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년간의 영국 여행 이야기
이 글은 20여 년간 한국을 떠나 이민 생활을 하면서 밖에서 보고 느낀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임을 미리 밝힌다.
세상에 완벽하게 공정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어느 정도 공정한 사회일까?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가 아니라 아주 불공정한 사회다. 공정성 여부를 따지는 기준이나 척도는 선진국과의 비교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공정과 부조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직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해서일까? 한국은 선진국들에 비해 유례가 없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세계가 놀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부작용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단순한 몸살이나 홍역 정도면 좋을 텐데 암 못지않은 중병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래전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로 나라 전체는 투기판이 된 지 오래고 자수성가가 아닌 투기에 의한 수많은 졸부를 양산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 대열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조상이나 부모를 탓하며 심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특정지역에서는 자기 소유의 아파트도 마음대로 사고팔기가 어렵다. 아파트값을 주민들이 결정하는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주민 대다수에게 금전적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에 담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정 브랜드의 수입차가 불이 나서 리콜 대상이 되고 심지어 일부 주차장에서는 진입을 금지시키는데도 불구하고 그 차를 사지 못해 안달하고 중고차라도 사려고 줄 서는 사람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 취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나라가 되었다는 반증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특정 정권에서는 나라 자체를 대기업을 위해 돌아가는 시스템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수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환율정책 하나만을 예로 들어보겠다. 대기업 사장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기업 위주의 고환율 정책을 펴 나갔다. 그 정책 하나로 수혜자와 피해자가 극명하게 갈렸다. 환율이 높아지면, 원자재를 수입하여 제품을 생산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은 환차손으로 큰 피해를 보게 된다. 대기업이 수출하면서 고환율 정책으로 얻는 이익만큼을 중소기업은 고스란히 손해를 봐야 한다. 물론 환율 정책이 이러한 수출입 문제만으로 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중소기업은 물론 국민들도 더욱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물가가 올라도 너무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 흔한 과일이나 야채들만 예를 들어도 영국이나 유럽보다 훨씬 비싸다. 임금은 쥐꼬리만큼 오르는 데 장바구니 물가가 이처럼 오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자동차 산업의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 산업의 경우에는 수많은 하청 업체가 존재한다. 이 하청업체들은 부품을 생산하여 대기업인 자동차 본사에 납품한다. 그런데 환율이 오를 경우, 대기업은 자동차를 환율이 오른 만큼 비싸게 수출하여 이득을 취한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원자재를 수입하면서 환율이 오른 만큼의 비용을 더 부담해야 한다. 끊임없이 한강의 기적을 자랑하는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이 있는 한 불공정한 사회가 변화하고 변혁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부당하고 불공정한 사례를 다 들자면 책을 몇 권 써도 부족할 것이다. 선진국들처럼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주어지고 그 보상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다.
채용 특혜를 비롯하여 온갖 비리와 부조리의 만물상 같은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평범한 일반 국민에게 돌아간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는 경제력 만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 국민들이 스스로 차별받지 않고 정당한 대우를 받아가며 산다고 느낄 때 우리의 국력은 최고의 효율성을 창출해 나갈 수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승자 독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자본주의의 논리와 시장 질서도 중요하지만 공정성과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이상 희망을 갖기는 힘들어진다.
살기 좋고 편리한 경제대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왜 삶의 만족도는 낮은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의 주거문화 형태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천편일률적 디자인의 아파트 문화가 주범이다. 아파트 문화는 끊임없이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웃이나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거나 비교당하게 만든다. 아파트 내의 인테리어나 가전제품은 물론이고 사소한 라이프 스타일까지도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 따라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멀쩡한 가전제품을 바꾸기도 하고 예정에도 없던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한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면 무능력하다는 인상을 주거나 심지어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네이버에서 특정지역의 아파트를 검색하면 주소나 지도가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평수나 평당 가격, 심지어 매매 실거래가 그래프까지 나온다. 개인의 자산까지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세상이다. 아파트 문화가 아닌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학교에서는 부모들이 특정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재 내가 거주하는 지역은 8개의 단지 전체가 임대 아파트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대단지에 한두 개의 임대아파트가 끼어 있는 경우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생활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 부모들이 그렇게 하니까 아이들도 똑같이 따라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 어느 학생이 임대아파트나 임대 하우스에 사는지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는 한 노출되지 않는다. 설사 노출된다고 하여도 부끄럽게 여기거나 차별을 두지도, 둘 필요도 없다.
학생들의 경우, 어떤 특정 브랜드의 가방이나 옷이 유행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가방이나 옷을 가지고 다니거나 입고 다닌다. 나의 한국 내 임시거처가 중, 고등학교 근처에 있어서 매일 학생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겨울이 되자 거의 모든 학생들이 롱 패딩을 입고 다녀서 롱 패딩이 교복인 줄 알았다. 남들과 같거나 비슷하지 않으면 무시당하거나 따돌림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심리가 집단 몰 개성화를 가져온다. 개성이 사라지고 유행이 변질되는 이상한 사회로 가는 현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누구나 같은 옷을 입는 것이 과연 유행이고 개성일까?
누구나 다른 사람이고 다른 생각을 가진 다른 인격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감하였으면 좋겠다. 당당하게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롱 패딩을 입지 않고 남들과 다른 나만의 스타일의 옷을 입을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개성이 노출되고 개인이라는 인격체가 드러나게 될 수 있다.
어린 아기가 유치원이나 학교를 다니면서 맞벌이가 시작되는 가정이 많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부부는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맞벌이가 아니고 남편이 직장을 다니는 가정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아이들은 잠들기 전에 아빠 얼굴을 볼 수 없는 날이 많다.
내가 지켜보고 경험한 영국이나 유럽의 아빠들은 대부분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과 저녁을 같이 먹는다. 주말을 같이 하는 건 기본이다. 보통 저녁 식사 후에는 집 근처의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이나 놀이도 한다. 잠들기 전에는 책을 읽어주거나 Good night 인사를 한다. 가족이 저녁에 모여서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저녁이 있는 삶이 주는 가치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서 가족해체를 막아주는 중요한 행위인 것이다.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대화가 오고 간다. 자녀와 대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다. 이러한 삶의 패턴이 무너지면서 대화가 단절되고 대화를 해도 말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빠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아직도 바뀌지 않은 직장의 조직문화를 언제까지 탓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한국은 엄마들이 바빠지면서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가족들이 외식을 많이 하게 된다. 아주 어린 자녀에게는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여주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가족이 식사에 집중할 수 있고 다른 손님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아이를 키워본 부모 입장에서 이를 탓할 마음은 없다. 자녀들이 성장한 가족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물론 식사를 하면서도 가족 모두가 휴대폰에 얼굴을 묻고 있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아빠를 제외한 엄마와 자녀들만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경우도 많다. 아빠들은 바쁘기 때문이다. 그저 기계처럼 일만 하는 경우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한국 아빠들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직장에서 퇴직을 당할 나이가 되거나 퇴직을 당하면 아빠들은 설자리가 없어진다. 재취업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기업에 다니는 아빠들도 예외 없이 통닭을 튀기거나 커피를 팔거나 편의점 등의 프랜차이즈 사업에 무리하게 뛰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죽어라고 일하지만 곰처럼 재주만 부리고 본사만 좋은 일을 시킨다.
기세 등등하게 뛰어들었던 사업이 기울면 가정에서의 아빠의 위치는 더욱 작고 초라해진다. 그러다 어느 날 버려지는 아빠들이 한국에서는 증가 추세에 있다. 물론 그렇지 않고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사는 가정도 많다. 한국은 100세 시대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남자들의 경우, 대학 재학 중 군대 갔다 오고 스펙 쌓으려고 휴학하고 해외연수도 다녀오고 하다 보면 20대 후반이나 되어서야 겨우 취직한다. 그 어려운 취업의 관문을 넘어서 운 좋게 취직해도 40대 중반이나 50도 안되어 직장에서 퇴직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추세다. 공무원이나 일부 전문직 등 특정 직업이 아니면 버티고 버텨도 60세를 넘기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지내는 사회활동의 시기는 기껏 해야 20년 정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수명은 점점 늘어 100세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정년이 없는 나라는 아주 많다. 이러한 나라로 이민을 떠나지 않고 하루하루를 단순하게 열심히만 살다 보면 반드시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에 엄청난 시련에 봉착할 것이다. 그때는 후회해도 별다른 대안이 없다. 이제 통닭집이나 족발집도 포화상태다. 한국의 통닭집이 전세게의 맥도널드나 KFC의 매장보다 많다고 한다.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삶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다. 광야나 사막으로 나가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달콤한 현재라는 오아시스에 빠져 살다 보면 행복해 보이는 그러한 삶이 그저 신기루였다고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오고 만다.
이민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자녀의 교육문제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미래가 없어 보인다. 유치원부터 시작된 경쟁은 중, 고등학생의 대다수를 패배자나 낙오자로 만들고 있다. 기껏해야 20% 정도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설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애착이 없어서 방황을 한다. 이러한 학생들은 재수나 편입 또는 공무원이나 공기업 시험 준비를 하게 된다. 블라인드 면접 등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구직 활동 시 많은 불이익을 받는다. 심지어 지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의 학교 교육은 수도권의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한 성적 위주의 시스템으로만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 감성과 놀이가 필요한 아이들은 사지로 내몰리게 된다. 취직해서 기계처럼 일하는 아빠처럼 되기 위해 기계처럼 공부만 해야 하는 아이들이다. 과연 탈출구는 없는 것일까? 방과 후에도 아이들은 학원이나 도서관이나 독서실로 가서 공부를 한다. 여유가 되는 아이들은 개인 과외나 교습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80% 정도의 아이들은 입시에서 절망을 맛본다는 걸 미리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아닌 부모나 학교의 의지에 의해 학교생활을 한다.
닭을 케이지에서 사육하는 양계장을 닮은 건 한국의 아파트 문화만이 아니다.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닭에게 아무리 좋은 유기농 사료를 주어도 방목하지 않으면 결코 좋은 닭을 키울 수 없는 이치와 동일하다. 좋은 사료도 중요하지만 좋은 닭을 만들어 내려면 반드시 방목을 해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고 질이 높은 삶일까? 어떻게 살아야 죽는 순간 후회를 덜할까? 매일 미세먼지 신경 쓰기도 바쁜데 자아실현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 사는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초스피드를 외치며 성장만능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은행이나 관공서의 서비스는 물론이고 음식 주문이나 배달 및 택배서비스도 초고속으로 이루어지지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한다. 심지어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련된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조금 느리면 어떠한가?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우리처럼 속도를 외치는 나라는 없다. 식당에서도 주문 후 음식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슬프게도 삶의 질과 만족도는 삶의 속도와 비례하지 않는다. 느림의 미학까지는 아니어도 느림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