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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03. 2019

나만 외로운 걸까? #5 외로움과의 싸움: 영국 편

후기 청년기의 우울과 외로움에 관한 연재


순조로운 사업

     

영국에서의 나의 첫 직업은 미니캡 기사와 이삿짐센터 사장 겸 직원이었다. 그런대로 먹고는 살만큼의 수입이 발생하였지만 문제는 영주권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법인 설립과 명품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다행히 운이 좋아 2년짜리 노동허가서(work permit)를 받았다. 2년 후에는 다행히 실적이 좋아 3년짜리를 다시 받았다. 그렇게 5년을 채우면 영주권 신청자격이 주어진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여곡절 끝에 5년을 채웠고 드디어 영주권을 받았다. 그 기쁨을 아내와 함께 누리면서 마치 세상을 다 가진듯하였다. 자신감도 솟구치고 그동안의 설음들이 한방에 날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기쁜 순간에도 나는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느끼며 불시에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나는 굳이 외로움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는 상황이어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이건 외로움이 아니라 그동안의 설음으로 인한 허탈함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달래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외로움은 몇 년 전 밤을 새우고 새벽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을 나서 공항으로 향하던 친구의 뒷모습을 닮아있었다. 친구의 뒷모습은 차라리 쓸쓸함이었다. 외로움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겨진 자의 몫이었다. 모든 것이 허전하고 허무하였다. 그렇다고 니체가 말한 모든 가치, 심지어 존재의 가치마저 부정하는 그런 무로 향한 허무는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그 당시에는 허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영주권을 받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5년 동안의 워크퍼밋 기간에 수시로 홈오피스의 이미그레이션에서 조사관들이 경찰과 함께 예고 없이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그들의 단속 비슷한 불시 방문은 실제로 사업을 하는지 아니면 페이퍼 컴퍼니인지를 가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업을 하는 경우에도, 비자가 없는 직원들을 불법 채용하는지 여부도 단속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거의 사무실에는 상주하지 않았다. 모든 비즈니스는 집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무실을 방문할 때마다 문제가 되었다. 그 문제들 때문에 더욱 자주 나왔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홈오피스가 있는 크로이든에서 나의 사무실까지는 가까운 거리인 것도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었다. 그러한 모든 고비들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회사 통장의 거래 내역과 실제로 한국과 일본으로 수출한 송장 내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거래 내역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명품사업이라 어쩔 수 없이 고액이 오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출 품목은 실제로 물건이 영국을 떠나는 순간 20%의 VAT를 환급받게 된다. 개인은 공항에서 사업체는 Tax office를 통해서 분기별로 환급을 받을 수 있다.

     

그 이후 2007년부터는 아내가 하고 싶었던 음식장사를 시작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음식장사는 점점 손님이 늘었고 급기야는 10분 이상 줄을 서야만 먹을 수 있는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물론 아내의 끊임없는 메뉴 연구와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철학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평화로웠다. 매일 저녁이면 돈 세는 재미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하였다. 그동안 10개 이상의 카드로 돌려막으며 버틴 생활은 금방 청산되었다. 모든 것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봄이 되면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덧없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돈이 여유가 생기면 삶의 여유도 생기고 당연히 마음의 여유까지 생기는 줄 알았다. 실제로는 한동안 그런 패턴을 보였고 느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느끼는 것과 외로움은 별개였다. 그래서 봄이면 텃밭농사를 시작하면서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보았다. 토요일 아침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축구도 열심히 하였다. 텃밭에 있을 때나 축구를 하려고 푸른 잔디밭에 있을 때만큼은 어떠한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그때만큼은 마음이 잔잔하고 편안하였다.

     

어렸을 때 상당히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기독교의 원죄(sin)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인간의 원죄는 물론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못 이겨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sin이라는 단어를 원죄로 해석하기보다는 어떤 잘못으로 인한  슬픔이나 외로움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어려서인지 몰라도 선악과 하나를 먹었다고 그것 자체가 크나큰 인류의 죄가 되는 시스템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목사님이 침을 튀기며 설교해도 나는 마음으로 그 설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선악과를 놓고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 하나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인간을 통제할 그 무엇이 필요해서 그렇게 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튼 어린 내가 이해하기에는 그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늘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 속에 짙게 베어든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외로움과 기독교의 원죄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성격 자체가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일 수도, 아니면 너무 낭만적이어서 일수도 있다. 비가 오는 날도, 화창한 날도, 눈 내리는 날도  전망 좋은 카페에 않아 있으면 여지없이 외로움을 느낀다.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참 특이한 유전자를 타고났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별거 아닌 별거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던 4년 전 어느 날이었다. 그때도 4월의 봄날이었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아이는 일어나 윗 층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일어나자마자 부지런을 떨어야만 한다. 나는 출근 준비를 하느라 식당에서 필요한 식자재들을 차에 싣고 있었다. 아내는 아이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스터기에 빵을 굽고 아보카도를 잘라서 잼과 함께 구워진 빵에 바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너무 힘들어하는 것이다. 바로 999로 전화하여 앰뷸런스를 불렀다. 앰뷸런스는 5분도 안되어 도착하였고 응급치료가 시작되었다. 


나는 병원에 같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이를 일단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서 병원으로 가려고 했더니 벌써 집으로 돌아왔다고 병원으로 오지 말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러면서 아내의 병명이 말로만 듣던 연예인병이라는 공황장애였다. 그 뒤로도 아내의 발작은 이어졌고 앰뷸런스를 불러도 즉시 도착은 하였지만 진정될 때까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치료 방법이 없었다. 약물 치료도 부작용이 심하여 아내는 너무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물론 수면장애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를 한국의 친정으로 보내서 치료를 받고 휴양을 시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막 중학생이 된 아들이었다. 내가 사업체를 운영하며 아들까지 돌보기에는 벅찼다. 다행히도 아들은 엄마를 따라 한국에 가겠다고 하였다. 이제 자기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아빠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제법 의젓한 논리까지 펼쳤다. 문제는 아이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다행히 대전에도 국제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엄마와 아이는 그 해 여름에 간단한 이민가방 몇 개를 들고 부랴부랴 한국으로 떠났던 것이다.

             



매일 산책하는 고양이

     

한국에 도착해서 아내는 공황장애와 관련된 일체의 약을 복용하지 않고 인지행동치료 위주로 치료를 하면서 명상도 하고 요가도 하였다. 약물 부작용 때문이라고 하였다. 약물 없이 공황장애를 치료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나대로 사업체 확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면서 잠시 빈집의 고독이나 쓸쓸함을 잊는 듯하였다. 물론 나의 둘째 아들 같은 고양이 단오가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나의 유일한 말벗이자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단오는 왜 갑자기 엄마와 형이 집에서 보이지 않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한동안 엄마와 형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몇 주가 지나자 비로소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재를 인정하는 듯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아내와 아들의 부재를 실감하면서 깊은 슬픔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열심히 두 개의 사업체로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다. 당시 외로움과의 싸움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그저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살아나갔다. 아니 견디어 냈다. 가족과는 처음 떨어져 보는 것이었다. 견딜 수 없는 나의 외로움은 단지 가족과의 이별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의 무거운 짐 때문도 아니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어떤 막연한 비현실적인 상실감이었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었다.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나를 집사처럼 하대하고 무시하던 단오는 드디어 나를 주인처럼 대우해 주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자기를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주는 사람이 아빠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나는 매일 저녁이면 식사 후 단오와 동네의 골목에서 산책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산책은 일과가 되어버렸다. 비가 와도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거의 빠트릴 수 없는 일상이 되었고 단오는 그것을 즐기고 인근의 고양이들에게 과시하는 행동을 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교감은 한계가 있고 장벽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단오는 나의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 고양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의지한다는 행위는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오히려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마음이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꼬리를 내렸던 단오가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다시 나를 집사처럼 대접하기 시작하였다. 밀당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더욱 아쉬운 것은 나였기 때문에 예전의 관계로 돌아오는 데는 채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단오의 그러한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웠다. 대신 나의 넋두리를 받아주고 내가 외로워하면 다가와서 그루밍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주인이 집사를 달래는 듯한 행동들이다. 그렇게 단오는 나의 외로움을 희석시켜주는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쥐를 잡아와도 더 이상 혼나지 않아도 되는 고양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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