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이 제대로 바뀌고 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아름다운 사계절을 즐기며 일상과 계절들을 공유할 수 있을까? 우리 생애까지, 아니면 적어도 우리 자녀들 세대까지? 지구는 언제나 좀 선선해질까? 한국의 부동산 버블이야 언제든 꺼지고 말겠지만 지구온난화 문제는 더 이상 답이 보이질 않는다. 심각하지만 경각심도 없다. 일부 선진국 몇 개 나라에서만 그나마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할 뿐이다. 한국은 아직 갈길이 너무 멀다. 기후변화로 인한 모든 재난들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코로나 19가 익숙해지듯이 말이다. 매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유달리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계절의 변화에 제법 민감했다. 감수성이 풍부해서라기보다는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크고 작은 기대와 설렘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계절에 지루해질 만하만 다른 계절을 선물해주는 자연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기난긴 여름이나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면 어김없이 낭만적인 가을이나 매혹적인 봄을 선물해 주는 자연이 위대해 보였다. 신의 선물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관대했다.
신이 언제 우리 인간에게 이처럼 관대했던 적이 있던가! 어려서부터 내가 믿고 영접한 신은 늘 심판과 불행만을 선물해주었을 뿐이다. 어려서 느낀 신에 대한 경외감은 불안과 공포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는 지금도 대한민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의 원죄란 단순히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게 그리도 큰 문제였을까! 어린 내가 교회나 성당 또는 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기껏해야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성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결국 종교는 유한한 인간의 사후 세계를 통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면서 비대해지고 뒤뚱거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계절의 변화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들이 어느 순간 의문이 들기 시작할 때가 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이런 종류의 의문은 늘어가고 있다. 현명해져서라기 보다는 그만큼 경험치가 축적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드는 것과 현명해지는 것은 반비례한다는 것을 한국의 많은 어르신들이 작금의 사태를 통해 보여주고 계시지 않은가. 한국에는 “어른이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제법 나이 든 자식들을 아직도 교육 대상으로 여기시는 나의 아버지를 필두로 말이다.(아버지! 당신 흉봐서 죄송합니다.)
월출산 국립공원의 소리 깡패인 매미
매미는 언제까지 울어댈 수 있을까?
매미는 정말 우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짧은 생이 허무해서 실컷 노래하며 그 비통함을 달래려는 것일까? 언젠가는 매미가 천연기념물이 되고 매미 소리는 음원으로만 들을 수 있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북극과 그린란드의 빙하들이 녹아내리는 속도와 월출산 국립공원에 사는 매미들의 삶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일까?
매미의 눈과 콧구멍과 입이 보이시나요? 매미의 잘 생긴 얼굴이랍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마치 발악이라도 하듯 국립공원 내 매미가 일제히 울어댄다. 몰입하지 못하는 시간들은 매미 소리에 압도당하고 만다. 이보다 더한 고문도 없다. 박자도 음정도 가사도 무시하며 악을 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자연의 합창단이 쏟아내는 화음이 왜 이렇게 아름답지 못한 것일까! 현악기의 맑고 높은 소리나 피아노의 깨끗하고 낭랑한 소리 또는 타악기의 리드미컬한 소리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도시의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보다는 나아야 할 것 아닌가! 심지어 짜증이 잔뜩 묻어있는 자동차의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도 리듬이 있고 박자가 있다. 물론 경적을 1분 동안 누르고 있는 미친 인간들도 있긴 하다. 마치 매미처럼 말이다. 이 또한 편견 이리라! 내 마음이 그만큼 삭막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자연의 소리, 그것도 작은 곤충의 소리 하나조차 즐길 줄 모르면서 어찌 산중에 산다 할 수 있을까!
매미의 투명한 날개 밑에 꼬리가 보인다.
국립공원에도 여름이 한창이다. 여름의 대부분을 지배해버렸던 장마가 끝나면서 연일 폭염주의보나 경보가 울려대고 있다. 그런데도 코스모스들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삼삼오오 모여들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구절초 소식도 들려오고 이른 가을 전어구이도 먹었다. 가을이 코앞에서 대기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메신저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무리 폭염 경보 중이어도, 장마가 길어도, 태풍들이 들이닥쳐도,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위대함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들이 살랑살랑 불어댄다.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이 공연을 마치고 장막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 그 또한 여름의 역할 아니던가!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이처럼 당연하게 치부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나의 손가락을 타고 다니는 매미와 대화를 하고 싶다!!
모두가 기다리는 가을이 오고 있다. 언제부터였던가. 입추니 처서니 하는 가을의 절기들이 민망하리만큼 여름의 횡포가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 전 세계적으로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봄에도 가을에도 여름이 기승을 부려댄다. 내가 살고 있던 런던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름이라고 해봐야 기온이 30도를 한참 밑도는 날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런던에도 차들에 에어컨이 장착되기 시작했다. 옵션이었던 에어컨이 필수가 된 것이다. 아직까지 런던에서 집에 에어컨을 두고 사는 집은 거의 보지 못했다. 선풍기도 없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선풍기가 필요하기 시작했다. 이젠 에어컨도 설치해야 할 정도로 런던의 여름 또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런던에서 20년을 살다가 돌아온 한국의 여름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여름철 런던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느꼈겠지만 런던의 여름은 선선하다. 햇살이 따갑기는 하지만 그늘만 찾아들면 빠르게 싸늘해진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한기까지 느낄 정도다. 그에 비해 한국의 여름은 건식과 습식 사우나가 무색할 만큼이나 덥고 습하다. 위도로 치면 38도인 서울에 비해 런던이 51도로 높기는 하다. 참고로 파리는 49도다. 그렇다고 위도가 0도인 적도와 차이가 나지 않는 서울의 날씨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쩌면 뼛속까지 “문돌이”인 나의 한계일 수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연일 초비상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나의 삶도 처참하리만큼 무너졌다. 발병 초기만 해도 나의 삶과 무관할 줄 알았던 바이러스였다. 놀랍게도 불행은 이번에도 나를 패해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이마저도 다행이고 행복이라고 애써 위안을 찾아볼 뿐이다. 당장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들이 세상을 압도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발병 초기에는 종식까지 몇 개월이었던 예상치가 이젠 몇 년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연일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이 또한 인류가 수없이 겪어왔던 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백 년쯤 지날 무렵의 우리 후손들은 그렇게 평가할 것이다.
지난 세기 초의 스페인 독감은 1918년 시작되어 192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2500만에서 5000만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흑사병이나 콜레라 등 수많은 질병들에 인류는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래도 적응해왔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인류는 진화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무서운 공포는 코로나나 스페인 독감 같은 전염병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공포에 대해 너무 무뎌져 있다. 전염병에 적응하듯 지구 온난화에 이미 적응해버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치며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해 버렸다. 미국이 너무 많은 분담금을 내지만 실익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의 제왕적 대통령이기에 가능한 일방적인 횡포였다. 눈앞의 돈에만 눈이 멀어버린 나라로 미국을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는 혹독할지 모른다. 코로나처럼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마스크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나마 코로나는 순한 질병일지도 모르다. 마스크 한 장으로 맞짱 뜰 수 있는 바이러스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닥쳐오는 재난들은 마스크 따위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런던의 도심 혼잡 통행료 지역임을 알리는 도료 표지판
내가 이민 가고 몇 년 뒤였던 2003년부터 런던에서는 Congestion Charges(교통 혼잡 부담금: 차량의 런던 시내 도심 진입을 제안하기 위해 부과하는 요금)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도심 혼잡과 환경오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에 8파운드였던 요금이 10여 년 전 10파운드가 되었고 5년 전쯤에는 12파운드에서 지금은 15파운드가 되었다. 적용시간은 07시부터 18시였는데 이젠 22시까지로 연장되었고 크리스마스날만 무료다. 크리스마스엔 비행기를 제외한 어떠한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브리드 차와 경차는 무료다. 런던의 길들이 예전 마차가 다니는 골목길 수준임에도 차가 막히지 않는 이유다. 반면 우리의 서울은 어떠한가?
런던의 도심 혼잡 통행료 구간, 대부분의 Zone 1이 다 포함된다.
광화문이나 테헤란로의 도로들을 보면 입이 짝 벌어진다. 런던의 명동에 해당하는 옥스퍼드 스트리트는 왕복 2차선 도로다. 옥스퍼드 스트리트에는 일반 차량 진입 금지다. 버스와 택시만 다닐 수 있다. 런던이 한국처럼 도로들을 확장하지 않고도 대중교통만으로도 불편함이 없도록 이동할 수 있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차량 이동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런던 도심 혼잡 통행료 15 파운드면 우리 돈으로 23,300원가량이다. 매일 23,300원을 내고 한 달 출퇴근한다면 50만 원가량이 드는 셈이다.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어지간한 차량 할부 금액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그래도 부자들은 차를 타고 런던 도심에 들어간다. 심지어 주차하기 귀찮아서 더블 옐로 라인에 불법 주하는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도 자주 본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부자들에겐 주차하는 일조차 번거로울 것이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기차나 지하철 또는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 또는 시내를 다녀오는 일이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다. 서울처럼 그 많은 승용차들이 그 넓은 도로를 장악하지 못하게 국가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아스팔트 위의 C자를 넘어서면 런던 도심 혼잡 통행료 15파운드, 약 23,300원을 납부해야 한다.
반면 우리 서울의 도로 사정은 어떠한가! 이러고도 우리가 환경을 논하고 지구 온난화를 통해 진행되는 기후변화 문제를 논할 수 있을까! 지난해 일방적으로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한 트럼프 대통령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서울은 런던보다 대중교통시스템이 훨씬 발전했다. 모든 지하철역에는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스크린 도어는 고사하고 에어컨조차 없는 런던의 150년이나 된 노후 지하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시설이나 노선이나 길이나 모든 면에서 서울이 월등하다. 그런데도 서울의 도로들은 차가 넘쳐난다. 일과 시간에는 막히지 않는 도로나 막히지 않는 시간대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1인당 자동차 보유 대수가 영국이나 미국을 능가하는 것도 아니다. 과연 뭐가 문제일까!
최근 북극 근처에서 38도가 관측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북극의 빙하가 다 녹으면 해수면이 6~7미터 상승한다고 한다. 물론 그전부터 우리는 물과의 전쟁을 시작하고 있다. 비단 전쟁은 물뿐만이 아니다. 온갖 천재지변이 난무할 것이다. 한반도가 아열대가 되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화된 지 오래다. 동해안에서 그 흔하던 명태와 오징어가 집히지 않는 현상과 북극의 38도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정말 남의 일일까!
유례없이 길었던 장마가 많은 상처를 주고 물러가기 무섭게 폭염과 태풍에 시달리고 있다. 입추와 처서가 지난 8월 말에 연일 폭염 주의보와 경보가 내려지는 일이 언제부터 당연해진 것일까! 우리는 정말 지구의 아픈 환경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먹는 맛있는 고기들, 일상을 지배해버린 수많은 플라스틱 제품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용을 선호하는 편리한 라이프 스타일, 그렇지 않아도 참기 힘든 더위에 도심의 빌딩들에서 내뿜는 에어컨 열기까지 말이다. 코로나라는 괴물도 버거운데 장마와 태풍과 폭염까지 우리를 괴롭히지만 이러한 재난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돼 버렸다. 경각심이라고는 한국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제주의 아름다운 용눈이 오름, 말 커플들은 언제까지 저렇게 한가하게 풀을 뜯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계절이 바뀌고 있다. 다가오는 가을은 조금 덜 버거운 계절이기를 소망한다. 편리함의 이면에 숨어있는 수많은 환경파괴의 주범은 남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일상을 조금만 관찰해보면 내가 왜 환경파괴의 주범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위대함을 칭송하던 시대는 저물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찬양하자는 말은 아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도심 혼잡 통행료부터 시행해야 할 것이다.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업체들에게는 환경 부담금을 더 올려야 한다. 마트에서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는 조치 정도만으로는 점점 현실화되는 재난들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어쩌면 코로나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원전이나 석탄 화력발전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효율성을 생각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재난들을 생각하면 답이 보인다.
경제 논리의 시대는 저물고 이젠 환경 논리의 시대가 시작되어야 한다.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서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어쩌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반복될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 바람이나 소망들이 점점 더 간절하고 절박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