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의 역기러기 아빠 생활
아무것도 없이 떠난 이민생활이 순탄할 리 없다. 그 생활을 이야기하기 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힘들었고 고생이라는 감정이었다. 아무런 미래도 보장되지 않는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 자체는 극심한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 심지어 영주권은 고사하고 학생비자도 없이 관광비자로 체류하는 그 암담함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이는 자라나는데 잘못하면 불법체류자의 아이가 될 수도 있는 상황까지 내몰리기도 하였다. 그만큼 참담함을 이기며 이를 악물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이겨낸 보상은 크고 풍족하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한 번도 직장이라는 곳에 취직하여 월급을 받으려고 했던 적은 없었다. 항상 나의 목표는 사업체를 키워서 많은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 목표였다. 월급을 주는 행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그 행위는 단순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서로의 필요충분조건만을 채워주면 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꿈은 항상 고용인이 되는 것이었다. 사람은 꿈을 꾼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내 꿈이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에 불과하였다면 나는 영원히 피고용인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내와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역시 돌려막기였다. 월말이 오면 카드를 돌려 막아야 했다. 한국의 카드와 영국의 카드를 돌려 막는 일은 쉽지 않았다. 10개에 가까운 카드를 돌려 막고 나면 금방 또 월말이 다가왔다. 월말이 그렇게 자주 그리고 빨리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7년 이상을 버티며 경험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기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삶은 앞으로 나아갈 때에만 의미가 있었고 살아갈 이유가 생겨났다. 제자리에 계속 머물거나 뒤로 물러나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그렇게 앞으로만 나아갔다. 앞에 뭐가 있는지 전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세월을 헤쳐 나오기까지는 힘든 난관들이 수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수많은 난관들이 발목을 잡았고 때로는 수많은 관계의 멱살을 잡히기도 하였지만 앞으로 전진하는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돌려막기가 주는 교훈은 크고 잔인하였다. 몇 억 원에 가까운 돈을 돌려 막는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살이처럼 버티고 버티며 삶을 지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티고 나가다 보면 끝이 보일 수도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돌려막기란 긴 세월을 이겨내고 어느 날부터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고 집안에 웃음이 찾아왔다. 이제는 고생 끝이라고 선언하며 꽃길만 가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더 이상 돌려막기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제 삶은 좀 더 수월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찾아온 것은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통장에는 잔고가 쌓이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카드를 돌려 막지 않고 매달 제때에 결제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였다. 행복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단지 카드만 돌려 막지 않을 뿐인데도 우리 가정에는 웃음꽃이 넘쳐흘렀다.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행복은 창틈으로 새어 나간다는 말을 실감하며 열심히 일에만 매달린 보람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몇 년 가지는 못하였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는 생각지도 못한 다른 문제가 터져 나왔다. 바로 아내의 질병이었다. 갑작스럽게 들이친 아내의 질병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였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이상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것이 우울증 초기 증세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였다. 아마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내를 위해 어떤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선택이 바로 아내의 한국행이었다. 1년 정도 휴양을 하며 치료를 받으면 모든 일은 다시 순조로워지고 원상회복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싸움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갑작스럽게 아내에게 찾아온 질병에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단은 망설일 이유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특단의 대책을 내리지 않으면 출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생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아내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행히도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래서 아이도 엄마 따라 한국행을 택하였다.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며 돌봐줄 수 있는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아들이 고마웠고 대견스러웠다. 여름방학이면 영국으로 엄마와 와서 지내고 겨울 휴가 때는 잠깐이지만 내가 한국으로 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가 감지되기 시작하였다. 나를 대하는 아내의 태도는 점점 나를 불편해하였다. 같이 있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래 떨어져 있다 보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부작용쯤으로 생각하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약간의 충격을 느꼈지만 그걸 문제 삼아서 다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부부는 떨어져 살면 남이 된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하였지만 나는 허투루 흘려들었다. 우리는 절대 그럴 이리 없을 거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3년이라는 세월은 결국 타인들의 걱정과 우려를 현실이 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아내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는 아내의 한국행을 본가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한국에 놀러 간 것도 아니고 환자의 입장에서 치료차 간 아내를 위한 길은 시댁과의 관계 단절이었다. 나만 입을 다물면 시댁에서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 설날과 추석 등 명절과 시아버지 생신 정도는 시댁을 찾아가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3년 동안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는 철저하게 아내의 거취에 대해 영국에 있는 걸로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어 서운해하셔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의 치료와 안정이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이 사람 노릇이었다.
나의 결단으로 아내와 아들은 한국행을 택하였고 나는 계속 영국에 남아 사업체를 이끌어갔다.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 일을 3년 동안 묵묵히 해내면서 거액의 돈을 송금할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아빠로서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돈 걱정하는 것이 제일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풍족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한국의 물가가 만만치 않게 올라서 이제는 유럽의 국가들과 견주어도 결코 싸지 않을 정도이다. 아내 또한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에는 질색이었다. 미니멀라이즘에 빠져서 무얼 쌓아두지 못하였다. 항상 버리고 또 버렸다. 그러한 단순하고 조촐한 삶을 살아도 보내주어야 할 생활비는 버거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렇게 3년을 버틴 결과는 참담하였다. 아들은 고등학생으로 성장해줘서 기특하지만 문제는 아내였다. 아내는 혼자 사는데 너무 익숙해 있었다. 아내의 생활에는 오로지 아들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독립을 하면 본격적으로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3년이라는 세월의 충격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결국은 내가 치료차 한국으로 나오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준 선물은 뜻밖의 이별이었고 그 이별은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3년을 탓하기 전에 나를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 컸지만 그냥 내려놓기로 하였다. 이미 때는 늦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3년이라는 세월이 준 선물은 그렇게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의지를 꺾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