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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11. 2020

뒤집어진 장수풍뎅이는 혼자 일어날 수 있을까?  

 매일 밤 뒤집어진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를 뒤집어주며...

   

밤마다 산장에 놀러 오는 장수풍뎅이 수컷


  내 생일인 6월 30일을 기점으로 2020년이 꺾어진지도 오래다. 영국에 있는 아이가 아빠의 생일을 기억해주지 않아서 많이 서운했다. 아이도 9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기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한국보다 훨씬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허무와 허망과 허탈의 3허에 매몰된 채 허송세월을 하는 느낌이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이다. 이번 연도는 인생에서 지우고 싶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세계 리더들이 머리를 맞대고 협정을 맺어 한 살을 먹지 않는 특별법을 제정했으면 좋겠다. 비록 숫자에 불과하지만 너무 억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이런 이상한 시절을 보내고도 한 살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려 한다. 돈은 쌓이지 않고 나이만 쌓여가고 있는 세월에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다.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의 숫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늘어가는 나이테는 어쩌란 말인가! 한가한 생각이긴 하지만 벌써 겨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머지않아 들이닥칠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다. 이러한 이상한 감정들이 더욱 혼란스럽다.


 우린 이미 상당히 이상한 봄을 보냈다. 꽃은 피었지만 즐기지 못하였고 나비와 새가 날아다녔지만 보지 못하였다. 잠깐 봄만 견디면 괜찮을 거라 떠들던 언론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 이상한 여름을 보내고 있지만 벌써 익숙해져 가는 중이다. 어차피 불행이란 녀석의 특징은 무자비하다는 것이다. 자비를 모르는 불행은 남의 사정 따위를 보면서 강도를 조절하지 않는다. 연달아서 오는 것도 모자라서 누군가의 인생 자체를 파괴하려 든다. 심지어 목숨 따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온통 야만의 시대였다. 죽고 죽이는 전쟁의 광기도 그렇지만 흑사병을 비롯한 온갖 질병들이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했다. 그러한 야만의 시대가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편리함과 효율성이 우선인 자본주의 논리는 결국 작은 것들을 얻고 큰 것을 잃을 확률이 높아지게 하고 있다. 인류가 직면한 질병과 재난들을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부터 빨간 고추잠자리들의 비행이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무리 지어 비행을 한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고추잠자리들은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곤충이다. 서양의 날개 달린 용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영어로는 Dragonfly라고 한다. 고추잠자리들이 비행을 시작하면 길가의 코스모스도 하나둘씩 피어나기 시작한다. 밤이 되면 온갖 곤충들이 산장의 불빛들을 찾아 날아든다. 그중에서도 장수풍뎅이나 사슴벌레 등의 곤충들을 보살피는 일이 이젠 일과가 되어버렸다.     
 

 산장 내외부의 바닥들은 타일로 이루어졌다. 이 미끄러운 바닥에서 뒤집어진 곤충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다. 누군가가 뒤집어서 일으켜주지 않으면 밤새도록 버둥거리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죽어간다. 아무리 자연의 섭리라고는 하지만 이를 묵도하는 일은 잔인하다.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에 잠들기 전 순찰을 한다. 어떤 날은 수십 마리의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들을 뒤집어서 걷거나 날게 해 준다. 녀석들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다시 여름밤을 즐긴다.
 

장수풍뎅이 암컷, 수컷에 비해 체구가 작지만 집게에 물리면 피부가 뚤릴 정도로 강력한 집게를 자랑한다.


 녀석들을 뒤집어주는 과정에서 집게에 집혀서 손가락에 피가 나는 일도 잦다. 녀석들은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사정없이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말 못 하는 곤충에게 타박할 수도 없다. 사실은 곤충이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곤충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 못지않게 모든 분야에서 전지전능해지려 발버둥 치는 인간이다.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인간들이 재난 앞에 무기력한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는 중이다. 인간이라는 종과 장수풍뎅이가 뒤집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것과 뭐가 어떻게 다를까!
      

 매일 잠들기 전 산중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자리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구름이나 달과 데이트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생각해본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과연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내가 느끼는 오만 감정들은 어떤 의미일까! 외로움, 고독, 슬픔, 기쁨, 불안, 좌절, 분노, 우울, 우쭐, 행복, 희망 등의 감정들과 저 광활한 우주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뒤집어진 채로 밤새 버둥대다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며 아침이면 죽어가야 하는 저 장수풍뎅이들이 바로 우리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아닐까!

 
 이젠 지긋지긋하고 무자비한 장마가 끝나가고 있다.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다 사라져 가는 여름이 애처롭다. 몇 주 후면 또 다른 계절 가을로 접어들 것이다. 이번 가을만은 이상한 가을이 아닌 익숙한 가을이길 소망한다. 살다 보니 별 걱정을 다한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들로 넘쳐나는데 말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놈의 걱정에서 자유롭고 싶다. 남도의 산중에 들어와 산지도 벌써 반년이 되어간다. 언제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세월 참 빠르다. 처음 산에 들어와서 느꼈던 감정은 지상낙원, 경이로움, 아름다움 등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도 모자랄 정도의 압도적인 감정이 나를 지배했었다. 무엇보다도 지긋지긋하던 지출이 거의 사라졌다.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일이 없는 곳이 산중 생활이다. 서울에선 숨만 쉬려도 돈이 들었는데 말이다.


산장에 가끔 때거지로 놀러와서 집단 패싸움을 하고 사라지는 난폭한 사슴벌레들, 눈에 뵈는 게 없는 녀석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희열과 행복이라는 감정들도 잠깐이었다.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지금은 일상에 매몰된 그저 평범한 풍경에 불과해졌다. 사람 참 간사하다. 연애도 결혼생활도 좋아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익숙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익숙함이란 감정은 편안함과 안정을 주긴 하지만 동시에 권태라는 감정을 선물한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권태로 가득한지도 모른다. 매일 같은 듯 다르거나 다른 듯 같아 보이는 날들을 소진하며 우리는 아주 느린 자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찬미하고 동경했던 아름답고 멋진 인생일지도 모른다.      

 돈만 가지면 모든 행복을 쓸어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너무도 찬란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들은 뒤집어진 수컷 장수풍뎅이도 꿈꾸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뿔이나 집게가 얼마나 강력한지, 검고 딱딱한 등껍질은 또 얼마나 단단한지, 그 갑옷 속에 감춰진 날개는 또 얼마나 멋진 비행을 할 수 있게 하는지, 더듬이는 또 얼마나 섬세한 5G 이상의 수신기인지를 우쭐거리며 자랑할지도 모른다. 한번 뒤집어지면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가야 하는 것이 운명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나의 질병만 아니었어도 당장이라도 섬진강변이나 영산강변의 수해 이재민들에게 달려가고 싶다. 그분들의 수해복구를 도우면서 그분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좌절과 절망과 분노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은 날이다. 전국의 모든 수해 피해자분들이 적절한 보상과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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