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천안휴게소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서울로 향하였다. 조금씩 지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은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지 말고 동작 경찰서로 오라는 것이었다. 경찰서에서의 절차는 이미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테오도라의 오빠 부부는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동작경찰서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사망 확인조서를 작성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시신 확인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망 조서 작성에는 엄마를 포함한 가족 전체가 참여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직 사망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진술해야 할 게 많았고 시간도 제법 소요된다는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하였다. 서울톨게이트에 가까워질수록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중으로 조서 처리가 안되면 사고 처리가 장기화될 수 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황금연휴기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토요일 저녁 시간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정체가 풀린다 싶으면 가속 페달을 사정없이 밟았다. 뒷좌석의 고모와 여동생은 각자의 왼손과 오른손으로 창문 위쪽의 앞부분에 장착된 손잡이를 있는 힘을 다하여 잡고 있었다. 마음이 급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4시간 이상의 운전 끝에 마침내 동작경찰서에 도착하였다. 내비게이션도 힘이 들었는지 마지막에는 상당히 오락가락하였다. 경찰서는 노량진역 맞은편 쪽의 약간의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오르막 중간에 안내소가 있었다. 근무 중인 경찰관은 방문 사유를 묻고 왼쪽 편의 민원실로 안내하였다. 민원실 현관의 대기실에는 테오도라의 오빠 부부가 먼저 와 있었다. 그 부부와 함께 잠깐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민원실로 들어가서 담당 형사를 만났다. 담당 형사는 가족이 많은 것을 보고 조사실에서 조사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우리는 조사실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2개의 카메라가 우리를 녹화하기 시작하였다. 벽은 어느 정도 방음이 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물론 나도 들어가서 같이 조사를 받았다.
담당 형사는 여자였고 계급은 경위였다. 성격이 차분하고 섬세해 보였다. 평범한 얼굴에 약간 둥근 얼굴이었다. 경찰서가 아닌 곳에서 만나면 경찰관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단지 제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편안해 보였지만 그래도 질문에는 날이 서 있었다. 아무리 사복을 입었지만 경찰의 예리함은 질문은 물론 눈매나 태도에서도 수시로 흘러나왔다.
먼저 우리의 신분증을 수거해서 복사를 하고 신원조회를 마친 후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실은 아주 좁은 공간으로 거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졌다. 회색의 탁자를 앞에 두고 여 경위가 앉아서 질문과 동시에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무 탁자는 무거운 철재 탁자의 분위기가 나는 계열의 색상이었다. 그 탁자를 보고 우리는 탁자 앞에 앉았다. 일부는 앉고 일부는 서있어야 했다. 책상 위에는 TG 모니터와 삼성 복합기 프린터가 놓여있었다. 책상 옆쪽 정중앙에는 벽시계가 걸려있었다. 책상과 비슷한 회색이었는데 메탈 느낌이 났다. 책상과 묘하게 매치되는 색상이었다. 벽시계는 뚜벅뚜벅 안간힘을 쓰며 언덕 위를 기어오르는 두꺼비처럼 제갈길을 가고 있었다. 조사실의 벽은 연한 연두색과 하늘색 계열 색상의 페인트가 방음벽처럼 칠해져 있었다. 닫힌 출입문 위쪽에는 커다란 카메라 두 대가 모든 장면을 녹화하고 있었다. 공기는 습기를 머금어서 좁은 공간을 더욱 눅눅하고 무겁게 하였다. 질문은 인적 사항 확인부터 여러 가지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사가 이루어질수록 가족들의 고개는 점점 숙여졌다. 그렇게 질문자와 답변자는 각자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조사실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나는 그 공기의 무게를 이길 수가 없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길어야 한 시간 이상은 걸리지 않으리라는 나름대로의 셈법을 동원하며 조사관이 아닌 묵직한 공기와 싸우고 있었다. 마치 살인자가 되어 참고인이 아닌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기분이었다. 아마 다른 가족들도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테오도라의 어머니는 그 압박감과 무게감을 가장 많이 견뎌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조사관의 얼굴을 보고 있어서 가족 각자의 표정은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여력도 여유도 없었다.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기 전 신분증을 수거해서 복사를 하고 나누어주었다. 조서 작성은 각자의 신분조회가 끝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답변은 주로 테오도라의 어머니가 하였고 보충 질문들은 형제자매들이 하였다. 그중 한 사람인 나도 상당 분량을 진술해야만 했다. 진술은 예상보다 길어져 1시간 이상 이루어졌다. 여 형사의 집요한 질문은 가족 전체를 범죄자 다르듯 하지는 않았지만 원망 섞인 질문이 이어졌다. 그 원망이 질문 곳곳에 묻어 나왔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고개를 숙여야만 하였고 나는 점점 더 공기의 하중에 짓눌리기 시작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질문 중반쯤에 비로소 테오도라의 충격적인 죽음의 현장과 사망일자 그리고 전기장판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는 커다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라를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엄마였고 그것도 고향집에서였다. 그 시기는 지난해 추석 연휴였다.
그 뒤로 테오도라를 만난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통화를 한 사람도 없었다. 엄마만 설날에 택배 보냈다는 짧은 통화를 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내가 지난해 말까지 카톡을 주고받았다. 그것도 12월 3일이 마지막이었다. 내용은 한번 만나서 점심식사 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서로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해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나라는 인간은 참 이기적이고 무심한 오빠였다.
조서 작성 중간중간 여형사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형사의 질문은 끈질기고 집요하였다. 단지 한 사람의 사망처리를 위한 준비된 질문 치고는 범죄자를 심문하는 수준처럼 느껴졌다. 아니 범죄자를 심문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우리는 점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와 남은 자 간의 가족이라는 관계 설정을 하려는 형사의 노력은 힘겨워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타이핑 소리가 커졌다. 신경질과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책상 옆의 정중앙에 걸려있는 벽시계는 오래된 시계임에 틀림없었다. 무음이 아니고 째깍째깍 소리가 크게 나는 시계였다. 그 소리는 여형사의 질문에 답변을 못하고 정적이 흐를 때 유독 크게 났다. 한 대 갈기고 싶을 정도로 그 소리는 귀에 거슬렸다. 그렇게 벽에 걸린 두꺼비는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힘겹게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실제로 테오도라의 집도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여경과의 조서 작성은 쉽지 않았다. 여경도 유가족인 우리 못지않게 충격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중간에 조사실 출입문을 열 것을 제안하였다. 공기의 하중에 온몸이 뒤틀리면서 급기야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여경이 직접 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면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산소의 보충은 공기의 하중을 줄여주고 있었다. 공기의 하중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았는데 출입문 하나 열었다고 좀 살 것 같았다. 이렇게 삶에 대한 집착은 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의 온몸의 신경세포들이 웅변하듯 항변하고 있었다. 세포들에게 미안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한가하게 표현할 상황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모든 것을 기록하려는 여경의 질문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이 조서는 검사에게 넘어가 검찰의 지휘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 조서를 보고 검사는 부검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였다. 하나의 생명을 끝까지 소중하게 처리해주려는 그들의 태도와 의지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그들이 매일 하는 직업으로서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생명은 죽음을 맞이해서도 소중한 것이었다.
일단 타살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살이나 병사에 의한 죽음 중 하나이다. 형사들은 자살 쪽에 무게를 두었다. 조서 작성 내용도 자살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특이할만한 사항은 사망자가 간호사여서 주변에 엠플과 주사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용되지 않은 것들이었다고 한다.
더욱 특이할만한 것은 사망 시점과 전기장판이었다. 우리는 길어야 이삼주로 예상했던 사망시점이 1월 말경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부검을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테오도라는 1월 말에 사망하여 5월 초까지 전기장판 위에 있었다는 결론이다. 그 전기장판은 타이머가 없어서 꺼지지 않는 장판이었다. 100일 동안 켜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화재가 나지 않은 것이 궁금하였다. 그래서 더욱더 나는 사망 시점을 한 달 이내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형사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그 전기장판은 타이머는 없지만 일정 온도가 되면 자동으로 꺼졌다가 일정 온도 이하로 내려가면 다시 켜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화기의 발신 기록이 1월말부로 끊어졌다. 월세도 3개월이 밀렸다고 되어 있다. 사망한 지 100일이 되었다는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100일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여형사의 입에는 힘이 주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리 유가족들을 향한 원망이 실려 있었다. 인간사회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이다. 여형사의 입가에 힘이 들어갔고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눈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당장 여형사에게도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길고 긴 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1년처럼 느껴지는 하루였다. 배고픔도 허리 통증도 모두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차라리 조서 작성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목은 말랐고 속은 타들어갔다. 냉수가 있으면 한 바가지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경찰서에는 그 흔한 정수기도 없었다. 조사가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수돗물을 켜놓고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수돗물을 마셨다.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나는 한 시간 남짓의 조사시간에도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기적이고 못된 오빠였다. 동생은 문도 열지 못한 채 초여름 전기장판에 꼼짝도 못 하고 100일 동안이나 누워있었는데....
1시간이 조금 지나자 조서 작성이 거의 마무리되어갔다. 마지막 절차는 10여 페이지에 달하는 조서를 가족 대표가 읽어보고 서명하는 것이었다. 친오빠가 엄마를 대신해서 읽어보고 여 형사에게 넘겨주었다. 서명은 유일한 상속자이고 보호자인 어머니가 먼저 하였다. 어머니는 15군데 정도를 지문날인 방식으로 서명을 하였다. 나머지 가족들은 10군데 정도를 지문 날인하였다.
마치 부동산이나 비즈니스 계약서 작성할 때의 계약서 날인 방식과 유사하였다. 그렇게 지문날인을 마치고 우리는 동생이 안치된 병원으로 곧바로 출발하였다. 3대의 차는 10여분 만에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장례식장의 사무실에 도착하였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도 썰렁하고 뭐가 나올듯한 어두컴컴한 분위기에서 지하실 어딘가에 관리사무소가 있었지만 불은 꺼져 있었다. 빈소들도 모두 비어있었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낡고 이상한 건물의 장례식장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렵게 관리사무소를 찾아냈고 담당 직원과 절차 협의가 이루어졌다. 일단 월요일이 쉬는 날이어서 장례식은 화요일 오후에 하자고 한다. 오전에 부검이 끝나는 대로 바로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다. 비용과 절차에 대한 협의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담당 직원은 상품을 파는 것처럼 너무도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장례절차를 논하고 바로 견적까지 뽑아주었다. 그 자리에서 화장장 예약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살던 집 청소까지도 업체와 연락해서 하라는 조언도 빠트리지 않는다. 시간은 벌써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경찰서 앞에서 먹고 다시 올라가 나와 동생의 차로 장례식장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고 죽는다. 태어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고 죽음도 아름다운 일이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은 과연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 테아도라는 그렇게 매일매일을 누군가를 누워서 기다렸지만 100일 동안이나 단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줄 알았다는 말로 그녀의 빼앗긴 내일을 위로해주고 보상해 줄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녀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도록 해주는 일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애도나 조의 표현조차도 비현실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간밤의 꿈과 검은 넥타이로도 눈치를 채지 못한 둔하고 못난 오빠가 되었다. 우리 모두의 무관심이 이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난해 가끔 카톡을 통해 대화를 나누거나 통화했을 때도 그렇게까지 쉽게 세상을 등질 줄은 몰랐다. 나만 힘들고 나만 아픈 줄 알았다. 12월과 1월에 한번 씩만 더 만났어도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다. 그 당시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아팠다고 생각하였다. 연말에 심한 우울 감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A형 독감까지 걸리고 보니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나도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테오도라는 날마다 내일을 빼앗기며 100일 동안이나 전기장판 위에 누워있어야 했다. 이웃들도 직장도 가족도 모두 타인이었다. 그렇게 서울이라는 무인도에서 철저하게 혼자 누워 있어 했다. 100일 동안이나 내일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