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청년기의 우울과 외로움에 관한 연재
이민 초기의 힘들었던 내용들을 글로 다 표현하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이민자들이 초기에 겪는 고통은 심하다. 물론 나처럼 아무 재산도 없이 빈손으로 왔던 세대들의 이야기이다. 일부 준 재벌급들 2세들의 이민은 우리와는 동떨어진 또 다른 삶이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니 다루고 싶어도 그들만의 리그를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의 이민은 철저하게 준비되고 계획된 이민이었다. 그러기에 초기 자본 없이도 영국에서 정착할 수 있었고 법인을 설립하여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모두 현지에서 알았고 현지에서 진행된 일들이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투자이민과는 성격 자체가 다른 이민 방법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방법들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20년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민 초기라 함은 영국에 도착해서 법인을 설립하고 노동허가서(work permit)를 발급받을 때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이 나에게는 3년 이상 걸렸다. 그 3년이란 세월을 학생비자로 버텼다. 학생으로 3년을 지냈지만 정작 학교에는 몇 번 가본 적이 없었다. 소위 말하는 비자 학교가 많았다. 당시에는 그런 비자 학교는 규모도 컸고 돈 버는 방법도 수월하였다.
도착해서 초창기 1년 정도는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하였다. 우리가 가져온 돈은 3개월 이상을 버틸 수 없는 돈이었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도 태어났지만 아이에 대한 무료 의료혜택이 전부였다. 영국은 미국과 달리 부모의 신분에 따라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주는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이다. 반면 미국은 부모의 신분에 상관없이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무조건 시민권자가 되는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아이는 태어났고 나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처음에 했던 일이 미니캡이라고 한국의 콜택시와 비슷한 일을 하였다. 미니캡은 지금의 우버와도 유사한 시스템이다. 철저하게 예약에 의해서만 자가용으로 영업을 할 수 있다. 반면 블랙캡이라 불리는 영국의 명물 택시는 한국의 개인택시와 비슷하다. 아무데서나 손님을 태울 수 있고 버스 차선도 달리고 어디서든 유턴이 가능하다. 최고의 전문직 중의 하나가 바로 영국의 블랙캡 기사였지만 나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렇게 3년 정도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영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다. 취업 자체는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한국에서 내가 무슨 대학을 나왔고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거기에 영어라는 커다란 걸림돌도 장애물이었다. 계급장이란 계급장은 댜 때어놓고 막 입대한 신병처럼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강인해져 갔고 적응해 가고 있었다. 아내는 아이를 키우느라 힘들어하였다. 아토피와 알레르기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다. 그래도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조금씩 정착해 나갔다.
인간처럼 적응력이 빠르고 탁월한 동물은 없는듯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내와 아이에게 가난하고 비루한 남편과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한국에 있었으면 잘 나가는 아빠이고 항상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화이트 컬러였는데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는 솔직히 조금은 아니 상당히 무모한 결단을 많이 후회하기도 하였다. 신혼의 단란함도 가난이라는 힘든 상황 앞에서는 나에게 아픔이었고 외로움이었다. 이겨내야만 하는 기나긴 싸움이었다.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삶이 힘들다거나 벅차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아내에게조차도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가난한 아빠였다. 하루라도 빨리 부자 아빠가 되어 아이에게 당당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외로움은 깊어졌다. 그 외로움은 우울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한 번은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대학 친구가 독일 음향 쇼에 온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바쁜 일정 때문에 런던에 오기가 힘들다고 나에게 잠깐 와서 얼굴이라도 보자고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당시 나의 여권은 이민국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마침 학생비자 연장을 하는 시기와 맞물린 것이다. 하는 수없이 친구가 잠깐 런던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친구는 나의 집에 저녁 늦게 도착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사업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자신에 차 있었다. 우리는 대학시절의 추억부터 사업 이야기까지 할 이야기다 너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잠은 생략하게 되었다. 하룻밤 지샌다고 힘들고 할 나이는 아닐 만큼 우리는 충분히 젊었다. 술을 마시며 밤새 이야기하다 다시 독일로 친구는 새벽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떠나갔다. 집을 나서는 친구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가 떠나간 자리에는 한국산 담배 2보루와 술병들만이 남아있었다. 그 술병들 주위에는 깊은 슬픔들이 나 뒹글고 있었다. 친구에게 미안하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몰려드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떨칠 수가 없어서 몇 주를 방황하였다. 그 외로움의 정체는 친구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 존재의 이유가 고단한 하루를 살아내고 있던 당시의 고달픔을 대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나의 외로움은 한동안 지속되다 좋아지다를 반복하였다. 그 가난한 시절에 느꼈던 외로움은 실존에 대한 번민보다는 어떤 남루함이나 비루함에 대한 자책감이 더 컸다고 생각된다.
이민 초기에는 누구나 겪는 일이다. 이리저리 휘둘리고 이용당하는 과정을 수없이 겪으면서 인간관계와 사업의 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림받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정착해 가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도 돈 냄새가 좀 풍겨야 대우도 받고 확실하게 이용당할 수 있다. 나처럼 쥐뿔도 없는 사람들은 그냥 이용만 당하는 동네북이 된다.
한 번은 청담동에 고급 안티크 매장을 내고 싶다는 분의 사업제안이 친구를 통해 들어왔다. 영국이나 유럽의 고급 안티크 제품들을 공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자본가이고 여기저기 엔젤 투자를 하는 투자가이기 때문에 돈 걱정은 말라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다. 그것도 친구를 통해서였다. 나는 귀인을 만났다고, 드디어 진정한 투자가를 만났다고 상기된 표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내도 좋아하였지만 계약조건이 뭐냐고 대뜸 물었다. 나는 무슨 계약조건? 한국에서 대금을 보내주는 대로 물건 사서 컨테이너에 선적해 보내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야! 하면서 아내를 안심시켰다. 한국에서 돈이 오지 않으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에 전혀 리스크는 없다고 판단해서 나는 한국 측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안티크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하였다. 첼시의 킹스로드에 몰려있는 안티크 가계들을 찾아다니며 배우기 시작하였다. 물론 쇼나 박람회도 찾아다니며 그렇게 6개월을 공부하여 어느 정도 안목도 생기고 거래처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6개월 후 한국에서 날아온 소식은 사업 진행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아파트와 유럽의 안티크가 서로 어울리기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방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6개월 동안 수고비는 고사하고 교통비 한 푼 받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동네북이 되어버렸다. 이후에도 그와 유사한 일들이 여러 차례 벌어지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는 바닥까지 추락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이 싫어지고 우울해진다. 내가 외로움을 가장 심하게 느끼는 순간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상실되었을 때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영주권을 받아야만 하였다. 학생비자로 버티기는 한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등록한 학교에 다니며 한가하게 공부할 입장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나의 우울은 점점 깊어만 갔다. 결국은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법인 설립부터 시작해서 정식 사업체를 만들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물론 자본은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영국의 법인 설립절차나 주주 등록 등은 상식과는 달리 자본이 필요 없었다. 설립비용으로 100파운드 정도만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주주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한국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해서 이민국에 회사 관련 서류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여 2년짜리 노동허가서(work permit)를 받았다. 2년 후에 한 번만 더 받으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물론 매출을 발생시키고 세금을 내야 하는 실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의 법인 설립은 대학 입학과 비슷하다. 영국의 대학들은 한국에 비해 입학은 쉽지만 졸업이 어렵다. 실적을 위해서는 부가가치가 큰 사업일수록 유리하였다. 내가 명품사업에 뛰어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동네북은 스스로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