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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Oct 02. 2020

영국 아이들은 18세면 독립한다.

어려서부터 독립을 준비하는 영국의 아이들


Hello, how are you?

 (아빠) 안녕 어떻게 지내? 이게 다였다. 며칠 전 늦은 밤에 런던의 아들에게서 아빠의 안부를 묻는 톡이 왔다. 오랜만이어서 무척 반가웠다. 설레는 마음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톡을 살짝 열어보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더 이상 없었다. 하다못해 런던은 지금 가을이 깊어 비가 자주 내린다거나, 아침저녁으로는 상당히 춥다든가,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의 Son이 South Hampton과의 경기에서 네 골이나 몰아넣은 경기를 보았느냐든가, 나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동생인 15세의 검은 고양이가 여전히 쥐를 자주 잡아온다든가, 새로 시작한 컬리지 생활이 어떻다든가, 지난해부터 타고 다니던 자신의 중고 폴로 자동차가 잘 굴러간다든가, 영국의 코로나 환자가 수천 명대로 연일 고공행진을 하고 있어서 조만간 제2의 록다운(lock down)이 우려된다든가 등의 이야기도 모두  생략한 채 말이다. 


 아이는 이번 해에 만 18세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만 18세의 생일은 아주 중요하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1000파운드짜리 싸구려 중고차도 사서 직접 운전하고 대학 학비도 본인이 융자를 받아 해결한다. 부모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부모의 도움을 바라지도 않는다. 수학의 정석처럼 영국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당연히 여기는 일이다. 성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과정은 부모로부터 경제 문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분명 아이였는데 갑자기 성인이라 생각해서 어른처럼 행동하려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사실 겁도 조금 났다.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되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칼리지에서 파운데이션 코스를 하고 있다. 아빠라고 해서 어느 대학에 갈지, 전공은 뭘로 할지, IB Result는 어떻게 나왔는지 묻지 않았다. 참고로 IB 프로그램은 미국과 영국 일부의 대학에 갈 수 있는 시험 제도다. 영국에서는 주로 A레벨을 통해 대학에 진학한다. 

 부모라고 해서 어떤 도움이나 조언을 해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이가 오해할 정도로 무심한 척했다. 어쩜 우리 아빠는 고3 수험생이었던 자기에게 대학이나 시험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을까. 심지어 전공은 뭐로 할지, 대학 졸업 후 어떻게 살아갈지도 말이다. 가끔 아이가 먼저 대학 이야기를 꺼내면 아빠로서의 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너의 결정을 믿는다. 네가 알아서 해라. 네가 원한다면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된다. 창업을 해도 좋고 가게일을 배워서 물려받아도 좋다."
 

 영국에서 18세의 아이들은 성인으로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도 져야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시원하기도 하지만 서운하기도 하다. 이 시기의 자녀를 둔 부모는 빈집 증후군과 유사한 우울을 경험하기도 한다. 대신 반려묘나 반려견이 아이의 부재를 채워준다. 집집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경제 독립이 시작되면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도 없다. 대학도 결혼도 육아도 모두 알아서 한다. 부모나 시부모가 나서서 잔소리하고 뭔가를 도와주며 부모 행세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명절이라고 제사를 지내며 받는 극심한 스트레스도 없다. 영국에서의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모든 것이 슬플 정도로 쿨하다. 
 
 올해 1월 말에 무릎 수술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혼자 지내는 아빠가 걱정이 되었는지 아이가 잠깐 다녀갔다. 1주일을 같이 지냈지만 그 절호의 기회에도 아이가 영국의 어느 대학에 진학할지, IB 성적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는지, 꿈은 무엇이고 전공은 무얼 택할지 등에 대해 묻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때가 되면 알 것들이기 때문이다. 부모라고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고 특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꿈이 무엇인지, 전공은 무슨 과를 택할 것인지, 학교는 어느 대학을 지원할 것인지 등을 자꾸 물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아이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영국의 교육을 받았다. 영국의 아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한다. 육아 전쟁을 치를 때는 그날이 언제 오나 했는데 막상 그날과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다. 아이가 독립할 나이가 되면 부모는 이미 나이를 먹어 중년이 되어버린다. 한 세대가 뒤로 한 발짝 물러가고 새로운 세대의 미래가 열린다는 것은 기쁜 일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거기에도 특정 지을 수 없어서 걸러지지 못하는 슬픔이 숨어있었다.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아내는 아이의 독립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형제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아이여서 더욱 걱정이 되고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사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주 만날 수 도 없는 처지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농담 반 진단 반으로 아내는 자주 아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곤 했다. 그 제안은 같이 계속 사는 것이었다. 특히 결혼해서도 같이 살자고. 아들이 결혼을 하면 부부가 맞벌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가장 큰 문제는 육아다. 같은 집에 살면서 육아에 도움을 주겠다고 꼬드겨도 아이는 "No No No No~~~"를 외치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결단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예 못을 박아버렸다.


 갓 중학생이 된 녀석이 이처럼 강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는 처음이었다. 아내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좀 생각해 보겠다거나, 엄마의 뜻은 알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거나, 미래의 아내가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건 좀 곤란하다는 등의 변명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 제안을 몇 번 했지만 매번 같은 답변인 "No No No No~~~"가 돌아올 때마다 아내의 표정에는 묘한 슬픔이 묻어났다. 

 아내의 슬픔은 단순히 슬퍼서만 나타날 수 없는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슬픔이었다. 언어의 영역에서 분류되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단어처럼, 슬픔이라는 단어도 쉽게 분류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벌써 이렇게 자라서 독립적인 자아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매일 보아도 어린아이였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서 엄마의 마음에 작은 상처를 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아내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슬픔은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슬픔이란 기쁨과는 달리 그런 묘한 속성이 있는 것이다. 기쁨을 설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대학에 합격했다든가, 취직을 했다든가, 아이의 여자 친구가 생겼다든가, 생각지도 않은 돈이 통장에 입금되었다든가 처럼 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슬픈 존재다. 쇠함과 사라짐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지낸 존재다. 인간의 삶이란 조금씩 사라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호모 트리스티아(Homo Tristia). 삶의 깊이란 곧 슬픔의 깊이다. 그 깊숙한 곳에 우리가 놓쳐버리는 무수한 슬픔의 아름다움이 있다. 반면 웃음에는 깊이가 없다. 아무리 파고 들어가도 한 번의 파안대소로 끝나버린다. 삶은 절대 웃음으로 규정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슬픔과 그것이 만드는 아름다움의 깊이로 규정된다.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의 서문. 량윈다오 저, 김태성 역, 흐름출판>  


 요즘 몇 주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다발성 말초신경들이 온몸에서, 특히 팔과 다리와 엉덩이에서 심하게 바늘이 되어 찔러대고 전류를 흘려보내  전기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지난주부터 너른 들판의 절반은 황금색으로 나머지 절반은 흰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벼가 누렇게 익고 하얀 메밀꽃이 눈처럼 피어나서 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봉평의 메밀밭이 떠올랐다. 비록 지자체에서 해마다 봄이면 유채를 가을이면 메밀을 심었지만 그 꽃들은 더 이상 관광객을 유혹할 수도 유혹해서도 안 되는 금단의 꽃들이 되어버렸다. 봄의 유채밭에서도 가을의 메밀밭에서도 슬픔이 뚝뚝 묻어날 뿐이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밤마다 볼래 거대하게 펼쳐진 메밀밭에 다녀온다. 꽃이 아닌 메밀을 위해 심어졌다 해도 그 아름다움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봉평의 메밀밭처럼 물레방앗간은 없지만 애잔한 슬픔만은 100년이 흘러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길게 답장을 했다. 8시간의 시차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쯤에 런던은 아침을 맞이하고 아이는 아빠의 답장을 읽을 것이다. 이제는 아이와 아빠로서가 아닌 남자와 남자로서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기쁨은 일시적이고 슬픔은 제법 오랫동안 지속되는 특성 때문일까. 아빠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도 아이는 알지 못한다. 그저 허리 디스크가 문제가 좀 있다고만 알고 있다.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제 막 독립하는 아이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는 것 같아서 그저 침묵하고 있다. 세월이 좀 흐르고 때가 되면 아이도 알게 될 것이다. 그때는 슬픔이 아닌 익숙한 질병이길 바랄 뿐이다. 코로나가 익숙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출처 : BBC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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