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청년기의 우울과 외로움에 관한 연재
상당히 오래전에 한국에서 행복을 전하는 행복전도사의 자살 소식을 접한 적이 있었다. 이제 거의 10년이 되어가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기도 하였다. 아니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는 그 강사의 이중적인 생활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였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유서의 내용에서 밝힌 질병에 대한 고통과 남편의 사랑이 만든 동반자살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사랑의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국민들에게 준 충격은 크고 오래갔다. 개인이 아닌 공인이기에 이러한 비난이나 비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유명하였고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멘토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행복하다고 슬프거나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행복할 때도, 슬프지 않을 때도 외로움을 느끼곤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행복 전도사가 왜 자살을 하였는지는 명백하다. 바로 질병,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증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니체도 말년에는 질병과의 처절한 전투를 하였지만 질병 자체를 즐기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질병 때문에 건강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질병 때문에 삶의 의지가 더욱 강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질병을 오히려 찬양하고 칭송하였다. 역시 그는 미치광이 소리를 듣긴 하였지만 역시 위대한 철학자였다.
우리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돈에 목숨을 거는 것도 돈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믿기 때문이다.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돈이 주는 자유를 행복이라고 느끼는 게 일반적인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참 쉬운 질문이지만 답은 결코 쉽지 않다.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영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게 산다는 말 자체에도 벌써 모순이 존재한다. 행복이란 우리가 느끼는 하나의 감정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항상 행복을 느끼며 살 수는 없다. 돈이 한 푼도 없어도 행복을 느끼며 살 수도 있다. 이처럼 행복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행복은 하루 종일 또는 1년 내내 지속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느끼는 일시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 또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루에도 수 십 번 이상 느낄 수 도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행복은 멀리 있지도 가까이 있지도 않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불행을 많이 느끼고 겪어본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행복이 무엇일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sin)는 불행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를 고민하였던 적이 있다. 행복하지 않다고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니다. 죄를 지었다고 불행한 것일까? 과연 행복할 때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일까? 불행하다고 느낄 때는 외로움을 느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일까?
나는 지금도 이들의 관계가 궁금하다. 나의 경우에는 불행하다고 느낄 때는 물론이고 행복하다고 느낄 때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의미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나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사전적 의미만의 외로움보다는 좀 더 포괄적일 수 도 있고 사전적 의미와는 미세하나마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외로움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도 있는 우리가 느끼는 하나의 감정이다. 하지만 하나의 감정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고 실질적으로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리고 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보통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군중 속의 고독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일종의 고립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고립이라는 의미는 나 혼자 갇혀 있다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외로운 것은 아니다. 관계라는 특수성은 우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전유물은 아니다. 동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 즉 사피엔스의 관계는 복잡하고 촘촘하게 얽혀있다. 그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설정할지는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관계의 유지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관계의 고립은 치명적일 수 있다. 사람은 단순히 사회적 동물 이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때도 버림받을 때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외로움은 성격이 좀 다를 수도 있다. 종교의 원죄처럼 외로움 자체도 어떤 근원적인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