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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말벌을 안락사시키며..

인간은 왜 타인이나 타 생명체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할까?

by 런던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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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 꿈틀. 비틀거린다. 좌우로 넘어지며 중심을 잡지 못한다. 뒤집어지며 날개를 퍼덕거리기도 한다. 그 순간에도 꼬리를 세워 방어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방어자세는 죽어가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말벌의 본능 이리라! 말벌의 죽어가는 모습은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잔인하긴 했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말벌의 얼굴 근육들은 마치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해 표정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악을 쓰고 비명 소리를 질러대며 최후의 고통과 사투를 벌일 수도 없다. 입을 벌려 아주 작은 신음소리조차 흘려보낼 수 없다. 신음소리를 내지만 인간인 내가 듣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안타까웠다. 곤충이라는 종에서 나름 완벽한 하나의 생명체인 말벌이 죽어가는 모습을 내가 직접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말벌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죽음이 임박하고 있다. 어떻게 손을 써볼 방법은 없는 것일까. 지켜보면서도 살려낼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모기 퇴치제인 홈키퍼라는 살충제를 너무 많이 뿌렸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저 생명체의 고통을 끝내주는 것뿐이다. 고통스럽지 않게 죽게 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오랫동안 지켜보다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안락사를 시키지 않으면 지켜보는 내가 고통스러워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없다. 말벌의 마지막 모습이 며칠간은 눈앞에 아른거릴 것 같았고 그때마다 나는 나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중의 펜션에는 온갖 곤충들이 날아든다. 밤이면 불빛을 보고 날아드는 곤충들의 열정 가득한 파티가 벌어진다. 하지만 아침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죽어있거나 죽어간다. 곤충이 사지를 비틀며 죽어가는 모습은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죽어보지 못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죽어갈 때의 모습도 저렇게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이미 신체의 여러 기관들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 오히려 고통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저 죽어갈지도 모른다.

살아있음을 마지막으로 느껴보려는 말벌의 몸부림은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처절해 보였고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심장이 펌프질을 하고 멈추어 서는 그 순간이, 마침내 온몸에서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며 육신과 정신이 멈추는 그 순간이, 허무와 정막이 다가서기 이전에 말벌의 고통을 끝내주어야만 했다.


먼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를 악물고 신고 있던 슬리퍼로 말벌을 힘껏 짓눌렀다. 너무도 작은 생명체여서 "우지직"이나 "퍽" 따위의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끝이 났다. 방금 전까지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하던 그 생명체는 납작해졌다. 재활용을 위해 밟은 플라스틱 페트병처럼 납작해진 사체를 내려다본다. 뇌와 내장이 터져 나와서 찐득거렸다. 고통을 사라지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뿐이었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잔인함을 느껴야만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심폐소생술을 해서 말벌의 입안으로 산소를 불어넣을 수도 없었다. 기분이 참 그랬다. 슬프다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종의 자기기만과 위선이 느껴졌을 뿐이다.

어제 점심 무렵이었다. 펜션의 사용하지 않는 유리 현관 위쪽으로 말벌들이 모여들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벌들이었다. 말벌들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방으로 달려가 홈키퍼라는 살충제를 들고 나왔다. 겁을 잔뜩 먹은 채 유리문의 틈 사이로 살충제를 마구 뿌려댔다. 대량살상이라는 만행은 순식간에 자행되었다.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하고 행동으로 옮겼는지 모르겠다. 내버려 둬도 당장 벌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틈조차 없었다. 아무튼 무지막지하게 홈키퍼를 분사해댔고 벌들은 바닥으로 떨어져 죽거나 도망쳤다. 사건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녁까지 살아서 고통스러워하는 한 마리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아래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올라와서 양치를 하는데 말벌 한 마리가 아직도 살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무려 여섯 시간 이상을 죽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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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그 생명체 중의 한 "종"일뿐이다. 약육강식의 세계가 비단 동물이나 곤충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종인 인간들 사이에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이웃 간에, 종교 집단 간에, 정치나 경제적 이해관계 사이에서 반목하고 상대를 밟아 뭉개려 한다. 죽고 죽임을 당하는 일은 전쟁터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공정하지 못한 자유시장경제의 틀에 갇혀 꼼짝달싹하지 못한다. 미래도 희망도 없다. 총성 없는 전쟁터가 실제 전쟁터보다 더 살벌하고 잔인하다. 그나마 실제 전쟁터에서는 비슷한 무기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은 나눌 생각보다는 하나라도 더 가지려 발악을 해댄다. 자본주의라는 그럴듯한 패러다임을 들이대며 말이다. 아직도 하루에 1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수 억 명을 넘는다고 한다. 우리가 제3세계라 부르는 최빈국들의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생존을 위해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입고 먹고 마시고 살아간다. 고통이 당연한 일상이 되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역설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대부분의 것들이 이미 결정되어 버린다. 삶에서 선택할 수 없는 요소들이 이미 한 개인의 미래를 결정한다. 한 개인이 태어날 나라도, 부모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사유 재산을 축적할 수 없는 동물이나 곤충의 세계에 비하면 평등이란 단어조차 꺼내기 민망할 정도다. 단지 우리는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종교의 경전들에는 그것만이 선이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삶에서 느끼는 끊임없는 고통은 무시한 채 말이다. 그 고통이란 불청객과 같아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든 불쑥불쑥 찾아온다.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온 가족을 잃고도 온전히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또한 신의 뜻일까.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천차만별이다. 허무나 염세로 인한 무력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통이다. 대통령이나 재벌그룹 총수의 자녀라고 그 고통을 피해 갈 수는 없다. 1941년 봄에 영국의 우즈 강에서 투신한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소설 곳곳에서 "자살"이라는 단어를 수 차례 반복하며 자신의 죽음을 암시했다. 그녀는 런던 하이드파크 인근의 켄싱턴이라는 부촌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록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겪었지만 그녀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울프는 끊임없이 내면의 세계를 탐닉하며 여러 가지 자아와 충돌한다.


어쩌면 그녀가 느꼈던 세상이라는 것은 그녀 주변 사람들이 끊임없는 자기 연민이나 자기기만의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외에는 진실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인간은 삶과 죽음, 정상과 비정상의 세상에서 영원히 공존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요즘 한국 사회의 단면을 케이크 자르듯이 잘라보면 이러한 현상들이 잘 드러날지도 모른다. 정상이 비정상에 묻히게 하려는 극소수의 세력들에게 현혹당하는 일반 대중들이 안쓰러울 뿐이다.


인간은 고독하다. 죽음엔 깨달음이 있다. (중략) 그리고 또 오늘 아침에도 공포감을 느꼈다. 무겁게 짓눌리는 무력감, 부모님한테서 받은 이 생명을, 가르침을 받은 대로 최후까지 살고, 조용히 계속 보존해 나가는 일은 아주 힘들다는 기분이 요즘도 곧잘 경험하는 일이지만 마음에는 깊은 공포감이 숨어 있는 것이다. 리처드가 "타임스"를 읽으면서 곁에 있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작은 새처럼 겁먹고 있던 이 몸에 생기가 돌아, 마른 가지와 마른 가지를 맞비벼서 그 한없는 기쁨을 불타오르게 하는 거라고 격려해 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불안이라는 난을 피하긴 했으나 그 청년은 제 손으로 생명을 끊은 것이다.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P285>


영문도 모르는 채, 갑자기 이상한 아저씨기 뿌려댄 살충제를 흠뻑 마시고 여섯 시간 이상을 고통스러워하며 바둥대던 말벌이 죽었다. 아니 내가 죽였다. 어차피 우리는 공존할 수 없는 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은 플러그를 빼거나 스위치를 끄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통증이라는 고통과 싸우며 우울 속으로 빠져들 때마다 그저 살아 있음만으로도 감사하려 애쓴다. 이렇게 살아서 책을 읽고 자판도 두드리는 일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심장 박동이 뛸 때까지 이러한 축복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안의 진실을 부여잡으며 고통과 싸우지만 결코 그 끝을 앞당길 생각도 두려워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하루가 금쪽같은 이유다.

나에게 안락사당한 말벌의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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