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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21. 2020

그녀가 죽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멀지 않은 미래의 나의 부고를 훔쳐보다.

 그녀가 죽었다!


 정확히 언제 어느 병원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7월의 어느 날에 죽었다고 유추해볼 뿐이다. 어쩌면 지난주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허무하고 슬픈지도 모른다. 타인도 지인도 아닌 어느 브런치 작가의 죽음에 애도해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사실 그녀의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른다.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다. 그녀와는 다만 브런치 친구였을 뿐이다. 나이도 비슷했고 이혼 경험과 영어가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녀는 나의 글에 나는 그녀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가끔 댓글로 응원해주는 정도의 관계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밤새 잠을 설칠 정도로 슬픔이 밀려왔다. 어젯밤에는 물폭탄이 쏟아지는 줄 알았다. 번개와 천둥마저도 밤새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뒤척이다 새벽을 맞았고 하늘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와 다른 듯 다르지 않은 오늘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대단한 글쟁이였다. 독자를 유혹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다이슨 청소기처럼 수많은 여성 독자를 단숨에 빨아들이는 괴력의 작가였다. 이혼의 상처와 그로 인한 고통들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치열하게 글로 써 내려가며 순식간에 구독자를 수천 명으로 끌어올린 그녀였다. 한동안 출판 준비로 글이 뜸했던 그녀는 갑자기 병원에서의 사진을 올리며 항암치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녀는 6월 26일에 “팔자가 이렇게 세도 되는 건가요”라는 글을 올렸고 그 글이 그녀의 마지막
 글이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갑작스럽게 발견된 췌장암으로 인해 항암치료를 받으며 딸과 사진을 찍어서 올린 글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짧은 머리를 하고 있던 그녀는 "이대로 죽을 순 없어요"라는 마지막 맨트를 남기고 떠나갔다. 그녀조차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그 글에서 말이다. 그녀의 삶에 대한 열정과 글쓰기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묻어났던 마지막 글을 읽고 또 읽어보았다. 읽을수록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한 인간이 소멸할 때마다 그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우주도 함께 소멸해간다. 그래서 죽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한 달 전의 마지막 글 이후로 그녀를 잊고 지냈다. 그녀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글을 올리지 못한다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직전 브런치에 올라온 어느 작가의 글에 그녀의 죽음과 애도가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허무했고 망연자실했다.


 모두가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죽음!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조차도 금기시되는 단어가 바로 죽음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죽음을 미리부터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일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굳이 죽음을 글에서까지 부각하지 않으려 신경을 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도 매일 죽음과 마주하며 살고 있다. 다만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다. 죽을병에 걸려보니 죽음은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매일 책을 읽고 매일 글을 쓴다. 오래된 어느 유행가 가사의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이다. 글쓰기와 독서는 나의 모든 시련과 고난과 역경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내일 오후가 나의 마지막 날이라도 나는 내일 오전까지 자판을 두드릴 것이다. 그래서 의연하게 나의 소멸과 악수할 것이다. 다만, 소멸 이전에 멋진 작품 하나쯤 남기고픈 욕심이 사치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발성 말초신경병증이라는 희귀 난치성 환자가 되다.

 이번 봄은 몹시 낯설고 어색했다. 그 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서울대병원에서 “다발성 말초신경병증“이라는 희귀 난치성 병명을 진단받았다. 원인도 치료 방법도 없는 병이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은 자주 흔들렸다. 아니 그 진단을 받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이 흔들려서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에게 편리한 방법으로 생각과 행동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수많은 환자들을 보는 주치의 선생님은 나에게 애써 희망을 주려 시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절망을 던져주지도 않았다. 확실한 것은 병명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 뿐이었다. 언제 어떻게 병이 악화되고 언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병은 A4지에 진단서라는 이름으로 질병코드 G62.9와 함께 발부되었다. 믿기지 않아서, 승복할 수 없어서 내가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들은 시종일관 웅얼거릴 뿐 귀에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거릴 뿐이었다. 어느 정도는 이미 결과가 나와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나의 질병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진료 접수를 했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자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지난 6개월 동안 각종 암 검사, 혈액검사, 수차례의 뇌와 흉부 MRI와 CT촬영, 근전도 및 자율신경 검사 등을 받아왔다. 서울대 병원으로 오기 전에 삼성서울병원과 고대 안암병원에서 같은 검사를 했지만 병명조차 알지 못했다. 두 대형 병원에서도 모른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 환자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반복되는 검사 과정에서 매번 혹시나 하는 희망과 역시나 하는 절망 사이에서의 감정들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다만 죽을 듯한 통증의 증세만 있을 뿐이었다.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전기 고문과 흡사한 고통 때문에 샤워도 힘들다. 샤워기의 물줄기들이 비수처럼 나의 피부를 찔러대는 느낌에 매일 절망한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해댄다. 그 고통을 외면하려 하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이긴 하지만 컨디션이 좋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샤워기의 물줄기가 바늘이 아닌 그냥 따듯한 물줄기로 느껴지는 날이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지는 그런 순간을 부여잡기 위해서 매일 고통과 맞서는지도 모른다.      


 2020년 5월 26일, 그러니까 그녀의 글이 브런치에 마지막으로 올라오기 한 달 전이었다. 05:56분 목포 발 서울행 KTX에 올랐다. 정확히 2시간 만에 서울역에 도착한 기차는 손님들을 토해내고 있었고 출근시간과 맞물린 서울역은 분주했다. 뛰다시피 어딘가로 달려가는 사람들 속에 방향을 상실하고 서 있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그날 오전 10시 반경에 사형선고와 같은 판결을 받을지도 모르는 그 낯선 남자! 나는 그 낯선 남자를 불렀다. 그 낯선 남자와 지하철 4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환승하기 위해 오고 갔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떤 질병들과 친구로 지내고 있을까. 설마 모두가 건강한 사람들일까. 나만 질병 앞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일까.

 4호선으로 환승해서 혜화역에 내릴 때까지도 나의 무의식은 나의 의식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만 불행한 거야. 나만 이렇게 죽음과 마주하는 병에 걸린 것이라고. 세상은 늘 그랬었잖아. 어떻게 이 세상은 질병마저도 불공평한 것일까. 불행이 지나면 한 번쯤은 행복이라는 녀석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야속한 세상과 나는 언제까지 마주할 수 있을까. 삶도 죽음도 의미를 상실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이다지도 큰 욕심일까.      


 지하철은 기차와 마찬가지로 혜화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서울대병원 출구로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많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향하고 있다니. 그중 누가 환자고 누가 의사나 간호사 또는 직원일까. 나를 진료할 주치의 선생님도 이 행렬에 끼어 있는 것은 아닐까. 설마 아니겠지. 그분의 명성과 지위로 보아 그분은 이러한 대중교통에게 아침저녁으로 토해냄을 당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서울대병원에 가려면 약간의 비탈을 넘어야 한다. 본관 정문에 도착하자 발열체크와 손 소독을 하고 지하 1층에 있는 뇌신경센터로 향한다. 이미 익숙해져서 두려움이 사라진 장소였다. 에스칼레이터는 몇 초 만에 나라는 낯선 남자를 지하 1층의 뇌신경센터로 운반해주었다. 접수를 마치고 신경과 앞에서 기다리려 하는데 앉을자리가 없다. 수많은 환자들이 이미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서울대병원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나처럼 심각한 질병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지간한 병원에서는 치료가 어려운 병을 가진 환자들! 방금 전 서울역에서 느꼈던 나만 왜 이런 병에 결렸을까!라는 생각이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나도 병에 걸렸구나! 나는 이 많은 환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야. 

 이 많은 사람들 중 일부는 오래 살아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질병에 굴복하고 말겠지.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잠시 후면 나의 최종 진단이 내려질 텐데. 나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몇 달 후에 혹은 몇 년 후에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슬프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의 무의식은 전신의 통증처럼 집요하리만큼 의식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집요하고 의도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20여분을 서 있자 빈자리가 보였고 겨우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온통 환자들뿐이다. 가족이나 보호자와 함께 온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나만 혼자 온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온다.

 어차피 삶은 혼자일 뿐이라고!

 애써 태연해지려고 나를 달래 보지만 슬픔은 쉽사리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인간은 어차피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혼자일 뿐이라고, 글을 쓰는 일도 오로지 혼자 써 나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혼자일 뿐이라고, 언제까지 곁에 있어줄 것 같은 친구나 연인 심지어 가족도 영원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용감해져야 한다고 애써 나는 나를 다독인다. 5 진료실 앞 전광판에 내 접수번호 A3094가 마침내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예약 시간은 09:45분이었지만 내가 불려 들어간 시간은 한 시간 후인 10:45분이었다.      
  

 신경과 5 진료실은 유독 환자가 많았다. 환자들 사이에서 한국 최고의 신경과 전문의라는 성 교수님 진료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료실 안에는 간호사 두 분이 기록을 하고 있었고 성 교수님은 내 질병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찾아 엄지손가락으로 지문을 꾹 눌러서 비밀번호를 풀려 시도하고 있었다. 손이 떨려서인지 자꾸 에러가 났다. 겨우 지문이 인식되었고 휴대폰의 녹음 기능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채 5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내 인생은 재단되고 정리되고 있었다.

 슬픈 5분이었다.   
      

 “다발성 말초신경병증“이라는 희귀 난치성 병명과 교수님의 설명은 나의 휴대폰에 고스란히 녹음되었다. 마치 텅 빈 우주의 어느 행성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행성에서 외계인의 이해할 수 없는 말들에 주눅이 들어버린 남자!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라도 지속해야 하는 남자! 마스크 뒤에 가려진 성 교수님의 입모양을 보려 노력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듣는 것뿐이었다. 안경알 속에서 깜빡이는 교수님의 눈꺼풀과 좌우로 움직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이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지금으로선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이 없다는 마지막 말에 하늘이 노래지고 절망이 엄습해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런 절망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언제까지 살 수 있나요? 가 아닌 그럼 언제 죽나요?라는 당돌한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나의 유일한 질문이었다.

 교수님은 끝내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힘내라는 위로의 말과 세 달 후에 다시 보자는 말이 전부였다.  나는 일어섰고 5 진료실을 나왔다. 세 달 후에...라는 말은 오랫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수납을 하고 처방전과 진단서를 가지고 비탈을 내려오는데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환자가 보였다. 머리가 동자승처럼 반짝이는 꼬마 환자는 링거 줄을 몇 개나 달고 힘겹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소아암 병동 앞에서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그 죄책감은 목포행 KTX 안에서도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어떤 죄를 지은 것일까?   

 멀지 않은 미래! 그래서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날! 나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생각하다.

 이혼 전후에 내가 받은 스트레스는 극심하다 못해 처절했다. 그 스트레스 앞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나의 질병들이 이유도 없이 불쑥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게 모두 스트레스 관리에 실패한 대가일 뿐이다. 가슴 구석구석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스트레스를 제거하기 위해 나는 매일 읽고 매일 쓴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활자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뿐이다. 하루 식후 세 번씩, 아니 잠들기 전에 먹는 약까지 네 번씩 한 주먹씩이나 되는 약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지만 그다지 외롭지도 슬프지도 구차하지도 않다. 통증으로 인해 하루에도 수 없이 찾아오는 우울감 앞에서 절망하지만 금방 추스른다. 그 시간이면 한 줄이라도 더 읽고 더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를 다그치거나 열심히 살려고 들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럴만한 에너지나 체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한가하게 존재의 이유 따위를 두고 실존 문제로 고민하지도 않는다. 살아 있는 한 나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7월 중순이 되었다. 어젯밤 갑작스러운 그녀의 온라인 부고! 잠들지 못해 밤새 뒤척여야만 했다. 나와 함께 치열하게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던 어느 브런치 작가의 죽음! 그래서였을까! 어젯밤 이곳 남도의 산장에는 폭우와 천둥번개가 밤새 그녀를 애도하고 있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이 모든 불행이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인이 되신 “다녕” 작가님의 명복을 빌어본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마음껏 글을 쓰시길. 그동안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는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이혼의 악몽 따위는 내려놓고 행복하시길. 언젠가는 나와 우리에게도 들이닥칠 그 길을 먼저 떠나신 것뿐이리라. (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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