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기러기 아빠는 닭이 되어 더 이상 날지 못한다.
20년이면 강산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변한다는 긴 세월이다. 20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갑작스럽게 정리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의 충격은 작지 않았다. 하지만 식어버린 상대방의 마음을 탓하고 싶지도 탓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은 나로 인해 시작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내 입장에서 바라본 나는 성실하기는 하지만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결코 자랑스러운 남편도, 멋진 아이 아빠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혼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단 한 번도 이혼까지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혼이라니! 이 사람이 지금 제정신이가! 내가 분명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단어가 아내 입을 통해 나오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아내의 표정과 그 단어는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나를 향해 표창처럼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나의 심장을 관통해 버렸다.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나는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즉사하는 기분이었다. 아! 사고나 전쟁터에서 죽을 때의 고통이라는 것이 이러한 부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애써 태연한 웃음을 지으며 아내의 입 밖으로 나온 단어에 대항하며 맞섰다. 그러면서 나의 억울함 들을 토로해내기 시작하였다.
아내는 내가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는 것조차도 몰랐다. 허리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공감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가정의 모든 일은 본인의 의사대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그동안 내가 역 기러기 아빠로 고생한 것들이나 혼자 3년을 버티며 살아온 일들이 갑자기 허무해지기 시작하였다. 인생을 헛살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아내의 이혼 선언이 아니었다. 이혼선언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배신감이었다. 나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깨졌기 때문에 이혼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에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아내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가볍게 행동한 것은 사과를 하였지만 본질은 서로 간의 믿음이었다. 이미 그 신뢰는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의 토론도, 부부싸움도 의미를 상실해 갔다. 남아있는 대안은 오직 하나로 압축되기 시작하였다.
예정대로라면 지난달 말에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리턴 티켓을 포기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의 얼굴과 마주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떠난 사람과의 동거는 고통이었고 고문이었다. 나는 그걸 두어 달 동안 경험하며 지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개인적인 가정사를 구구절절 글로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잘했다고 나를 항변하려는 것도 아니고 아내를 폄하하거나 비방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나를 이렇게 만든데 간접적으로 일정 부분 기여한 아버지를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부부간에는 수시로 진솔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대화가 오가지 못하면 그 부부는 이미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진 상태일 수 있다.
특히 각방을 쓸 경우에는 서로가 분명하게 그 이유와 기간 등을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다 보면 부부관계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즉, 무늬만 부부인 쇼윈도 부부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무조건 참고 지내는 부부들에게도 경각심을 주고 싶다. 싸울 때는 소리 지르며 싸울 필요가 있다. 다만 폭력이 동반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아내의 “우리 시간 나면 이혼할까! “라는 말에는 그동안의 아내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애환이 담겨 있을 것이다. 힘든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어쩌면 저렇게 무심한 남편이 있을까! 라며 눈물지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나는 무뚝둑한 남편이었고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남편이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내 성격을 앞세우며 변명하고 싶지 않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노래처럼 나는 사랑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설사 사랑을 했어도 너무나 서툰 사랑 때문에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그 흔한 사랑 한번 제대로 못한 사람이 말이 많고 글이 길어졌다. 아무튼 나처럼 바보 같은 남편들이 한 명이라도 줄어서 아내의 가슴을 멍들지 않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