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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들이 나를 무신론자로 만들었다!

갈매기들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보며..

by 런던남자
강화도 갯벌에서 갈매기들의 사회적 거리두기

"신앙인들이 나를 무신론자로 만들었다."
<일어나라 불멸의 밤을 넘어, 조슈아 페리스, P201>


얼마 전 바닷가에서 갈매기들을 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갈매기들은 서로 간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리두기였다. 갈매기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종교란 무엇일까! 갈매기들도 참여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왜 인간 집단, 그것도 영적으로 가장 축복받고 훌륭한 종교집단의 구성원들은 거부하는 것일까! 매일 또는 매주 주님을 영접하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자들이 발 벋고 나서도 모자라는 시국에 오히려 재를 뿌려대는 것도 주님의 뜻일까! 하느님의 말씀일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악으로 낙인찍힌 채 홀로 십자가를 지려는 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일까! 십자가에 못 박혀서 서서히 죽어가는 형벌의 고통을 감내하고야 말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그럴 자신도 없이 부화뇌동하는 것일까! 일부 몇몇 부패하고 사악한 목사님들만 다만 악에서 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구해야 할 신도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늘어만 가고 있다. 라인언 일병 구하기로는 택도 없을 정도다. 나의 경우에는 그나마 띄엄띄엄 나가던 교회 예배도 더 이상 나갈 마음이 사라져 가고 있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나를 점점 더 무신론자로 만들어가고 있다.

몇 해 전 런던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화로 무거운 주제를 시작할까 한다. 어찌 보면 특정 종교집단을 모독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런 비난 따위는 기꺼이 감내하겠다. 사실이니까 두려울 이유도 없다. 런던의 모 식당에 30여 명의 스님들이 식사 예약을 했다고 한다.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문제는 비빔밥에 들어가는 소고기였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소고기를 한 테이블만 넣지 말고 나머지는 다 넣어달라고 예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약을 받은 직원이 잘못 이해해서 한 테이블의 네 개의 비빔밥에만 고기를 넣고 나머지 테이블의 모든 비빔밥에는 고기를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약받은 직원이 실수한 것이 이상한 일인지 아니면 나머지 26명의 스님들이 드실 비빔밤에 소고기가 들어가는 것이 이상한 일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스님들이 도착해서 보니 대부분의 비빔밥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스님들은 화가 나서 곧바로 고기를 넣어달라고 요청하며 곡차(막걸리)부터 달라고 했다고 한다. 막걸리는 흔들지 말고 말이다. 참고로 런던에서도 한인마트를 통해 한국의 이동이나 장수 막걸리를 구입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30여 명의 스님들은 승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그중에 네 분만 고기를 드시지 않았고 나머지는 고기를 드시는 스님이었다는 것이 펙트였다. 초등학생들이 보면 육식이 뭐가 나쁜데요!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것만 같다.

나도 런던에서 요식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식당의 담당 직원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화를 냈다는 사실이 스님들이 고기를 드신다는 사실보다 더욱 슬펐다. 어쩌면 나의 고정관념이 "다름"이라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일상을 허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님들이 고기를 드시든 말든, 술을 드시든 말든, 결혼을 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마저도 인정해주고 이해해줘야 하는 "다름"은 아닐까. 머리가 터질 만큼 혼란스러웠지만 머리는 터지지 않았다. 대신 머리에 쥐가 났다.



오늘은 작심(?)하고 기존 상식의 틀을 깨려 한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감정의 쓰레기들을 그렇게라도 털어버리고 싶었다. 비록 뒤틀리고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종교 문제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단의 영역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종교가 타락의 길로 접어든 지 오래고 자본주의 첨단을 달리는 사기업화 되어간다 할지라도 말이다. 나 같은 사이비 얼치기 신자가 감히 신성불가침 한 영역을 들여다보려는 시도 자체가 지옥에 떨어질 일일지도 모른다.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은 해야겠다.

말과 같이 글도 금단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나 종교처럼 민감한 사항들을 가볍게 글로 옮기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첫 번째 단계부터 무너지면서 우리 사회는 케이아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간의 암묵적인 약속에는 나름대로 금단의 영역이 존재한다. 하지만 나의 이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을 억누를 방법이 없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호기심 때문이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어느 날 아담이 마주하게 되는 이브라는 낯선 생명체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짠 하고 나타난 이브가 아담을 처음 만나는 그 순간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특정 종교집단을 비판하려면 그들만큼이나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수고쯤은 감내해야 한다. 아담이 이브를 알아가는 과정은 참으로 흥미롭다. 마크 트웨인의" 아담의 일기”라는 소설에 그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모르는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인간의 호기심은 인류를 진보시킨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니었던가.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라는 곳에 다녔다. 이 또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학교도 기독교 재단의 학교를 다녔다. 성경이라는 과목이 있었고 교목 선생님이 계셨다. 수업 시작과 끝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다. 수요일인지 목요일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교생을 대강당에 모아 두고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잊을만하면 “심령대부흥회”라는 것을 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나의 심령은 부흥하지 못한 채 영혼은 정처 없이 방황했다. 이게 다 무슨 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종교의 자유도 있지만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 모태신앙이니 하는 말들은 어찌 보면 무섭도록 잔인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이슬람교도들은 100% 모태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을 자유가 없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아이들은 이슬람교도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다.

내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교회라는 곳은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교목 선생님의 말씀도, 다리 건너 학교 맞은편에 있던 대형 교회의 목사님 말씀도 한 결 같이 나라를 걱정하고 정치를 걱정하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매주는 아니지만 격주 정도로 다니던 교회마저 점점 마음에서 멀어져 갔다. 신앙인들의 엄숙하고 경건한 말들은 나를 포함한 신도라는 집단을 세뇌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정치를 걱정하면서도 정작 교회나 학교 내의 일들도 처리하지 못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열심히 기도 하고 매일 새벽기도에 나오는 분들도 툭하면 북한 이야기를 했고 지옥 이야기를 했다. 어린 나에게 천국에 가는 길은 공부도 중요하지만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그분들의 한결같은 논리였다. 그때도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나는 천국에 갈 생각도 없고 천국이나 지옥 따위를 믿지도 않았다. 정말 지옥이 있다면 그 많은 타락한 목사님들은 어쩌란 말인가!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고 이민을 떠났다. 런던에서는 2년 정도 리치몬드에 있는 영국 교회에 나갔다. 어린아이에게 친구도 만들어주고 영국 사람들도 사귀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민 초기의 외로움과 난제들이 우리 가족을 교회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크고 오래된 교회에는 거의 노인들만 몇 분 앉아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돈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면 식사를 같이 하는 일도 없었다. 교회 현관에 비스킷과 쿠키 몇 조각이 홍차와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마저도 먹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요일엔 성경교회 모임이 있었지만 한 번도 나가지 않아서 모임 성격이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 얼치기 신자가 성경공부까지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영어도 안되는데 말이다.

영국 이민생활 중에 만난 목사님들은 그나마 괜찮은 분들이었다. 어찌 보면 교회 자본주의 체재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 들일 수도 있던 목사님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경과 믿음에 기반해서 어렵게들 살고 계셨다. 소위 “개척교회”라는 창업(?) 과정에서 참담하게 실패한 분들이 많았다. 새롭게 교회를 오픈하는 일은 가게를 오픈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특정 개척교회는 신도들이 폭발적으로 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렇지 못한 채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신도들을 모집하는 과정은 글쓰기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쓰기에서 독자를 유혹하듯이 개척 교회에서는 신도를 유혹해야 하고, 독자가 원하는 글을 써야 하듯이 신도가 원하는 설교를 해야 하고, 독자의 욕구를 해결해 주듯이 신도의 욕구를 해결해 주어야 하며, 독자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하듯이 신도에게도 지루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하며, 독자의 입장에서 써야 하듯이 신도의 입장에서 목회를 해야 하며, 현재의 트렌드를 파악해야 하듯이 신도들이 원하는 트렌드를 파악해야 하며, 글에도 유머와 위트가 있어야 하듯이 설교에도 풍자와 해학이 넘쳐야 한다. 하지만 글과는 달리 목회에서는 이처럼 원칙대로만 해서는 부족하다.


신도들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스파이시한 것을 원한다. 밥 먹듯이 거짓과 과장으로 불안을 조성해서 신도들의 지갑을 열어야만 개척교회는 살아남는다. 손님이 없으면 가게 문을 닫고 폐업하듯이 개척 교회도 신도가 모이지 않으면 돈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교회 문을 닫고 폐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이 한국 대기업이 성장하는 과정과 다른 듯 닮았다는 것이다. 개척교회 신도수를 늘리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는 그분들은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상식과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하느님도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은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은 오랫동안 귓전에 맴돌았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민 오신 목사님들이 주위에는 제법 많다고 했고 실제로 영국에도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다.


만약 OO 했었더라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나는 나약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요즘 국민의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사실로 위안을 받으려 하지만 이 또한 Fact가 아닐 수도 있다. 아직도 정신 줄을 놓고 사는 국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문득 10여 년 전 거래처였던 한국계 일본인 사장님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런던의 한인 타운의 식당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사장님은 일본인들의 기질 중 하나를 말씀하셨다.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일본인들이지만 어려서부터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다는 것이다. 자신도 그런 말을 듣고 자랐고 자녀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민족인 일본인들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은 묘했다. 물론 일본의 우경화된 정부는 전혀 그렇지 못하지만 말이다. 당시 그 자리에는 사장님 부부와 나와 아내 그리고 유치원생이던 아이가 함께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주 아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게도 올해 초 성인이 된 아이는 민폐를 끼치며 사는 부류에는 속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런 부류를 혐오했다. 너무 바른생활을 고집해서 오히려 걱정이 된다. 요즘 사회에는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임기응변에 능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게 될 날이 오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대책 없고 야무진 희망이긴 하지만.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자주 If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나의 과거들은 물론이고 사회 문제까지 머리가 아플 정도다. 만약 지구 상에 종교가 없었더라면, 만약 코로나 발병 초기부터 교회들이 솔선수범을 했더라면, 만약 신천지가, 만약 사랑 제일교회가, 만약 교회들이 십일조 등 돈에서 자유로웠더라면......,

요즘 특정 종교집단이 도마 위에 올라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도마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통한 무한한 사랑이나 자비를 통해 인간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쯤은 초등학생도 아는 진리다. 하지만 신앙인들의 행동에서는 사랑이나 자비 따위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오직 분열과 갈등과 증오만이 보일뿐이다. 시기와 질투 정도라면 봐줄 만하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한 채 무섭도록 아찔한 혐오로 무장한 영혼들은 어디가 예배당이고 어디가 일상의 공간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종교에서 사랑과 자비는 온대 간데없고 돈과 불신과 분열과 비방과 고성과 폭력만이 오고 간다. 신실한 믿음과 정직함 따위는 없어도 천국에 가는 티켓을 거머쥘 수 있다고, 그 티켓만 거머쥐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궁극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만든다. 나는 학교 후배와 함께 그녀가 다니는 서울 동남부의 모 대형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코로나가 막 창궐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신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층부터 몇 층까지인지는 몰라도 본관 1,2층을 제외하고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예배를 드렸다. 나는 5층에서 예배를 드린 것으로 기억한다. 대형 스크린에는 목사님의 열변을 토하는 듯한 설교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침이라도 튀길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대부분의 예배 절차나 방식은 특별하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한국 교회다웠다. 식사 후 같이 식사를 하는 것까지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십일조나 특별 헌금에 관한 언급이 예배 도중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단 한 가지를 빼고는 말이다.

그 한 가지는 "통성기도"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통성기도에는 정치색이 노골적으로 등장하곤 했다. 나를 그 교회로 인도한 학교 후배는 북한 김정은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라고 했다. 5분이 넘는 통성기도에서 목사님은 지속적으로 정권과 정부를 비난하고 온갖 분열과 불안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랑과 자비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단어들이 난무했다. 내가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가 더 이상 아니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예배 시작할 때도 끝날 때도 통성기도를 통해 교회는 거대한 통곡과 울음이 난무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영국의 교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 모인 사람들처럼 울부짖었다.

예배에서 Why?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목사님들이 하는 말씀은 모두가 당연한 진리였다. 아멘이나 주여, 아버지 또는 할렐루야라는 단어들이 목사님의 말씀을 신성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이비 신도인 내가 보더라도 목사님의 말씀은 펙트 체크를 해보면 가짜 뉴스도 섞여있었다. 그 자리에서 검색을 해도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지만 아무도 Why?라는 토를 달지 않았다. 모두가 하나의 몸처럼 생각했고 행동했다. 집단 세뇌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나도 매주 예배에 참석해서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받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조직을 비판하거나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왕따는 물론이고 조직에서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에겐 과연 그런 용기가 있었던가. 내가 교회나 절이라는 종교를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는 한 것일까.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신실하고 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상처를 입을까 봐 조바심이 나는 내가 말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현생 인류가 절멸하지 않고 살아남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들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했던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에릭투스 등의 다른 종족들을 이기고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였다고 설명한다. 집단이 소통할 수 있는 최소 단위는 어느 종족이나 유사했다. 보통 군대의 대대 단위인 500명을 넘지 못한다. 종교가 없던 다른 종족들에 비해 사피엔스는 자신들만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다른 사피엔스와 소통하며 유대감을 제공했다.


낯선 종족을 만나면 적인지 아군인지는 그들이 믿는 신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휴대폰도 이메일도 편지도 없던 시절의 신분증은 그들이 믿는 신이었던 것이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종교를 통해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사피엔스는 천하무적이었고 덕분에 다른 6개의 종족들은 절멸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멸종! 한마디로 씨가 마른 것이다. 공룡이 멸종하듯이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릭투스 등의 종족들이 멸종된 것이다.

살아남은 현재의 사피엔스들은 불멸을 꿈꾸며 신의 영역까지 넘보게 되었다. 이제 인류가 멸망할지 아니면 더 진보할지는 우리의 과제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직면한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이 심상치 않은 이유다. 우리 사피엔스들은 언제까지 기고만장한 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기술력이 바이러스의 전파력과 변종 속도를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 만에 하나 따라가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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