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의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여동생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불규칙한 3교대 업무가 간호사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 동생은 3교대가 힘들다고 늘 징징대기는 하였지만 직장에는 잘 다니고 있었다. 선후배나 동료 간호사들 때문에 힘들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어느 정도 경륜이 있어서일 수도 있고 내색을 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내가 관심을 둔다고 상황이 좋아지거나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여동생의 방에서는 타살이나 자살을 의심할만한 단서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외부 침입 흔적도 전혀 없었다. 부검 결과 병사 흔적도 없었다. 부검의는 여동생의 죽음을 사인 불명으로 처리하였다. 머리맡에는 많은 앰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용된 앰풀은 하나였고 주사기가 그 사용 흔적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앰풀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쇼크사일 가능성도 제기했지만 시신이 100일 만에 발견되어서 부검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한 가지 여동생에게 미안한 것은 경찰서에서 첫날 저녁 작성한 사망 확인조서에서의 진술 내용들이었다. 여경은 집요하게 질문하였고 자살이란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 질문들에는 유도질문도 많았지만 형사로서의 직업상 질문이었기에 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몇 번의 자살 시도를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진술 가운데 하나는 내가 진술해야만 하였다. 그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2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았다.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진술하면서 테오도라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어렸을 때의 시도도 어머니 입을 통해 진술되었다. 그래서 조서는 엉뚱하게도 테오도라의 죽음을 점점 자살 쪽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확인사살이라도 하듯이 우울증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캐묻기 시작하였다. 타살이나 병사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의 제기를 하고 질문한 내용에 대한 답변 정도가 전부였다. 만약 약물이나 주사기 남용으로 인한 쇼크사일 경우 시신이 똑바로 누워있기는 힘들다. 하지만 시신은 똑바로 누어서 전기장판 위에서 잠을 자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형사는 나중에 노트북만 가져갔을 뿐 가장 중요한 테오도라의 휴대폰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휴대폰은 큰 오빠가 관리하였다. 나도 몇 번 보았는데 1월 말 발신 기록이 전부였고 그 이후에는 통화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 발신 기록도 병원에서 두 차례 정도 걸려온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전화 한 통 없이 무단결근하는 테오도라에게 2주의 시간을 주었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니 2주 후엔 테오도라는 이미 퇴사 처리되었다. 사유는 물론 무단결근이었다. 서울이 왜 무인도인지 그녀의 직장인 병원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병원에는 그녀의 동료들과 상급자 및 하급자가 있을 것이다. 단 한 사람도 왜 무단결근을 해야만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다른 좋은 직장에 생겨도 무단결근하며 바로 옮기는 사람은 없다. 퇴직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최소 가족이나 친구에게 연락을 취해 보는 노력 정도는 해주었어야 한다. 이점에서 가장 큰 아쉬움이 남는다. 병원을 탓하기 전에 가장 지탄받아야 할 사람들은 나를 비롯한 가족들이다. 100번 1000번을 지탄받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가족들과 직장은 물론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단절된 사람들이 느끼는 고립감은 심각하다. 주위에 부대끼고 마주쳐야 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물론 타인과의 관계는 자신이 만들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나처럼 혼자 지내는 사람들의 특징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고립감이다. 이러한 고립감은 집에 한번 들어가면 집에서 나오는 게 힘들다. 그냥 TV 리모컨을 쥐고 하루 종일 채널과 씨름하다 보내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에는 집은 잠만 자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들은 대부분 카페를 이용하고 있다. 외로움과 우울을 달래려고 커피숍이라는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아니다. 커피숍에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차 빈자리가 없다. 하만 아는 사람도 없고 대화 한마디 못하고 돌아와 집에서는 글을 읽고 잠을 잔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지만 대화는 고사하고 얼굴도 쳐다보기 힘들다. 진정한 무인도는 서울이었던 것이다. 타인들이 주변에 백사장의 모래알만큼이나 넘쳐나지만 섞일 수 없는 타인들이었다. 아무런 관계 설정도 하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무인도에서 간호사였던 여동생은 죽어갔고 그 죽음은 아무도 찾지 않는 슬픈 소설 같은 일이 되고 말았다.
여동생은 마지막 발신과 수신 기록은 1월 말이었다. 카카오 톡 메시지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여동생이 다니던 병원에 확인해 본 결과 2월 13일 자로 퇴사 처리되었다고 한다. 사유를 묻자 무단결근이었다. 병원 측에서도 1월 말에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시도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그 전화를 받지 못하였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인 1월 말이었다. 그 시점이 바로 동생이 사망한 시점이 되는 것이다. 병원에 출근을 하지 않은 시기가 바로 사망 시점이 되는 것이었다. 단지 추정이지만 통화내역이 유일한 단서가 될 수밖에는 없었다.
2월 초 설 연휴가 끝나도 출근을 하지 않자 병원 측에서는 여동생을 퇴사 처리하였다. 퇴사 처리를 하려면 퇴직금 등의 정산 문제가 남아있지만 더 이상의 접촉은 없었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주었으면 여동생이 사망해서 100일 동안이나 전기장판 위에 누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정하고 무서운 사회다. 서울의 같은 하늘 아래에는 천만의 사람들이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망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관계망의 틈은 크고 허술하였다. 어떻게 젊은 직장 여성이 서울의 한 복판의 집에서 죽은 지 100일 만에 발견될 수 있단 말인가?
병원 측의 태도를 탓할 생각은 없다. 병원 측에서는 오히려 무단결근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3교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직원 하나가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직원이 그만큼 더 일을 해야 한다. 퇴직금까지 포기하고 다른 병원으로 이직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병원을 탓할 수가 없다. 탓한다고 이러한 허술하고 무심한 사회의 관계망들에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병원 측에서는 여동생의 죽음을 유족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병원 측에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무단결근 사유에 사망이라고 적어 넣으면 끝일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퇴직금 정산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죽은 자의 퇴직금까지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다. 그녀가 살던 4층 빌라의 보증금도 그렇고 정리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고 복잡하였다. 한 사람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간단하지도 완전히 끝나지도 않는 어떤 연장선 위에 있었다.
나는 그 연장선 위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수없이 넘나들며 죽은 동생을 원망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자는 그 뒷감당을 해야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동생은 사후 장기기증에 서명을 하였다. 하지만 그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다.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하려던 여동생이었다. 죽음에 관한 화두는 우리 둘의 공통분모 중 하나였다. 나 또한 심한 우울증으로 늘 죽음을 생각하였다. 하지만 죽음은 쉽게 성취할지 몰라도 죽음 뒤의 처리가 너무 싫었다. 남겨진 자들에 대한 엄청난 피해를 주는 행위였다. 특히 어린 아들의 팔에 상주라는 두 줄짜리 완장을 끼어주는 일은 차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을 확률이 아주 높다.
아무튼 해고 처리된 여동생은 4층에 있는 집에서 홀로 누워 있어야 했다.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건물주도 멀리서 살았고 작은 빌라여서 관리인이 없었다. 3층까지는 두 집이 사는 형태였지만 4층은 한집이 사는 형태였다. 옆집이 없는 것이 100일 동안 발견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3층에만 살았어도 좀 더 빨리 발견되었을 것이다. 4월 달에도 건물에서 악취가 난다는 주민의 신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악취는 무시되었다. 아무도 4층을 주시하거나 생각하지 못하였다. 4층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백사장이 있는 무인도속의 또 다른 무인도였던 것이다.
상실의 시대에 굳이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이유는 막연하던 비현실 속의 상실이 점차 현실 속의 상실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상실은 아프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가며 성장해 왔고 성장해 갈 것이다. 상실이 주는 의미는 고립감에서 해방되고 탈출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지워내야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지워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테오도라를 내 마음속에서 지워내려 애쓰고 있다.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안함보다 더 아픈 것은 그녀를 지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픔이 밀려온다. 우리는 모두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백 년 천년 살 것처럼 날 띄던 권력자나 재력가들도 금방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적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바쁠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관계의 상실이다.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많은 인구를 도시로 유입시켰다. 그 결과 도시의 인구는 늘어나면서 수많은 의미 없는 타인들을 양산해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도시는 비대해져 가기 시작하였다. 나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줄곧 혼자 살아왔다. 삶은 단절되고 그 단절은 고립으로 다가온다. 그 고립이란 결과는 거대한 서울을 섬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것도 서로 의미 없는 천만이나 사는 거대한 무인도로 만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