 여대생이 아닌 무서운 여중생이었다. 그때도 입에 18을 달고 껌을 찍찍 씹는 여중생들이 많았다. 교복 치마는 최대한 짧게 상의는 단추가 터질 정도로 최대한 달라붙는 패션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결국 여중생들이 무서워서 숙대를 떠나야만 했다.     
    

 그때부터 민달팽이처럼 옮겨 다녀야만 했다. 어떻게든 플랜을 세워 집을 장만해야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딱 7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어디로든지 떠날 계획이었다. 떠나는 일만이 답이었다. 평범한 내가 혹시라도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팽배하였다. 그렇게 참고 견딘 세월이 7년이었다. 평범함에서 탈출하려면 나는 과연 어디로, 어떻게, 누구랑 떠나야 할지는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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