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남자 Nov 10. 2020

위험하게 살기 위해 런던으로..

나는 왜 갑자기 한국을 떠나려 하는 것일까?


 인생을 위험하게 살아라!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이다. 이 말이 이렇게까지 피부에 와 닿을 줄 몰랐다. 사실 지금 런던은 아비규환 수준이다. 지난주 목요일부터  2차 Lock down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부터 나는 다시 런던에 있게 될 것이다. 나의 오랜 삶의 터전인 런던으로 돌아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삶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온갖 삶의 굴곡과 풍파를 헤쳐나가다 보니 어찌 된 일인지 이젠 그 전쟁터가 그리워졌다. 런던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나이 든다는 사실이 꼭 슬프거나 초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해내려는 듯 거침이 없고 싶다. 그래서 런던으로 돌아기기로 했다.



 치료 휴양차 한국에 와서 머물렀던 26개월의 시간들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라도 하려는 듯 여러 형태의 감정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그 시간들은 분명 나의 삶에 있어서 터닝 포인트가 되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설고 생경하기까지 하다. 어찌 되었든 한국에서의 세 번째 가을을 흘려보내며 그 끝자락을 부여잡으려 안달하고 있다. 마치 지난해 가을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비록 몸과 마음이 많이 무너졌어도 직까지 버티며 내 안에서 치열하게 생존해준 안쓰럽고도 고마운 감정들 덕분에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붙들고 있었나 싶다. 그게 뭐라고.


 살다 보면 감당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한마디로 압도당한다고밖엔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물론 손쉽고 편리한 사진도 있긴 하지만 사진이라고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희미해질 것이다. 예전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 인화된 사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막상 한국을 떠나려니 평소에 꼼짝도  하지 않던 소박한 욕심이 살랑살랑 일렁인다. 이 아름다운 계절을 몸에 새겨 넣고 싶다는 그 허황된  욕심이. 마치 몸에 문신을 새겨 넣듯이.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속 깊은 곳에 저장하고 또 저장해 본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말 돌담길을 자르고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싶은 날이다. 나는 몇 번이나 더 이 가을날을 볼 수 있을까? 눈이 부셔서 끝내는 슬픔이 망울망울 만들어지고야 마는 날을. 한국을 떠나며 이렇게까지 비장해져 보기도 처음이다.


 덕수궁이 아닌 창경궁 돌담길을 걸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 또 있을까 싶다. 비록 한때는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원이 되었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 그래서 더욱더 애착이 가는 곳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은 휴관이란다. 매표소 앞에서 서성이는 외국인들 틈에 끼어서 아쉬움을 뒤로 한채 돌담길을 걸었다. 가을 하늘이 푸르다 못해 시려 보였다. 



 런던의 길고 긴 겨울을 생각하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매일 구름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한 번이긴 하지만 해가 뜨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한국의 가을에 욕심을 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가하게 서울의 오래된 거리를 걷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단골처럼 다니던 병원의 약들을 장기 처방받기 위해 의사 선생님들께 영국의 상황을 일일이 다 설명해야만 했다. 운이 좋게도 어느 병원에서는 1년 치 처방을 해주기도 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약만으로도 기내용 트렁크에 가득 찬다. 제발 약의 도움 없이 살아보고 싶다. 환자 코스프레도 하루 이틀이지. 


 아프면 마음대로 병원에 갈 수 있는 이 멋진 나라를 두고 떠나려니 가슴이 무겁다. 영국에서는 절대 아프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미 병원들은 코로나 환자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것일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무진이라는 마을의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오후까지도 걷힐 줄 모르는 그 안갯속으로. 모른다. 정말 모르겠다. 인생이란 어차피 한 편의 길고 긴 꿈이 아니었던가. 어차피 모르기는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안개가 끼었든 걷혔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