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청년기의 우울과 외로움에 관한 연재
많은 현대인들의 화두는 풍요와 행복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산업화 이전의 화두가 끼니를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다면 지금은 그 행복의 범위가 더 많이 확장되었다.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기준도 달라졌다. 잘 먹고 잘 사는 일만으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다양성과 다름의 의미부터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만큼 행복이라는 단어는 중요해져가고 있다.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 강한 원동력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일 부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이고 어떻게 그 행복을 일상에서 접하고 즐길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의 의미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철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부류의 깊이나 넓이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사유가 필요하다. 이 사유에 대한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논란 자체는 나에게는 시간 낭비이고 무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 때문일까? 단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솔직히 존재의 의미를 아직도 찾지 못하였다. 불혹이 되고 지천명을 넘기는 나이쯤 되면 그 정도는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나 혜안이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도 전혀 모르겠다. 아니 감조차 오지 않는다. 단지 어머니가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때도, 수동적으로 살아낼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한가롭게 존재의 이유까지 고민하면서 살지는 못하였다. 철학자로서의 삶이 나의 직업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학문은 쉬운 말들을 어렵게 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이것도 물론 나의 주관적인 편견이다.
솔직히 나는 허무주의나 실존주의 철학을 들먹이며 존재의 의미를 설명할 능력도 없다. 단지 궁금한 것은 수많은 성직자들이 겪는 외로움이 나의 외로움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할 뿐이다. 성직자들도 인간이다. 신이 아닌 이상 성직자들도 외롭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시인은 신도 외롭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 외로움은 나처럼 평범한 일반인이 겪는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내 생각에는 단지 참고 견디어 내거나 다른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일 뿐이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감히 내가 성직자들이나 신까지 들먹이며 외로움이란 화두를 붙들고 늘어지는 이유는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의 차이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성직자들도 결국은 성직자이기 전에 포유류와 영장류의 한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모든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을 통제하고 또 다른 무언가로 승화시키는 능력의 원천은 단지 그들의 직업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동물적인 본능을 견뎌내는 일이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일까? 아니면 단지 규율이고 규범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것일까?
나는 초등학생처럼 상당히 단순하고 엉뚱하면서도 유치하기까지 한 상상을 즐겨한다. 그래서 한때는 나도 스님이나 신부님이 되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장벽은 나에게는 좌절이었고 나를 슬프게 하였다. 지난해 스님이 되려고 문의를 해보니 연령제한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미 그 나이를 지나 있었다. 신부님이 되려면 수사로 10년 이상을 수행해야 한다는 말에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발칙하게도 성직자들에 대한 본능이 궁금했던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 답은 행복이나 존재의 이유만으로는 그리고 심지어 원죄(sin)로도 찾을 수 없는 각자 개인의 문제임을 안다. 그것이 나를 더욱 외롭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오늘도 나의 짧고 얇은 생각의 한계를 탓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