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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29. 2020

제주에서 만난 불꽃같은 두 남자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간 사진작가 김영갑과 화가 반 고흐


특별한 일은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의 작은 영감으로부터   


 2020년 4월 중순의 어느 봄날이었다. 밖은 코로나로 떠들썩했지만 선정릉 사무실에는 고요와 적막만이 나른함을 견디고 있었다. 눈꺼풀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봄날의 오후! 순간! 번개가 내리치고 사라지듯이 머리가 띵하면서 한 가지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마일리지였다.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는 파라오들의 미라들처럼 고이 잠들어 계시는 나의 마일리지! 10만 마일이 넘어가는 한국의 모 항공사 마일리지는 먼지에 쌓인 채 오랫동안 미라처럼 잠들어 있었다. 브리티시 에어라인만 타고 다니다 보니 한국의 마일리지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그동안 나의 마음에서 유배된 마일리지가 나만큼이나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한창일 무렵의 그날! 왜 갑자기 마일리지가 떠올랐는지는 의문이다. 늘 그렇듯이 특별한 일은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의 작은 영감에서 비롯된다.           


마음속의 이어도     


 유배된 마일리지를 가지고 해외로 나갈 수는 없는 현실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의 이어도, 나의 유토피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서울에서 가장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곳은 제주도밖에는 없다. 영국에서 사는 동안 얼마나 동경했던 섬이던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제주도만큼 아름답고 특별한 섬은 없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제주도부터 가보고 싶었다. 비록 건강 때문에 돌아오긴 했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제주도는 마일리지처럼 잊혀갈 뿐이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그 섬에 가면 뭔가 특별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우주를 가득 매워버리고도 남을 듯한 외로움과 만나서 악수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상형의 여인이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서 기다릴 것만 같은 그 설렘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아직까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여행지에서의 인연! 이번만은 머피의 법칙이 아니기를, 그래서 진정한 행운의 여신(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른한 봄날 오후 3시쯤의 유혹! 그 유혹은 강렬했다. 정신을 차리고 해당 항공사의 홈페이지에 로그인을 했고 다음날 그 섬으로 날아갔다. 비행기 옆 좌석은 비워두어야 해서 누군가가 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두 남자를 그 섬에서 만나고 돌아왔다.   
         


인생은 타이밍!     


 행운의 연속이었다. 사실 두 남자를 만나려고 제주도로 날아간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마침, 제주도에 살고 있는 어느 작가님이 금요일 강의에 참석 중이었다. 매주 금요일 선정릉 모두의 캠퍼스에서는 "놀라운 강의"와 "어떤 강의"가 열린다. 마스크라도 쓰고 강의에 참석하려고 작가님은 새벽에 제주도에서 날아왔다. 복도에서 마주친 그 순간 나는 분명 뭐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2주 전에 잠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작가님! 갑자기 제주도에 가고 싶은데 싸고 괜찮은 숙소 좀 추천해 주세요?
아! 그래요. 언제 가고 싶으신데요? 가신다면 며칠이나 게실 건가요?
내일요. 기간은 5~6일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요.
아 그래요! 마침 잘되었네요. 저희 펜션이 비어있으니 사용하세요. 돈은 받지 않을게요. 대신 마지막 날 청소만 잘해주세요.



마일리지의 기나긴 잠을 깨어주며!  


 두 번째 만난 작가님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치 그럴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두 장의 김포 제주 간 왕복 티켓을 구매했다. 마일리지가 기지개를 켜는 소리는 짜릿했다. 이집트 미라가 깨어나서 3천 년이나 미뤄 뒀던 하품을 하는 것처럼.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던가. 물론 마일리지 자체는 공짜가 아니다. 나와 아내가 열심히 제휴 카드사를 만족해준 결과물이었다. 동행할 친구는 20대 중반의 무인도 사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황 대표였다. 황 대표는 지난해 무인도를 같이 다녀오면서 친해졌다. 내가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병문안을 오던 고마운 친구다. 비록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우리는 다음날 제주도로 날아갔고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를 빌렸다. 렌터카 회사들은 마치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의 반값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자동차를 렌트할 수 있었다. 우린 곧바로 펜션이 기다리고 있는 동쪽 성산의 해변으로 달려갔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 대신 꼬불꼬불한 중산간 도로를 탔다. 제주의 “오름”들을 보면서 달리고 싶었다. 제주의 산하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유채꽃은 물론이고 이름 모를 들꽃들과 낮은 돌담들 그리고 나지막한 언덕처럼 보이는 “오름”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차피 삶은 역설로 가득!


 공항 옆의 렌터카 회사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작가님의 펜션에 도착했다. 한눈에 보아도 펜션 같은 회색의 아름다운 목조주택이었다. 마당에는 잔디가 허리 아래로 두르고 있는 현무암의 돌담 색상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우린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짐만 내려두고 곧바로 바다로 달려갔다. 군 입대 전에 마주한 제주의 바다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마주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무섭도록 파란 바다 색상도, 해안을 가득 매우고 있는 돌과 바위들도, 밀려오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도, 중천에서 미소 짓는 태양도 모두 그대로였다. 단지 나 자신만 변해있었다. 삶에 지치고 질병에 휘둘리고 나이까지 들어가는 나를 바다에서 젊은 날의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입대 전 스물한 살의 젊은 대학생이었던 내가.     


 성산의 해안에는 귀하신 몸인 성개가 새까맣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가시를 고슴도치처럼 날카롭게 새우고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고 있는 성게들, 해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바닷물이 빠진 해안에서 크고 작은 돌을 들쳐가며 소라와 보말(고동의 제주방언)을 잡는 토박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하얀 갈매기들, 넘실대는 파도와 그 파도가 부서지며 내는 하얀 소리들, 검은색이 바래버린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들이 우릴 반겨주었다. 할머니 한분은 보말을 우리에게 연신  먹으라고 권하셨다. 우린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할머니는 가장 큰 놈들로 골라서 돌로 손수 깨 주셨다. 날것은 씹을수록 짭조름하며 고소했다. 씹을수록 성긴 바다향이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퍼져나갔다. 

 말없이 할머니 옆에서 작업하시던 할아버지는 소라와 해삼을 잘라 주시며 대화를 트셨다. "젊은이들 어디에서 오셨소?" "서울에서 왔는데요." "육지것들이구먼! 육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무섭다니깐. 한 명도 안 왔으면 좋겠어!"  청정 제주를 오염시키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들을 만큼의 소리로 조용히 육지것들에 대한 반감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파리 날리는 자신의 식당과 민박집 때문에 힘들다고 하셨다. 그 육지 것들의 발길이 뚝 끊겨서 장사가 전혀 안 되고 있어서 죽겠다고. 이렇게 장사가 안되긴 처음이라고.       

   




제주도와 평생 사랑에 빠진 영혼의 사진작가 김영갑     

 이십여 년 동안 사진에만 몰입하며 내가 발견한 것은 “이어도”다. 제주 사람들의 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이어도를 나는 보았다.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호흡곤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 나는 이어도를 만나곤 했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P27)     


 먼저 찾아간 곳은 삼달리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영갑은 서울에서 살며 가끔 제주도에 사진 작업하러 가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제주에 반해서 섬에 눌러앉은 사진작가였다. 그는 “루게릭”이라는 병이 찾아올 때까지 평생 제주의 “오름”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P84)



 온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루게릭병이 시작되자 폐교에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갤러리가 완성되기까지 그는 모든 것을 갤러리 공사에 쏟아부었다. 셔터 누를 힘도 없는 환자였지만 굳어가는 근육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들이 살아갈 공간이 간절하게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폐교를 임대해서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갤러리뿐만 아니라 운동장과 뒤편의 뜰도 제주식 정원으로 꾸며놓았다. 나지막한 돌담으로 조성된 정원은 아름다웠다. 그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아기자기한 갤러리! 그 공간들에 영원의 시간을 가두고 싶었던 그의 의지와 고집들! 환상적인 작품들 만큼이나 열정적인 예술에 대한 열정!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간 그 갤러리에 그처럼 언젠가는 소멸해버릴 내가 서 있었다.    
  

 온종일 누워만 지내기에는 하루가 너무 길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하루가 너무 더디 간다. 침대에 누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적을 소망하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세월을 들추며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나의 일이다. 슬픔이 밀려온다. 무기력해진 모습에 우울해진다. 침대에 누워 우울해해도 하루는 간다. 무언가에 몰입할 수 없는 하루는 슬프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P194)     


 나는 오랫동안 그의 작품들을 감상했고 그를 생각했다. 한 번으로 부족해서 마지막 날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작업 공간에 놓여있던 커다란 사진기 두 대는 그가 멋진 사진작가였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사랑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사진 대신 사랑을 택했더라면 아마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죽기 전에 갤러리는 완성되었고 그는 2년 정도를 더 살다가 갤러리 앞의 작은 감나무 아래 잠들었다. 

 일생동안 단 한 점의 사진도 판매하지 않은 그의 작품들에는 외로움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반 고흐와 닮아있었다. 고흐의 작품들은 팔리지 않아서 일생동안 단 한 점만 판매되었다. 고흐가 매일 고민했던 점은 "왜 내 그림은 팔리지 않는 것일까?"였다. 이 사실들은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에도 여러 차례 나와있다. 동생이 그림 판매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팔리지 않았다.  
 

 김영갑은 애당초 자신의 작품을 사고파는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남의 밭에서 고구마나 당근을 캐 먹어야 했고, 필름 살 돈이 없어서 막노동을 해야 했지만 결코 현실과 타협하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 좀 형편이 좋아진 것도 전시회와 갤러리 수익금 때문이었다. 전시회가 끝나면 그의 작품들은 창고로 들어가 곰팡이가 나서 버려지곤 했다. 그래도 팔지 않았다.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갤러리에는 관람객이 없었다. 텅 빈 갤러리! 앞뜰과 뒤뜰도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인 잃은 갤러리 두모악! 그곳에서 나는 모처럼 제대로 된 외로움과 악수를 나눌 수 있었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밤이 되면 갤러리는 적막하다. 적막함을 즐기며 홀로 정원을 걷는다. 몸이 피곤해지면 편안한 상태로 침대에 눕는다.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밤늦도록 사진 작업에 매달렸을 테지만 이젠 한가로운 일상에 익숙해졌다. 루게릭병이 내게 준 선물이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P210)          





제주도에 나타난 빈센트 반 고흐    
 

 다른 한 남자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빈센트 반 고흐다. 마침 제주도에서 반 고흐와 그의 친구 폴 고갱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흐와 고갱은 비록 친구이긴 했지만 각자 다른 "예술관"으로 인해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예술가들의 고집과 기질은 거의 광기에 가깝다. 그래서였을까? 자신의 주관과 맞지 않으면 아무리 친구라 할지라도 결코 상대방의 생각이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고흐가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른 이유는 안타깝게도 고갱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이 미스터리한 사건은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로도 나온 바 있다.


 영국에 있을 때 나는 반 고흐의 발자치를 무던히도 찾아다녔다.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파리의 미술관들부터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마을과 무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재단 박물관, 프로방스 "아를"의 밤의 테라스 카페와 2층 집 그리고 작은 고흐 미술관 등등. 

 프랑스 남부에 있는 프로방스의 "아를"에 화가공동체를 꿈꾸었던 고흐는 파리의 동료 화가들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고갱도 동생 테오가 교통비까지 제공하는 조건으로 겨우 모실(?) 수 있었다. 살아갈 집과 교통비까지 제공해서 모신 고갱이었다. 아를에 있는 2층짜리 노란 집은 고흐와 고갱만이 활동하는 화가공동체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유일한 멤버였던 고갱마저도 사사건건 다툼을 견디지 못하고 3개월 만에 돌아가고 말았다. 고갱이 돌아가던 그날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만다. "영혼의 편지"라는 그의 저서를 보면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글쟁이였다.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주옥같은 편지들에 그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빛의 벙커 벽과 천정과 바닥에 살아서 나타난 고흐는 시종일관 준엄한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벽이나 바닥에서 뛰쳐나올 듯한 그와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의 친구 고갱의 작품들도 같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7월 29일이 빈센트 반 고흐의 기일이다. 빛의 벙커와 김영갑 갤러리는 이제 제주의 명소가 되었다. 제주도에 가면 꼭 방문해보길 권하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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