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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Sep 10. 2020

주어진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1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모로코의 어느 식당에서의 깨달음


 가끔은 삶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꽤 용감한 척 살아왔지만 사실은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남자였다.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고 뒤끝 또한 오래갔다. 소송 같은 송사에 조금이라도 관여되거나 직접 휘말리면 겉잡을 수없이 무너져 내렸다. 겉으로 강한 척하면 할수록 내면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비례해서 커져갔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나의 삶을 자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곤 했다.      


 모든 중차대한 인생의 판단과 결정들이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해온 것처럼 꾸며댔다. 어떠한 고난이나 역경에도 결코 굴복하거나 무너질 내가 아니라는 자기 암시에 진절머리가 났다. 스스로의 모순과 위선에 치를 떨다 보니 현실에서 한 번쯤은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 길만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용기가 필요했다. 몇 가지 선택지 앞에서 심사숙고하면 할수록 겁쟁이가 되어가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두려움이란 감정들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나를 지배하며 심지어 갉아먹기도 했다. 지금은 그저 지나간 추억거리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제법 급박했다.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허둥대고 있었다. 그깟 작은 소송들이 뭐라고.


 

모로코 수도 라밧 메디나의 간판도 메뉴판도 출입문도 없는 식당 전경 모습이다. 먼지가 잔뜩 쌓인 벽돌로 만든 가파른 2개의 계단을 올라서야만 식당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 이참에 아프리카로 날아가 보자.


 3년 전이었다. 런던의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8월 초였을 것이다. 런던의 어느 펍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변호사로부터 텍스트가 날아왔다. 내일 미팅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지면서 비상구가 생각났다. 나는 다급하게 검색질을 했다. 저가항공사인 easy jet 사이트를 검색해서 들어갔다. 마땅한 피신처가 될 만한 유럽의 도시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가보지 않은 도시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유럽의 어지간한 도시들은 이미 아들 녀석 하고 다녀온 터였다. 그러고 보니 많이도 돌아다녔다. 비교적 덜 알려진 도시들은 easy jet이 취항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런던에서 좀 더 멀리 도망처 보는 것은 어떨까.


  검색을 계속하다 보니 북아프리카의 도시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모로코라는 나라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베두인족 출신의 친구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 전화번호도 몰랐다. 연락처도 모르면서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우린 가끔 페이스북으로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전화번호가 필요 없었다. 그 베두윈족 친구는 언제든 좋으니 모로코에 한번 날아오라고 했고 그때마다 나는 영혼 없이 sooner or later(조만간)만 남발해왔다. 그런데 마침내 때가 온 것이다.


식당의 주인장 부부의 요리하는 모습이다. 움직이기에도 쉽지 않은 크기의 주방 겸 홀이다.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가지를 손질하고 있는 사장님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그래. 거기야. 카사블랑카로 당장 날아가자. 카사블랑카에서 친구를 만나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꼭꼭 숨으러 도망치는데 친구가 없으면 또 어떤가. 생각하면 할수록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는 내가 한동안 숨어 지낼 수 있는 최적의 도시였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와 그가 살고 있는 카사블랑카가 마침내 내 의식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주저할 것도 없이 런던 남쪽의 개트윅 공항에서 출발하는 카사블랑카까지 왕복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했다.  


이 작은 식당이 얼마나 오래된 노포인지를 가늠케 하는 선반 냉장고다. 비록 찌든 때가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이상하게도 불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망치는 여행도 여행이랍시고 설레다니!  


 예약과 동시에 친구에게는 페이스북과 메일을 통해 나의 항공일정과 호텔 이름을 알려주었다. 휴대폰 번호도 추가로 알려주었다. 친구로부터 답장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마음은 카사블랑카에 가 있었다. 언젠가는 카사블랑카에 가보리라고 다짐했지만 항상 마음뿐이었다. 카사블랑카에 가면 무언가 특별함이 있을 것 같았다. 유럽에서만 방황하던 나의 지친 영혼이 드디어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여행이랍시고 벌써부터 설렌다.  


 미니 캡을 예약하고 휴대폰 알람을 새벽 4시 반으로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들기 전에 메일들을 정리했다. 급한 것들은 짧게 답변을 했고 나머지는 무시했다. 변호사에게는 아프리카에서 몇 주 쉬다 오겠다는 메일을 남기고 허리를 침대에 눕혔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은 익숙해진 지 오래다. 결국은 수면유도제를 몇 알 먹고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식당의 밝은 부분이 출입문이다.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못하지만 주어진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사장님 부부의 모습을 보자 탐욕으로 가득한 나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부끄러워졌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예약한 미니 캡이 도착했다. 아침 8시에 출발하는 easy jet 비행기를 타려면 새벽에  움직이는 수고가 필요했다. 저가 항공들은 새벽이나 밤늦게 움직였다. 공항도 집에서 가까운 런던 히드로 공항이 아닌 런던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지방 공항들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보다폰은 유럽은 자동 로밍이 되었지만 아프리카는 별도의 로밍 신청을 해야만 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시간이 남아 로밍 신청을 했다.     



저 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1주일간 묶었던 쉐라톤 카사블랑카 호텔에서 아침마다 먹던 빵보다 훨씬 맛있었다. 빵의 본고장 리스본에서 먹던 빵맛이었다. 천상의 맛!


 8시에 출발하는 easy jet은 한 시간 반이나 딜레이 되어 9시 반에야 겨우 이륙할 수 있었다. 비행기는 8시가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출발할 비행기가 아직 도착도 안 했다고 한다. 8시 반이 다 되어서야 우리가 탈 비행기가 착륙해서 모습을 보였다. 금방 도착한 비행기는 허겁지겁 손님과 짐을 동시에 토해내고 있었다. 청소까지 끝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방송이 이어졌다. 어이가 없었다. 불만 있는 고객들은 환불해준다고 했지만 다들 그냥 앉아있었다. 딱히 만날 사람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카사블랑카에 90분 늦게 도착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분은 꽤나 지루했다. 책을 읽고 폰에 얼굴을 처박아도 시간은 더디 흘렀다. 그만큼 런던이라는 도시가 진절머리가 났던 모양이다.     



모로코 라밧 메디나의 간판도 메뉴판도 없는 식당의 좌석과 내가 먹은 모로코 음식들. 이 테이블이 식당에 있는 유일한 테이블이다. 2인용인데 네 사람이 오면 두 사람은 서서 먹는다.


 무슨 혹성 탈출도 아닌데 마치 런던을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easy jet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승무원은 오렌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고 나이키 신발을 신었다. 참 편한 복장이다. 여행 가는 나보다 더 편하게 입었다. easy jet은 마침내 이륙했다. 시간을 보니 아침 9시 30분이었다. 기내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 먹었다. 잠깐 눈을 부치기 무섭게 곧 카사블랑카 공항에 착륙한다는 캡틴 아저씨의 중저음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현지 기온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음이었고 기온은 39도라고 했다. 시간을 따져보니 3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고추튀김은 애피타이저, 샐러드와 청어 튀김은 메인, 가지 튀김은 디저트다. 저 청어 튀김은 얼마나 바삭하고 고소했는지 모른다. 맛있는 음식이 나를 구원해주고 있었다. 황홀했다.


 그래 1주일만 머리의 전원을 플러그에서 빼고 쉬어보자!


 마침내 easy jet은 카사블랑카 공항에 도착했다. 착륙 전에 내려다본 모로코는 광활한 사막과 역시 광활한 바다만 보였다. 사막을 사이에 두고 도시들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나 철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비행기는 착륙한 지점에서 계류장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활주로에서 내려걸어 들어와야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사막의 열풍이 모래바람과 함께 흙먼지를 난리며 90분이나 딜레이 되어 심술이 난 승객들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문명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단절된 아마존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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