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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27. 2020

축구공 하나가 우릴 구원할 수 있을까?

나를 가장 나답게 해 주었던 고마운 축구 이야기


학교축구팀 3주년 기념사진, 필자는 우측 1열 다섯번째 노란색 스타킹


 저건 뭐야! 저게 지구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축구 경기인가! 지구인들은 저 작은 공 하나를 두고 왜 저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는 걸까! 공을 쫓아다니는 인간들은 그렇다 쳐도 그걸 재미있다고 경기장에서 구경하는 저 많은 인간들은 또 뭘까! 그것도 모자라서 지구별 전체에서 TV로까지. 4년마다 월드컵이랍시고 공 하나를 두고 난리를 떠는 이상한 지구인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종족들이란 말이야. 저 단순한 종족들을 정복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고. 둥근 공 하나만 던져주면 지구인들을 우리의 노예로 만들 수 있어. 레이저가 뿜뿜 나오는 광선총 따위의 무기도 필요 없다니까.         


 축구라는 경기의 복잡한 경기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계인이 축구를 본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광활한 우주! 그 우주의 어느 행성에 지구처럼은 아니어도 분명 인간과 흡사한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지구까지 오려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구인보다는 훨씬 지능이 높거나 발달된 기술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미 선보였던 수많은 우주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외계인들이 지구별의 축구경기를 어떻게 이해할지 가끔 궁금해졌다. 그만큼 축구라는 운동에 빠져들면 거기서 탈출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마약처럼 운동도 중독이 된다. 걷는 사람은 걷기에, 달리는 사람은 달리기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자전거에 중독되듯이 축구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중독자다. 니코틴의 금단현상을 견뎌낼 만큼이나 지독하게 말이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나도 선수처럼 제대로 뛰고 싶어서 담배부터 끊었다.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던 금연이 축구를 생각하니 단 한 번의 시도에 가능해졌다. 덕분에 지금도 비흡연자로 살고 있다.    

   

100회 전국체전 영국대표팀 축구경기 사진


 영국팀 감독님 잠깐만요? 감독님은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으시면 안 됩니다. 경기하는 선수들과 혼동이 될 수 있으니 형광조끼나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셔야 경기장에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감독이라뇨. 저는 감독 아닌데요. 저도 뛰는 선수라고요.(감독은 보통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맡기 때문에 기분이 몹시 나빠진 상태. 내가 나이 많은 아재이긴 하지만.)      
 정말인가요? 그럼 대한축구협회에서 발행해준 선수등록증 카드와 신분증 보여 주세요. 일반 신분증 말고 여권 보여주세요. 여권에 찍힌 영국 체류 비자도요.      


 2019년 10월 첫째 주 토요일 아침이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100회 전국체전 축구 경기가 월계동 인덕대학 뒤편의 “초안산 구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과 베트남 대표팀 간의 경기를 앞두고 벌어진 작은 실랑이는 내가 여권과 대한축구협회에서 발행한 선수 등록카드를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주심도 웃었고 나도 웃었다. 20대의 젊은 동료 선수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감독인 목사님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주심과 나의 실랑이를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20년 동안 런던의 조기축구팀에서만 뛰다가 한국에서 열리는 전국대회 규모의 참가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내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도 컸다. 준비과정도 치밀했다. 몇 달 전부터 대한축구협회에 선수 등록 절차를 하고 경기 전에는 이미 발급된 선수등록증과 여권을 대조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부정선수를 막기 위한 조치들은 나의 기대감을 더욱 부풀리고 있었다. 축구는 자기만족이 우선이지만 그 자기만족은 언제나 상대적이었다.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팀워크가 중요하다. 하지만 팀워크는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자기가 축구를 이 정도 잘한다는 과시욕은 늘 경기장 내에 보이지 않는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다. 결국은 자기만족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자기만족이 없으면 축구라는 취미는 지속할 수가 없다. 물론 다른 취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영국대표팀 선수로 전국체전 경기에 참가하였고 우리 팀은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첫 번째 경기는 전 후반 풀타임을 뛰었고 두 번째 경기는 무릎 부상으로 후반전에 교체되었다. 그 부상의 여파는 상당했다. 걷기도 힘들었지만 참고 토요일마다 축구장에 나갔다. 화요일 저녁에는 용산역 옥상인 아이파크에서 실내 축구인 “풋살”을 즐겼다. 결국 2020년이 시작되면서 부상당한 왼쪽 무릎은 수술대에 올라서 인조인간처럼 개조되어야만 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다시 축구를 즐기고 있다.    
  

 나는 20여 년 전에 영국 이민 길에 올랐다. 이민을 위해 7년 동안 잘 다니던 안정된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결혼식을 치른 후 한 달반 만이었다. 결혼식장에는 기관장님부터 직원들까지 많은 동료직원들이 참석했다. 사실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이었다. 그러기엔 결혼식장에 와서 축하해준 직원들에게 속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사직서는 한 달반이나 내 사무실 서랍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직장을 그만둘 때 내가 느꼈던 부담감은 상당했다. 직원들은 부모님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직에서 개인은 어차피 대체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도의적인 죄책감만 이겨내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퇴사 직후 결혼식을 올리는 바보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기저기 뿌린 경조사비가 얼마인데. 가장 큰 난관은 부모님을 설득하는 문제였다. 사실 본가와 처가의 부모님들을 설득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퇴사 대신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내야만 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는 입사한 지 7년이 되면 안식년을 주고 정부 돈으로 유학도 보내준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2년 후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짓말들이 필요했다. 학위과정이 쉽지 않아서 1~2년 휴직을 해서 공부를 마저 마치고 돌아가서 직장에 복귀할 것이라는 거짓말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4년이 지나자 양가 부모님은 의심하기 시작했고 런던으로 자주 연락을 취하셨다. 언제 공부 마치고 돌아오냐고! 그러다 안정된 직장에서 잘리는 것 아니냐고.    

    

 영국으로 이민을 떠난 지 5년째 되던 해에, 그러니까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에, 나와 아내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아이가 너무 보고 싶다는 부모님들의 성화에 한국 방문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사실 경제문제도 큰 부담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런던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에 도착하기 전부터 예상은 했지만 몸을 쓰는 일들은 힘들고 고단했다.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보며 자판이나 두드리다 퇴근하던, 그 흔한 영업 한번 해보지 않은, 부서에 배정된 예산을 어떻게 소모해야 하는지 따위나 고민하던, 심지어 군대에서조차도 행정병으로 근무해서 삽질 한번 해보지 않은 내가 런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사용하는 일밖에는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몸은 노동에 혹사당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의 희귀 난치성 질병들은 그때 너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주어진 훈장 인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만사형통이었던 한국의 SKY라는 학벌도 영국에서는 쓰레기만도 못했다. 한국의 SKY를 인정해주는 일은 고사하고 그런 대학을 들어 본일조차 없었다. 1년 반이라는 런던 어학연수와 방학 때마다 들락거린 마닐라 영어연수도 쓰레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어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역시 쓰레기였다. 나의 영어실력은 영국 인구 6,788만 명중 꼴찌였다. 유동인구가 많은 런던의 길거리에서 반려견과 함께 앉아 구걸하는 홈리스들도 영어 구사능력만큼은 Native였다. 혈연 지연 학연에 돈마저도 없는 나는 말 그대로 주변인이나 아웃사이더도 아닌 철저한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래도 서울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는데 노동일이 힘들 때마다 이방인의 길을 선택한 나를 원망하고 자책했다. 이사 일이 힘들어 눈물도 많이 흘렸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마지막 자존감을 잃지 않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그 무언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민생활에서 “루저”가 되어 중간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런던에서 콜택시(Minicab)와 이삿짐센터 일을 하면서도, 나중에 우리 가게가 생겨서 제대로 된 자영업을 할 때에도, 아이가 어려서 놀이방에 맡기거나 베이비시터를 활용하면서도, 토요일 아침마다 나 대신 일할 알바 직원을 한 명 더 고용해가면서 까지도, Work Permit 비자와 영주권을 기다리는 피 말리는 시간에도, 지금이 축구할 때냐고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에도,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직원들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가게에서 축구장으로 어김없이 출근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마누라가 잔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말이다. 눈이 수북하게 내린 겨울날의 아침에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날의 아침에도 축구장에 나갔다.          


 오랜 이민생활 동안 내가 이룬 성취도 놀라웠지만(물론 나의 기준에서) 내가 겪은 시련도 놀라운 것들이었다. 결국은 나의 욕심이 문제였다. 나라는 인간은 결코 현실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확장한 사업체는 브렉시트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삐걱거리면서 여러 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잠시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메시지를 통해 법을 언급하는 문자들이 날아들었다. 모로코에서 돌아오고 해가 바뀌면서 불행은 이어졌다. 10년 이상을 가꾸고 키워온 가게는 화재가 나서 모든 것이 타버렸다. 내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갔다. 주위 10여 곳이 넘는 상인들의 피해보상 요구는 가끔 협박으로 다가왔고 그때마다 나는 쪼르르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나의 변호사가 유일한 위안이자 방어막이었다. 보험사와도 1년 이상 넘게 다투다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고 잠든 날이 없었다. 새벽에도 극심한 우울로 인해 자동차를 몰고 영국의 고속도로를 질주해야만 했다. 그래서 백만 달러짜리 보험을 들기도 했다. 그 보험의 특징은 내가 죽는 순간 보험금이 지급되는 것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자살일 경우에는 보험료 지급이 거절된다는 조건이었다. 나는 매일 죽는 방법들을 고민하며 실천 가능성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목을 매어볼까. 약을 먹을까. 템스 강 다리에서 뛰어내릴까.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릴까. 가능하면 고통 없이 죽고 싶었지만 이러한 방법들로는 보험금 지금이 거절되기 때문에 극적인 사고사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래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차가 전복되어 죽는 상상을 시작했고 가끔 고속도로로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다시 돌아왔다. 죽는 일도 말처럼 쉽지 않았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어 보였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를 뚫고 들어가서 지구 반대편으로 나올 만큼이나 추락을 거듭할 뿐이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토요일 아침이었을 것이다. 불면의 밤을 보내다 드디어 결심을 했다. 집에서 브라이튼으로 향하는 M23 고속도로를 탔다. 그날은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그럴싸한 사고사로 말이다. 고속으로 주행하다 핸들을 조금만 꺾으면 된다. 핸들의 각도와 꺾을 장소까지 생각하며 질주를 시작했다. 내가 죽어야 할 이유들을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죽을 만큼 힘들까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게 동시다발적으로 닥친 불행들이 몸과 마음까지 상하게 하면서 삶의 무게중심을 무너뜨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내가 죽지 말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내와의 불화 등 각종 시련들 속에서도 내가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 돈일까? 변호사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비즈니스일까? 모두 아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문득 축구가 떠올랐다. 그랬다. 불행이 연속으로 들이닥치면서 1년 가까이 나는 축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민 초기의 더한 역경과 난관도 버티게 해 준 것이 축구였는데 사건사고들이 터지면서 축구할 마음의 여력이 없어진 것이다. 마음이 심란하면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1년 가가이 축구화를 신지 못했다. 그래! 일단 조기축구에 다시 나가보자. 다시 가쁜 숨을 내쉬면서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느껴보자고! 마침 토요일이었다. 한나절 제대로 땀을 빼보는 거야. 그래도 우울하고 살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을 거야.     

 그날 새벽 결국 고속도로에서 핸들을 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출근해서 토요일 영업 준비를 마치고 9시가 조금 넘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근 1년 만에 다시 나가보니 여전히 반가운 얼굴들이 나와 있었다. 오랫동안 같이 운동해온 친구들에게 나의 초조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불안전한 심리상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2시간 동안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후반전이 끝나자 걸을 힘조차 없이 다리가 풀렸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묘한 쾌감이 온몸의 신경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세포들의 반격들이 잔잔한 전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상은 충분히 충만해 보였다. 힘들었던 순간보다는 밝고 좋았던 기억들이 무의식의 지도를 바꾸고 있었다. 밝고 좋았던 기억들의 지도로 말이다.  


 소송과 화재 여파를 정리 중에도 축구와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뛰었다. 허리와 목 디스크는 기본 사양이었고 무릎도 연골들이 파열되어 부서져 있었다. 우울은 선택이었지만 플러스알파가 있었다. 바로 “다발성 말초신경병증“이라는 희귀 난치성 질병까지 찾아오면서 또다시 죽음과 마주해야만 했다. 죽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지금 마주한 죽음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 실체는 죽는다는 것뿐이었다. 현대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는 질병들은 아직도 차고 넘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치료 휴양차 한국에 와서도 축구를 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에는 선수로 전국체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영국 대표로 출전했을 때 감독으로 오인당해 주심과 실랑이를 벌일 만큼 나이가 들어버렸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축구를 멈추지 않는다. 허리디스크로 앉기도 힘들지만, 무릎 연골 파열로 걷기도 힘들지만, 암보다 치료하기 힘든 희귀 난치병에 걸렸지만, 나는 여전히 축구를 하고 있다.


 축구는 나를 나답게 해주는 유일하면서도 특별한 "그 무엇"이다. 우리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은" 지치고 만신창이가 된 나의 육신과 심신을 다독여주는 친구이자 의사이다.  비록 아주 먼 미래이긴 하지만 언젠가 외계인이 지구별을 점령할 수도 있다. 그때 식민지 지구별에서 축구의 재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계인들에게 끌려가서 죽기 직전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 일이 온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축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런던남자 소속엘러펀트하우스 직업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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