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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13. 2019

여보, 나 1년만 쉴까? #12 무인도엔 길이 없다

일과 질병이라는 일상에서 휴식과 치유 및 힐링에 관한 연재이다. 



검은 머리 물 떼세 알이 2개인 이유

     

어제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계란의 절반만 한 알 2개를 보았다. 알은 연한 노란색을 띤 베이지색으로 모래 색상과 비슷하였고 검은 반점들이 넓게 퍼져 있어서 보호색을 뗬다. 따로 둥지를 틀거나 집을 짓지 않고 그냥 모래사장 위에 알을 낳은 것이다. 무인도가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다. 검은 머리 물떼새는 제법 똑똑하고 두뇌가 어느 정도 발달한 조류임에 틀림없다.

     

검은 머리 물떼새는 까마귀와 까치를 조합해 놓은 모습이다. 크기도 이들과 비슷하다. 머리와 등이 검고 배는 흰색이다. 주황색의 부리는 굉장히 길고 뾰족하다. 턱시도 고양이의 일종인 우리 고양이 단오와 닮은 모습이다. 천연기념물 326호로 지정된 새로 주로 조개를 캐서 먹는 조개 사냥꾼이다. 우리나라에는 개체수가 많지 않아서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멸종위기종이라고 한다. 알을 발견한 일행 중 한 사람은 흔한 갈매기 알로 생각하고 라면 끌일 때 계란 대신 넣어 먹자고 제안하였다. 여사장님께서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호통을 치셨다. 그렇게 해서 천연기념물의 알을 먹는 야만적이고 불법인 행위는 피할 수 있었다. 해변을 임대해서 무인도 캠핑 사업을 하는 여사장님의 텐트와 아영 도구들은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사유지이기 때문에 외인이 이 섬에 들어오려면 허가가 필요하고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문제는 야영객들이 섬을 빠져나갈 때 많은 것들을 훔쳐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의 양심을 파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하소연에 어이가 없다. 우리의 도덕성의 맨얼굴을 보는듯하여 민망하였다.

     

검은 머리 물떼새는 제법 우리를 경계하였다. 근처에 알이 있다는 의미다. 이들은 3개의 알을 낳아 건강한 2개만 기르고 나머지 하나는 도태시킨다고 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3개를 다 키워내야 하는 게 부모 심정일 텐데 이들이 약한 하나를 버려야만 하는 이유는 야생에서 어쩔 수 없는 최상의 선택일 것이다. 자연에서 약하거나 장애가 있는 동물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이 동물 세계의 현실이다. 우리 인간의 세계와는 다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자연은 무섭고 자연은 위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백사장과 사막

     

드넓은 백사장은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첫날 나는 백사장의 끝을 향해 무작정 걷고 또 걸어보았다. 그 끝은 멀고도 멀었다. 걷는 도중 가끔은 신발이 살짝 젖을 정도로 물이 고여 있어서 조심스럽게 지나야 했다.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자 나는 과감하게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었다. 맨발로 규사의 백사장을 걷는 것은 또 하나의 호사였다. 그 첫 번째 호사가 구들장이 놓인 방에서 자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호사는 맨발로 해변을 누비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바닷물이 있는 지점에 섰다. 뒤돌아보니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둥글지만 제법 높이가 있는 산으로 된 섬이었다. 특색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둥글기만 하였다. 나무들도 모두 평범해 보였다. 백사장은 갯벌이 아니었다. 모두 모래였다. 미세한 정도는 갯벌 직전의 단계에 가까웠다. 그만큼 모래알은 고왔고 미세하였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한참을 거닐었다. 조개가 있을만한 곳은 막대기 같은 나무를 도구로 활용해 파보았지만 허사였다.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렇게 반시간을 애썼지만 그 어디에도 조개는 없었다. 아니 조개는 많은데 거기에 맞는 도구가 없어서 잡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일어선다. 허리가 아프다. 드넓은 해변을 홀로 독점하고 있었다. 비록 조개 등의 해산물은 잡지 못하였지만 오랜만에 맨발로 해변에서 호사를 누리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낭만적이고 멋져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속세의 거울을 들이밀면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거울을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모래들이 모두 규사라니 얼마나 많은 거울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분량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변은 갑자기 사막이 되어 내 머릿속에 인식되기 시작한다. 갑자기 나는 사막에 와 있는 것이다. 사하라의 한가운데에 있는 내가 생존하려면 일단 물이 필요하다. 나는 오아시스를 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그다음은 식량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갈증이나 배고픔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그렇게 사막을 생각하다가 문득 무인도에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많은 관계들을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은 물론 부부관계와 부자관계 그리고 지인들까지 생각하다 보니 나의 사회적 관계망은 생각만큼 촘촘하지 못하였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였다. 그런데 그 관계망 속에서 아파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무엇이라는 존재로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그 짐은 무겁고 나의 어깨를 짓눌러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40대 중반 무렵부터는 모든 관계와 관계 사이에 염증이 생기고 곪아 터지는 상처가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아픔들은 관계와 관계 속의 매끄럽지 못한 이해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치유될 상처도 있지만 악화된 상처는 아픔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더 이상 관계가 회복이 되지 못하게 된 상처에 나는 아파했고 고통스러워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비난해서 될 문제를 이미 넘어서 버렸다. 그래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굳이 모든 일들을 해명해서 내가 그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지도 않았다. 치유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관계의 회복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복잡하게 스스로 만들어나가며 아파하고 있었다. 40대 중반에 잃어버린 길을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후기 청년들이 겪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단지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도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꽤 괜찮은 아빠였고, 남편이었고, 아들이었다. 넓디넓은 이 사막 같은 해변에 홀로 서서 서울을 바라본다. 눈앞의 작은 무인도는 차라리 귀여운 애완견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관계망으로 복잡하게 엉켜버린 서울이지만 그 속에서의 개인은 해변의 작은 모래알에 불과하였다. 그 모래알들은 단지 하나의 모래알에 불과하다. 하나의 모래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미아 같은 존재이다.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하나의 알갱이는 그렇게 혼자서 아파하고 혼자서 힘들어했다.

     

    


사막의 오아시스

     

해변을 독점하는 동안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유일한 것은 검은 머리 물떼새였다. 지금이 딱 그들의 산란기임이 분명하였다. 이미 어딘가 모래 위에 알을 낳아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부 침입자가 알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다른 방향에서 나를 유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인 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들은 어김없이 비상하여 내 머리 위를 감돌았다. 공격태세를 갖추는 듯하였다. 나는 그들의 알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그들은 이미 나와의 관계 설정을 마친 상태였다. 나는 집에서도 고양이 단오에게 집사 취급도 받지 못하는 신세라고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었다. 니들이 아무리 신분이 높고 존귀한 천연기념물이라고 해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낮아진 자존감이 무인도에서까지 드러나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이는 검은 머리 물떼새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문제였고 나의 자존감이었다.

     

이처럼 작고 사소한 관계에서조차 나는 관계 설정을 하고 합당한 대우를 하거나 받을 것을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계산은 자릿수가 많아지면 복잡한 연산이 되는 것처럼 나는 40대 중반에 이를 겪고 말았다. 어느 날 돌아보니 나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은 심해져갔다. 아홉수라고 하는 사십 대 후반의 끝자락에서는 50이 된다는 두려움과 함께 극심한 우울감이 찾아왔다. 삶의 낙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뛸만한 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괴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오아시스는 없었다. 물 한 모금이면 살 것 같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물을 마실만한 장소도 물 한잔 주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철저하게 고립되고 말라가고 있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그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차라리 적이 있으면 싸워보기라도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적이 없었다. 유일한 적은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끔찍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힘들었고 괴로웠다. 나를 이기는 길이 나를 죽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무너져갔다. 오아시스를 찾지 않으면 나는 사막에서 쓰러져 말라죽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한 날들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형벌이었다. 이제는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고통과 통증은 허리디스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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