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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01. 2019

테오도라 #4 제발 보이스 피싱이길..

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피로연장

     

눈 깜짝할 사이에 계절은 이미 5월에 진입해 있었다. 전주의 결혼식장에 도착하니 시계는 오후 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호텔의 주차장 타워 5층에 주차를 하고 차속에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어머니와 장인어른 사망 후 처음 입어보는 양복이었다. 서둘러 주차장 타워에서 내려왔다. 호텔 2층의 식장에서는 친구들과 신랑 신부의 웨딩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1층의 식당에 내려가니 하객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돌아갔고 가족과 친지들만  남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메뉴는 갈비탕이었다. 아는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일이 인사를 하고 늦은 사실을 무용담처럼 설명하였다. 나처럼 서울에서 출발해 늦게 도착하는 손님들이 하나씩 식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밖의 더운 온도와 달리 피로연장은 시원하였다. 오랜만에 맨 넥타이가 어색하고 답답하여 자꾸 넥타이와 목이 닫는 앞부분에 손이 갔다. 그러다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풀어버렸다. 어차피 결혼식은 끝이 났고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어졌다. 호텔 연회장은 원탁으로 이루어졌다. 하연 테이블보가 고급스러운 장소이니 격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풀어놓은 넥타이를 만지작거렸지만 다시 차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갈비탕 두 그릇을 비우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인사들이 오가고 신랑 신부가 촬영을 마치고 내려와 인사를 하였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면서 순간 파노라마처럼 아름답고 깊은 슬픔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어른들도 있는데 나는 주의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나의 한숨 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허공 속에 흩어져갔다. 하지만 회환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회환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느끼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다가 내 막내 동생 가족과 조우를 하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조카들이 많아 자라 있었다.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5만 원 지폐 두 개를 꺼내어 조카들 손에 쥐어주는 걸로 나의 마음을 전하였다. 뭐가 뒤틀려 서로 왕래까지 끊고 살아야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또한 그들의 삶의 방식 중 하나에 속하고 있었다. 내가 이해하고 아니 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탓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가시들에 찔리거나 긁혀 내성이 생기고 뒤꿈치도 아닌 곳들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둥근 테이블의 상단은 회전식으로 되어 있었다. 돌리면 원하는 음식이 내 앞으로 왔다. 하지만 별로 구미가 당기는 음식은 없었다. 갈비탕과 김치만으로 족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식사가 끝나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리고 신랑 신부의 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귀한 시간을 쪼개어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고마워해라 쯤으로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결혼식은 늦어서 보지 못하였지만 20년 전에 내가 했던 방식과 별반 변하지 않은 듯하였다.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듯한 특색 없는 결혼식은 20년이란 세월의 변화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결혼식 장변을 보지 못하고도 짐작이 가는 것은 왜일까? 이 또한 나의 고정관념이길 바라기에는 아직도 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씁쓸하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사건이 터진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한통의 전화

     

둥근 테이블에는 공교롭게도 테오도라의 가족들이 모두 앉아있었다. 바로 내 오른쪽 옆에는 어머니가 왼쪽으로는 언니들과 형부가 앉아있었다. 정면에는 작은아버지가 앉아계셨다. 아버지와 형님들은 다른 테이블에 계시는지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갈비탕을 두 그릇 비우고 초밥을 몇 개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들을 이어갔지만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디저트로 여러 가지 과일들이 나왔다. 아무도 손도 되지 않는다. 나만 주야장천 먹고 있었다. 갈비탕 두 그릇으로도 나의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아마도 무인도에서의 잠깐의 굶주림이 식탐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결혼식은 보지 못했지만 가족 친지들과의 만남에서 지극히 평범한 대화들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갑자기 사촌 여동생이 전화를 받더니 울면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테오도라가 죽었다는 것이다. 동작경찰서에서 경찰에게 걸려온 전화라는 것이다. 순식간에 식당은 울음바다가 되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동생의 전화기를 건네받아 수신된 전화번호를 확인하였다. 010으로 시작되는 휴대폰 번호였다. 어른들과 큰 형님은 보이스피싱일 가능성도 있을 수 있으니 확인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번호로 통화를 시도하였고  두 번째 만에 통화가 이루어졌다. 동작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여자 경찰이 맞았다. 테오도라의 정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보이스피싱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테오도라가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죽음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였다. 일단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급하였다. 사촌들은 전주역에서 입석표를 구해서 올라갔고 나는 테오도라의 어머니를 모시고 1시간을 달려 집에 도착하였다. 어머니는 울먹이며 장례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며 여기저기 연락하고 계셨다. 30분 정도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허리디스크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테오도라의 고향집에서 4시 반쯤 출반 한 나의 차는 4시간 만인 8시 반경에 동작경찰서에 도착하였다. 동작경찰서는 익숙한 장소에 있었지만 그곳이 경찰서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바로 노량진 수산시장 앞에 있었다. 노량진역에서도 멀지 않았다. 4시간 동안 나의 차는 계속해서 과속을 하였다. 다행히 상행선은 정체가 거의 없었다, 하행선은 저녁때까지도 정체가 이어지고 있었다. 중간에 천안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지만 테오도라의 어머니는 차에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딸답게 강인함이 여러 곳에서 묻어났다. 할머니는 아주 강하고 우직한 분이셨다. 나는 유독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많다. 고등학교 시절 자취생활을 하였다. 그때 할머니와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랑 같이 산 이유는 자취생활을 할머니가 같이해주신 것이지만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고부관계의 갈등도 있었다.

          

가족

     

올라가는 길에 잠깐 휴게소에 들렀다. 천안휴게소에서 사촌 여동생은 아이스커피 2잔을 사서 돌아왔다. 휴게소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내가 너무 피곤해 보였는지 커피를 사 왔다. 사실 나는 계속 목이 마려워 물이 필요했다. 이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자기는 어려워진다. 시계는 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서울까지는 1시간 반 정도의 거리가 남아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다시 휴게소를 떠나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차는 거의 막힘이 없이 경기도로 넘어선다. 뒤에 탄 할머니의 외동딸을 보면서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외동딸은 나의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이다. 아버지의 여동생은 지금 반 실신 상태로 딸의 죽음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동생은 지금 할머니와 거의 같은 모습과 성격으로 나에게 연결고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들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지금은 할머니를 추억할 겨를이 없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냉정하고 침착한 분이셨다. 나는 고등학교 유학생활 내내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할머니가 밥을 해주시고 도시락을 싸주셨다. 그렇게 3년을 나를 위해 헌신해 주신 할머니였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와의 고부갈등 문제였다. 사소한 일이고 평범한 일인데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항상 으르렁거리셨고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불같은 성격의 어머니는 그렇게 할머니와 부디 치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그래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많이 운 사람은 어머니라고 하였다. 고부갈등 또한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을 뿐이었다. 가족이지만 언제든 남이 될 수 있는 두 여인의 갈등은 어쩔 수 없는 평범함 속에 그렇게 묻혀가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이 주는 지극히 단순한 과제는 삶의 지속이었다. 죽는 날까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삶에는 이유도 동기도 중요하지 않았다. 운명처럼 주어진 삶에 거역할 수 없도록 이미 프로그래밍되어 태어난 것처럼 우리의 생은 다르면서 유사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끝까지 가족을 지켰고 결국은 할머니 옆의 선산에 묻히셨다. 가족의 의미를 돌이켜보는 이유는 할머니와 어머니처럼 나와 테오도라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가는 4시간 동안 좁은 차의 실내 공간은 정적이 허공을 메웠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테오도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러면서 지난해 추석에 집에 왔을 때가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하시며 다시 울먹이셨다. 집에 와서도 출근 문제로 바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형제자매는 물론 어머니와도 불화가 심하였다. 자기에게는 가족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테오도라였다. 테오도라가 천주가 신자였지만 독실하지는 않았다. 엄마처럼 믿음을 붙들고 삶의 위기를 헤쳐 나갈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테오도라는 항상 사촌오빠인 나를 찾았다. 나와 술도 많이 마시고 힘들 때마다 속내도 털어놓곤 하였다. 그런 테오도라가 죽어서 병원 장례식장의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이다.(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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