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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Sep 24. 2020

BTS에게서 배우는 삶의 철학  

Life goes on, 삶은 지속된다. 삶의 의미나 무게가 어떻든.

 Life goes on! 삶은 지속된다. 비록 다발성 말초신경병이라는 희귀 난치성 질환자로 살아도 말이다.


 어젯밤에 무시무시한 전신 통증이 한차례 밀려들었다. 이를 악물고 견뎌보지만 소용없다. 방금 샤워를 했지만 온몸에 땀이 흐를 정도로 젖어들었다. 어젠 정말로 걷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어제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월출산 국립공원의 둘레길을 걸었다. 천황사 주차장에서 산성대 탐방로 입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였다.


 산의 둘레길거리는 왕복 10킬로미터 정도였다. 탑동 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셨던 1분 정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쉬는 시간 없이 정확히 두 시간을 걸었다.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오직 걷는 시간만이 삶의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통증이 몰려오는데도 불구하고 걷고 또 걷는다. 걷고 나면 시원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문제는 언제나 통증이다. 허리와 엉덩이와 다리의 통증이 심하게 몰려온다. 서 있어도, 앉아있어도 심지어 누워있어도 통증은 가시지 않는다. 약을 한 주먹 먹어도 소용이 없다. 순간 극심한 우울이 밀려오고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충동이 함께 밀려온다.


 그렇다고 걷지 않을 수도 없다. 수시로 밀려드는 우울과의 싸움에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지쳐있기 때문이다. 우울을 떨쳐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운동뿐이다. 그래서 불나방처럼 불을 보고 뛰어든다. 너무나 높이 날아올라 날개의 밀랍이 태양열에 녹아서 에게해에 추락해 죽고 마는 이카로스처럼 말이다. 불안이나 두려움보다 먼저 밀려드는 충동은 언제나 짜릿하면서도 섬찟하다. 삶은 매 순간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는 것을, 그러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는 것을 머리는 잘도 이해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 몸은 항상 반항을 하고 저항을 한다. 가끔은 쿠데타를 원하기도 한다. 체재 전복을 원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쿠데타를 원한다.


 나의 몸을 이루는 셀 수 없는 세포들의 몇 프로가 진정한 나일까. 뼈와 피 정도는 나라는 것을 알겠지만 보이지 않는 신경들과 세포들은 더 이상 내가 아닌 녀석들이 많지 않을까. 그래서 체재 전복을 기도하려 꼬드기는지도 모른다. 삶은 오늘로서 충분하다고, 이젠 반 백 년이나 살았으니 더 이상 미련 없다고,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삶에 그토록 집착하냐고, 이젠 통증으로부터 나의 세포들을 해방시켜주자고, 자유로운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매일 부추긴다. 그 유혹의 달콤함은 금단의 사과만큼이나 치명적이다.  

 나는 다 알고 있다. 이 모든 거짓말과 망상, 비겁함과 나약함을. 이것들은 마치 염료 같아서 도시 전체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무수한 장면과 우연한 만남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우리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연일 뿐이다. 꽉 움켜쥐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그것을 아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p16. 량윈다오 저, 흐름출판>  



 우리는 각자 저마다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가 있다. 그 무게는 개인마다 그리고 매 시간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어떤 때는 깃털처럼 가볍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기도 하다. 항상 절대적이지도 그렇다고 상대적이지도 않다. 어쩌면 그 무게는 죽는 마지막 순간에야 내려놓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는 천사의 날개와 비슷한 것이 양쪽 어깨에 놓여있다. 보이지 않는 저울추들이 그것이다. 그 저울추들이 육중해질수록 어깨는 처지고 허리는 꾸부정해지며 하체에는 힘겨워한다. 유치원생부터 80 노인까지 이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날아갈 듯이 가벼운 상태가 지속되다가도 갑자기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이 엄습해 오는 것이 일상이고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요즘 밖으로 나가보면 너무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계절이다. 비현실 속에서나 만날 것 같은, 그래서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가을날의 풍경들이다. 세상의 고난이 어떻든 간에 개인의 삶이 어떻든 간에 계절은 또다시 바뀌었다. 끈적거리는 습도에 생각이 녹아내렸고 지속되는 폭염에 몸은 저항을 포기해가던 찰나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악을 쓰던 매미들은 자취를 감추고 아침저녁으로 풀벌레들의 노래가 맑고 깊어진다. 하지만 이 좋은 계절이 나에겐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몇 주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통증이 지속되면서 극심한 우울 속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심한 통증이 몰려올 때마다 삶의 끈을 그만 놓아주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자주 일었다. 그래도 살아내야만 할 삶의 의미를 애써 찾아보지만 매번 실패했다. 사실, 삶의 의미 따위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에 더욱 절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항상 역설로 가득하다.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으로 나왔지만 삶은 나의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점도 어찌 보면 역설이다. 당연하지 않은 것의 당연함이랄까! 당연하지 않지만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니 인정해야만 하는 삶의 역설들.



 어느 사회나 이유를 막론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낙오자나 실패자 심지어 패배자로 분류되고 만다. 특정 종교에서는 위로나 애도는 고사하고 무시무시한 저주와 증오를 퍼붓기까지 한다. 얼마만큼 고통스러웠으면 삶을 내려놓으려 했을까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사람 노릇 하면서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연사하는 그날까지 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것쯤은 아이들도 안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남의 일들은 이처럼 가벼워지고 경박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진리이고 진실이기도 하다. 즉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작은 상처나 고통 없이도 세상이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모든 현실세계의 시계는 그러한 것 없이는 절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기대수명까지 살아서 자연사하는 사람들이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비정상이라 치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연사하지 못하고 비정상으로 죽어갔는지 모른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지만 가장 큰 것은 가난과 질병과의 전쟁이었고 실제로 이 두 가지 이유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 오는 것은 같지만 개인이 느끼는 상실감이나 절망감이 주는 상처나 고통은 상대적이다. 누군가는,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무게들을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었고 죽어갔다.  사고로 일가족 전체가 비참하게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우리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나의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같은 날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이 나에게 닥쳐온다면 과연 나는 온전한 정신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반인들처럼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마저 측정하려 들고 평가하려 든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죽을듯한 우울감이 밀려들면 어찌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토록 어두운 터널에 세상을 지어놓았는지 모른다. 비록 믿지는 않지만 신을 신랄하게 탓해보기도 한다. 왜 나에게만 이러한 고통을 주었냐가 아니고 인간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어도 되느냐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너무도 복잡해 보였고 삶은 알 수 없는 미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삶의 의미 따위를 찾아내는 일은 애당초 헛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의 초입까지 심하게 방황을 했다. 마치 무시무시한 악몽을 꾼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도 악몽을 꾸긴 했다. 지금도 수면제가 섞인 우울증 약 없이는 잠들지 못한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여섯 알이나 되는 그 약을 먹고 잠들면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닌 듯싶다. 가끔 가위에도 눌리고 악몽에 시달리지만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한다. 약 기운이 사그라드는 아침이 되어야만 깨어날 수 있다. 매일매일이 악전고투의 나날이었다. 솔직히 더 이상 살기 싫었다.


 그런데 반전이 생겼다. 삶은 그리 복잡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어제 BTS 멤버들이 유엔 연설의 마지막에서 Life goes on이라는 말을 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심한 충격을 느꼈다. 세상에 이처럼 단순한 진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렇게 젊은 친구들조차 철학자 못지않은 자세로 음악에 임하는데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Life goes on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반성하고 깨달았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이름을 나에게 불러주었다.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지속되고 있다. 누구에게나 분명 불안하고 두렵다. 공간의 자유를 빼앗겨버린 삶이 주는 공포감은 대단했다. 심지어 생각이 뒤틀리고 세상이 휘청거리듯 왜곡되기도 한다. 우울이라는 감정은 정말 무섭고 두렵다. 어차피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다. 우울하게 지금 이 순간을 보내도 행복하게 보내도 시간은 흘러간다. 어제의 나나 한 달 전의 나를 돌아봤을 때 행복했던 모습보다는 우울했던 모습이 압도적으로 많다. 공간도 모자라 감정까지 낭비할 이유가 없는데도 같은 실수를 매번 반복하고 만다. 때로는 내 모습이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삶은 피폐해져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Life goes on! 삶은 지속된다.  Life must on! 아니, 삶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어차피 세상의 중심은 대통령도 재벌 총수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소멸하는 순간 세상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의 우주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어젠 처음으로 나와 마주했다. 극심한 통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BTS 멤버들이 가진 철학 때문이었다. 그들의 말은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나는 분명히 그들이 했던 철학적인 말의 힘을 느꼈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았다.. 왜 세계가 BTS의 음악에 열광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에도 그처럼 심오한 위로와 철학이 들어있고 전 세계인을 위로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비록 음악에는 문외한이지만 어제 처음으로 BTS 펜이 되었다. 내년쯤에는 아마도 아미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삶은 지속된다. 나 자신을 사랑하면 가족은 물론 나랑 상관없는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 종교의 벽도 넘어설 수 있다. 나아가서 국경 밖의 사람들도 사랑하게 된다. 정치인도 아닌데 굳이 타인을 혐오하면서까지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극심한 통증이 밀려와도 젊고 멋진 BTS를 생각하며 견뎌내고 싶다. 음유 시인이자 철학자 같은 그들의 마법에 빨려 들고 싶다. 그래서 통증도 그로 인한 깊은 우울도 이겨내고 싶다. 아울러 멋진 계절과 데이트도 하고 싶다. 마음이 아름다운 여인과도 말이다. 그러려면 나 자신부터 사랑하고 나 자신부터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 주어야만 한다. 그렇게 삶은 지속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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