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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n 21. 2020

런던에서 나를 구원해준 두 여인의 음식!

아내표 꼬리곰탕과 어머니표 가마솥 소 내장 도마 고기


월출산 국립공원 내의 펜션에 있는 해피트리,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


 이민 초기의 삶은 반려식물들을 갑자기 야외라는 “야생”으로 내놓는 일과 비슷하였다.


  한 달 전이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펜션의 식당과 주방에 살던 대형 화분들을 밖에 내놓았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비도 맞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만끽하라는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그리고 1주일가량을 밖에 두었다. 5월 중순의 태양은 제법 이글거렸고 식물들은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온실 속의 화초였던 것이다. 해피트리는 가지가 부러졌고 잎은 찢겨 나갔다. 다른 나무들도 힘겨워했다. 너무 많은 빗물은 과음을, 너무 많은 바람은 멀미를, 너무 강한 햇빛은 사우나 이상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마치 영국 이민 초기의 나의 삶이 그러하였듯이.     


 이민 초기의 삶은 반려식물들을 갑자기 야외라는 “야생”으로 내놓는 일과 비슷하였다. 낯선 땅의 언어와 문화라는 비바람과 직사광선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육체가 마음에게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정말 힘이 들었다. 군 시절에는 소대나 중대라는 집단속에서 힘듦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누구나 견뎌낸다. 나중에는 그걸 즐기게 된다. 계급이 올라갈수록 보상이 주어지고 훗날은 한껏 부풀려진 무용담이 된다. 하지만 나에게 이민은 철저하게 고립된 무인도였다. 무인도에서는 오직 생존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즐긴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하였다. 어렸다거나, 조급하다거나, 경험이 전혀 없다거나, 너무 쉽게 내린 결정이었다거나 따위의 변명까지도 사치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우주를 가득 매우고도 남을 사랑  


 시작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하기만 한 미래가 힘들고, 당장 극복해내지 않으면 주저 앉아버릴지도 모를 현재가 힘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재들이 모여서 “실패자”란 오명을 만들어내는 초초한 과거 또한 슬프다. 이러한 힘듦을 견뎌내는 일은 아주 소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당시의 너무도 머나먼 미래였던 “지금” 돌이켜보니, 그것은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이었다. 거기에는 “우주를 가득 매우고도 남을 사랑”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것은 가족 간의 충만한 사랑이었다. 아내도 어머니도 나에게 과분한 사랑을 주었던 것이다.  


 “여보 고마워!”와 “어머니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아내는 두 가지 과분한 사랑을 주었다. 첫째는 새벽밥을 해서 싸준 도시락이다. 둘째는 꼬리곰탕이다. 어머니는 아내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사랑을 주셨다. 그래서 한 가지 만을 이야기하기는 곤란하지만 가장 특별했던 어머니의 음식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는다. 한 겨울 저녁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에는 아주 가끔 소고기를 실컷 먹었다. 당시 아버지는 소를 사고파는 일을 떡 방앗간과 겸하셨다. 아버지가 사 오신 소 내장들을 커다란 무쇠 가마솥에 푹 삶은 “가마솥 소 내장 도마 고기”를 안방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었다. 모두 추억의 음식이 되었지만 이제라도 법적으로 남이 된 아내와, 법적으로 “사망” 이란 단어로 가족관계 등록부에 기록된 어머니를 추억하고 싶었다. "표현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흔하디 흔한 유행가 가사처럼 나는 표현할 줄 모르는 "바보"였다. 이제라도, 그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그 말들이 하고 싶어서였다. “여보 고마워!”와 “어머니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소소하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은 사랑을 가득 담은 두 여인의 음식이 죽을 만큼이나 아득하던 힘듦을 견뎌내게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런던 시내의 플랏이나 아파트들은 4~5층 이상이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없다. 학생들은 몇 명이 모여 살았고 이사도 같이 하였다. 고객의 대부분이 여학생이었고 이민 가방이나 박스들은 여학생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계단에서는 손수레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이사를 혼자서 몇 번 하고 나면 파김치가 되고 만다.
     

“아내표” 꼬리곰탕

 

 내가 이삿짐 일로 지치고 힘들어할 때마다 아내는 소꼬리를 사다가 꼬리곰탕을 끓였다. 당시만 해도 런던에서 소꼬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은 거의 먹지 않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비해 소꼬리 가격이 턱없이 저렴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런던에서 “아내표” 꼬리곰탕을 먹고 힘을 낼 수 있었던 이유도 이 “턱없이 저렴함”이 한몫하고 있었다.      


 당시 소꼬리는 Waitrose라는 슈퍼에서만 팔았다. 물론 지금은 한인 마트들이 생겨서 쉽게 구할 수 있다. Waitrose에서 사 온 소꼬리는 팩에 포장되어 있었다. 찜 솥으로 한통을 끓여내려면 소꼬리 3팩 정도가 필요하다. 팩에서 해방된 소꼬리는 찬물로 오랫동안 목욕을 하였다. 핏물이 진해지면 목욕물을 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로 바꾸어주었다. 그렇게 한나절 정도 목욕을 시켜주어야 비로소 가스 불에 올려질 수 있었다.    
  

 가스불은 처음 펄펄 끓을 때까지는 센 불로 끓였다. 그러면 탁한 끓는 물 위로 덩어리 진 핏물과 굵은 기름덩어리들이 올라온다. 그때 물 전체를 버리고 다시 끓이기 시작한다. 다시 센 불로 펄펄 끓을 때까지 한 소금 끓여낸다. 어느 정도 끓었다고 생각될 때부터는 중불로 불을 낮춘다. 생각날 때마다 소고기 특유의 하얀 기름덩어리들을 국자로 걷어낸다. 약한 불로 하루 종일 끓이면서 떠오르는 기름을 걷어내는 일에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부엌의 가마솥에서 기름을 걷어내며 삶아내던 “소 내장 도마 고기”도 정성이 필요한 음식이었다. 가마솥의 육중한 뚜껑을 열 때마다 열기를 잔뜩 먹은 하얀 김이 어머니를 공격하곤 하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즐거워 보이셨다.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 소고기 내장이 가마솥에 그득하였다.     
 

 그렇게 몇 시간 정도 끓인 다음은 약한 불로 뭉근하게 끓이기 시작한다. 내가 직접 끓여본 적은 없었다. 단지 그 과정을 옆에서 자주 지켜보다 보니 한국에서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사 먹던 꼬리곰탕이나 설렁탕이 새로워졌을 뿐이다. 아무리 “음식은 정성”이라지만, 한나절이나 하루 종일 아기 돌보듯 끊임없는 관심을 쏟아야만 가능한 음식을 먹는다는 일은, 위로가 필요하던 나에게는 구세주 못지않았다.      


 그렇게 한나절 이상 끓여내면 3일 정도를 먹을 수 있었다. 국물은  재차 끓일수록 진해져 갔다. 김치나 된장 같은 한국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던 아이는 이 꼬리곰탕만은 잘 먹었다. 영국 음식에도 끓여서 만든 스튜나 수프가 있지만 영국 사람들은 스테이크나 피시 앤 칩스 같은 간편한 요리를 선호한다. 통닭도 끌여서 만든 백숙이 아닌 오븐에 넣어서 전기구이 통닭처럼 구워 먹는다. 우리가 감자를 삶아 먹지만 영국 사람들은 튀겨서 먹는다. 물론 삶아서 으깬 매시 포테이토가 있긴 하지만.      


 그런 단순하고 간단한 영국 음식에 익숙한 아이가 엄마가 오랫동안 끓여낸 꼬리곰탕은 맛있게 먹었다. 그것도 쫑쫑 잘게 썬 파를 듬뿍 넣고 소금과 후추로 알아서 간을 조절해가며 먹었다. 꼬리뼈에 붙어있는 고기를 먼저 때어먹고 국물은 국그릇째 마셨다. 처음 손으로 꼬리뼈를 뜯던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말은 안 했지만 이렇게 미끈거리는 삶은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지?라는 표정이었다. 하는 수없이 먹기 좋게 꼬리뼈에서 고기를 발라 아이의 국그릇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은 이건 무슨 맛이지? 하며 한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쯤만 겨우 먹었던 아이는 계절이 바뀌면서 차츰 그릇을 비우더니 고기도 자기가 직접 들고 발라먹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아내가 끓여준 꼬리곰탕은 우리 집의 특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부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는 나와 아이가 다 먹어갈 즈음에 어머니처럼 한 그릇 더 먹으라고 권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와 아이는 No! No! 를 외치며 거실로 도망갔다. 커다란 국그릇에 있는 국물만으로도 이미 배가 빵빵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2~3일을 먹고 나면 도망쳤던 기력이 돌아오면서 종아리와 허벅지 그리고 팔뚝까지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근육들이 위로받을 때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충만해졌다.       


영어에 20년을 투자했지만 나의 영어실력은 영국에서 꼴찌였다. 6,788만 등에도 들지 못하는 영어실력!


 이민 초기의 삶은 고되고 힘들었다. 맨손으로 이민을 떠날 때의 배짱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안정되지 못한 삶 자체가 주는 불안 또한 양쪽 어깨를 짓눌렀다. 그동안 세상을 너무 안일하고 대책 없이 살아왔다는 자책이 심하게 들곤 하였다. 그 자책 너머로는 한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한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힐난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니캡과 이삿짐센터일은 힘들었다. 서울의 냉난방이 과도할 정도로 완벽한 사무실에서 빈둥거리던 직장인의 삶은 아늑한 온실이었고 천국이었다. 물론 그때도 정신적으로는 고통스러웠다. 매일 오전에는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그래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7년이나 버텨냈다며 스스로 대견해하였다. 결혼에 대한 아무 준비도 대책도 없이 날들은 그럭저럭 흘러갔다. 그나마 화이트 컬러가 주는 알량한 자존감만은 살아있었다.      


 이민 초기에는 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몸을 쓰는 일들만이 나의 직업이 될 수 있었다. 영어에 20년을 투자했지만 나의 영어실력은 영국에서 꼴찌였다. 6,788만 등에도 들지 못하는 영어실력! 심지어 길거리에 널려 있는 마약장이 들이나 홈리스들도 영어는 네이티브(Native)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입은 다물고 몸의 근력들을 총동원해야만 하는 것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육체적 고통보다 참을 수 없는 힘듦은 낮아지는 자존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 자신이 비루하고 참담해 보였다. 그런데도 몇 년 동안이나 그 일을 해야만 하고, 해내야만 하는 이유는 가족에 대한 “사랑” 단 하나였다. 그 사랑에는 아내의 정성스러운 도시락과 꼬리곰탕 그리고 멀리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의 격려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자주 “어머니표 가마솥 소 내장 도마 고기”가 생각났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할머니도 꽤 젊으셨을 때였으니 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 것이다.   
   

 이민 초기에는 미니캡 일만 하였다. 한국의 유학원과 제휴해 어학연수생들의 공항 픽업이 주된 업무였다. 1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작은 중고 화이트 밴을 사게 되었다. "로노"사에서 나온 트래픽이라는 1톤이 될까 말까 한 작은 밴이었다. 참고로 밴이란 박스형 트럭을 말한다. 미니캡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삿짐 일감들이 생겼다. 그래서 10년이 넘는 털털거리는 중고 미니밴을 구입해서 이삿짐센터 일을 동시에 하였다. 수입도 늘었다. 문제는 시간들이 겹칠 때였다. 밴을 히스로 공항과 런던 시내의 중간 지점인 리치먼드(Richmond)나 치스윅(Chiswick)에 두고 차를 바꿔가며 1인 2역을 해내야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수입도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면서 문제가 생겼다. 바로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아내의 독박 육아와 3개의 도시락


 토요일과 일요일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픽업을 하였다. 낮 시간 동안에는 이삿짐 일을 하고 아침저녁으로는 공항 픽업을 하였다. 가끔은 영국 내의 한국기업 주재원들을 미니캡 손님으로 모셨다(?) 그러면서 당한 갑질 이야기는 이미 브런치에 올린 적이 있다. 하루반 만에 조회수 15만 이상을 찍었다. 그때부터 아내는 도시락을 싸주기 시작한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와 하루 종일 육아전쟁을 치르던 아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런던 바닥에서 지친 육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만한 지인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 슬픈 사실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할 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이라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면 큰 대자로 뻗어버렸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은 놀라서 긴장하기 일쑤였다. 집에 오고 나서야 몸과 마음의 모든 근육들이 긴장을 푸는 바람에 아내는 밤에도 잠을 설쳐야 했다.   


  새벽부터 픽업이 있는 토요일은 도시락 세 개가 필요하였다. 아내는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하고 도시락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을 3개나 싸야 했다. 도시락은 둥근 형태였다. 구찌 무늬가 선명한 싸구려 제품이었다. 비록 짝퉁이지만 한국의 가족이 보내준 명품 도시락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행히 5단이나 되는 도시락이어서 밥 세 개와 반찬 2통이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멸치볶음, 계란말이, 소시지, 무말랭이 등이 반찬으로 상단 2개의 통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단 3개는 밥이 차지했다. 아내는 내가 배가 고플까 봐 밥을 꼭꼭 눌러 담았다. 런던 시내의 오래된 집들에서 이삿짐을 몇 번 나르고 나면 한 겨울에도 이마에 땀이 송공 송골 열렸다. 언제나 배가 고팠지만 곧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는 부픈 기대는 즐거운 일이었다. 그 희망 속에서 픽업을 하고 이삿짐을 날랐다. 한적한 공원을 찾아 도시락을 까먹는 그 재미와 맛은 모든 힘듦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어쩌면 그 시절이 힘은 들었지만 가장 행복하였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매일이 소풍이었다.   


“엄마표 가마솥 소 내장 도마 고기”


 어머니는 9년 전에 밭에서 일을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한 여름이었다. 아버지의 신속한 조치로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6개월을 보낸 뒤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다시 6개월 뒤는 퇴원을 해서 통원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가 쓰러졌어도 바로 가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한국에 오지 못하게 하셨다. 지금 네가 와봐야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중환자실에는 면회도 쉽지 않아서 와도 수용이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도 가보지 못하는 심정은 고통스러웠다.


 천만다행으로 어머니는 일어나셨지만 왼쪽 상반신 마비와 언어를 잃어버렸다. 좌뇌가 손상된 것이다. 천만 대행으로 걷고 한쪽 손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퇴원해서 집으로 가실 즈음에 나는 혼자서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을 더 뵙고 결국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고 어머니는 6년 전 7월 초에 돌아가셨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런던에서 어머니 부고를 받고도 바로 올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영국 항공이 취항하지 않아서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만 직항이었다. 안타깝게도 비행기는 저녁에 출발하였고 나는 다음날 오후에 인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전주행 리무진을 타고 3시간 반을 달려서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저녁이었다. 입관을 미루고 미루다가 오후에 결국 입관을 했다는 말은 절망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영정사진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도 한국의 시골집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길어야 이삼일밖에 같이 할 수 없는 각박한 시간들이 야속하였다. 어머니는 온갖 손짓 발짓으로 나에게 뭐가 가장 먹고 싶은지 물으시곤 하셨다. 나는 어머니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성미 급하신 어머니는 오열을 하셨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슬픈 일인지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통역을 해주셔도 정확하지 못하였다. 결국 어머니는 필담을 나누기 시작하곤 하셨다. 그러 때마다 나는 “엄마표 가마솥 소 내장 도마 고기”라고 썼다. 그러면 어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면서 아버지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알겠다고 일어서지만 내가 말렸다. 지금은 집에서 소 내장을 삶아서 먹는 사람들도 없을뿐더러 같이 먹을 식구도 뿔뿔이 흩어져 있다. 아홉 식구였던 대가족의 어른인 할머니도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결국 아버지는 삼겹살 몇 근을 사 오는 것으로 대신하곤 하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소고기를 전혀 드시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의 고향인 정읍에는 유난히 함박눈이 자주 내렸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서해바다와 내장산 그리고 남쪽 지방이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만 하곤 했다. 눈이 내리면 우시장에 가셨던 아버지는 소 내장을 아홉 식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사 오시곤 하셨다. 이유는 내장이 소고기에 비해 “턱없이 저렴"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사 오신 소 내장들을 어머니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요리하셨다. 찬 물에 담갔다가 커다란 무쇠 가마솥의 물이 팔팔 끓으면 그 내장들을 집어넣었다. 당시 부엌은 집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 가스가 없던 시절 요리는 장작이나 나무를 때야만 가능하였다. 소 내장을 삶으실 때는 참나무 장작을 사용하셨다. 나는 불 때는 일이 너무 즐거워서 가마솥의 장작불은 내 담당이었다. 그래서 참나무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는 제일 먼저 소의 간을 건져내셨다. 나는 그때부터는 부지깽이를 내던지고 안방으로 합류해서 할머니 손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삶아진 소의 간은 커다란 나무 도마 위에 올려진다.  할머니가 간을 먹기 좋게 자르기 무섭게 도마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못한다. 개인 접시나 젓가락도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오직 소금 한 종지뿐이었다. 간 다음으로 소의 위가 올려진다. 양, 벌집 양, 천엽, 막창이 그것이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천엽을 날것으로도 드셨다. 그다음에 대창, 곱창 같은 창자 종류들이 도마에 올려지면서 도마에서 없어지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렇게 우리 대가족은 가마솥에서 센 불로 푹 삶은 소 내장들을 안방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었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소주를 같이 드셨다. 어린 육 남매는 돌이라도 씹을 정도로 식성이 왕성하였다. 그 당시 시골에서 소고기는 명절 때나 구경할 수 있는 비싸고 귀한 음식이었다. 전쟁을 치루 듯 도마 위의 고기를 냉큼냉큼 집어먹던 어린 시절의 어머니는 상당히 젊고 늘씬한 여자였다. 어머니가 가장 행복해하는 모습은 바로 그때였다. 자식들이 그 귀한 소고기를, 비록 내장이라고는 하지만 배 터지도록(?)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좋아서 미소 짓던 그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정작 본인은 소고기를 먹지 않으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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