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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15. 2019

나만 외로운 걸까? #11 추억은 확대포장된다.

후기 청년기의 우울과 외로움에 관한 연재

     

     


빈곤 속의 풍요

     

아주 어려서의 기억은 작은 것도 크게 확대 포장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은 일들은 기억이라는 것 자체에 포함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하리만큼 또래에 비해 유년기의 기억이 없다. 물론 사진도 남아있지 않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소풍 가서 친구들과 찍은 흑백사진과 졸업식 때 전교생 대표로 상을 받던 순간에 찍힌 사진이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무슨 상을 받았는지도 기억에 없다.

     

지난해 가을, 한국에 와서 유일한 낙중의 하나가 수원에 사는 친구와 가끔 만나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 하는 것이다. 그 친구는 대학시절 문학을 전공하였다. 나는 크고 작은 만남이나 모임에서 주로 대화를 주도하고 이끄는 스타일의 사람이다. 가끔은 스스로 깜짝 놀랄 때가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거의 꼰대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는 나를 인지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빈번하다. 그러나 수원의 그 친구는 유일하게 나를 무장해제시킨다. 그것도 아주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만나면 그 친구는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기만 한다. 마치 듣기 훈련하는 학생 같다.

     

내 인생에 있어서 나를 듣기만 하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희열은 크고 벅차다. 나도 모르게 지속적으로 이 친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친구와 대화의 희열 중에서도 으뜸은 세부묘사 능력이었다. 친구는 어린 시절의 흑백사진 같은 기억들을 너무나도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거기에 스토리까지 입혀준다. 그 스토리들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였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스토리들은 나를 타임머신에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매게 하고 있었다. 심지어 동네가 달랐는데도 나도 기억 못 하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내가 기억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독 어린 시절의 기억은 없다. 그래서 그 친구가 내가 살던 동네 이야기를 하면 나는 순간 바보가 되고 만다. 나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력이 없는 이유는 나도 알 길이 없다. 그 친구는 그 시절의 흑백사진 같은 이야기를 너무나 세부적으로 묘사해내는 기술이 있다. 그 시절의 특정 상황을 묘사해줄 때마다 나는 전율을 느낀다. 흑백사진이 칼라사진으로 변하는 그 순간의 기쁨은 나의 세포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의 놀이에 대한 이야기는 몇 회로 나누어 책으로 집필하고 싶은 욕심까지 생겼다. 그중에서도 동진강에서의 고기잡이는 압권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앞으로 동진강이라는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의 상류인 종산리라는 곳에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수력발전소가 있다. 섬진강댐에 저장된 물을 산의 낙차를 이용해 수력발전을 해서 전기를 생산한다. 수력발전을 하고 흘려보내지는 물은 동진강이 되어 호남평야를 적시는 젖줄이 된다. 사실 전기보다는 물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광활한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가려면 논농사를 위한 농업용수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강에서 밤에 횃불을 들고 고기잡이하던 40년 전의 이야기는 너무도 생생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던 기억만이 희미하다. 다슬기가 많았던 기억은 선명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별다른 놀이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 친구를 만나면서부터는 너무도 많은 놀이가 있었고 실제로 나도 그 놀이들을 하며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 놀이들은 고기잡이나 토끼잡이 또는 꿩 사냥 같은 생산적인 놀이부터 구술 치기, 동전 따먹기, 딱지치기 같은 약간은 도박이 가미된 것도 있었다. 순수한 놀이는 칼싸움, 연날리기, 제기차기, 오징어 살이 등 실로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우리는 놀이와 일을 구분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바쁘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놀이는 주로 하교 길에 모여서 하였다. 비 오는 주말 오후나 일요일에는 동네 단위로 모여서 놀았다. 그 외에는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공부라는 것은 시험 때나 잠깐 하는 것이었다. 유치원도 없던 시절이어서 그 흔한 태권도 학원 하나 없었다. 외롭거나 심심할 틈이 없었다. 놀이를 할 때는 동네 아이들이 다 동원되었다. 특히 축구나 야구시합을 동네 대항으로 하였다. 빠질 수도 없었다. 형들이 나오라고 하면 무조건 참가해야 하였다. 그만큼 그 시절의 인간관계는 끈끈하고 촘촘하였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학교에서는 번호로, 집에서는 넷째 아들로 불렸다. 내가 아닌 우리라는 단어가 항상 우선이었다. 나의 집, 나의 학교, 나의동네, 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우리나라였다. 어디에도 나라는 존재는 부각되지 않았다. 나는 공부를 제법 잘했지만 그런 사실에조차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왕따를 당하는 일은 없었다. 외롭다는 감정을 느낀 적도 거의 없었다.

     

내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의사소통은 직접 만나야만 가능하였다. 그래서 마을 단위로 놀이도 이루어졌다.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없던 어린 시절은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물론 그 행복은 내가 생각하는 주관적인 것이다. 지금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모두가 가난하였다. 설사 몇몇 부잣집이 있어도 그 차이가 지금처럼 부각되지 못하는 구조였다. 배가 좀 고프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지 못해도 행복하였다. 학원 문턱도 가보지 못하였지만 그런대로 공부도 하였다. 자신의 좋지 않은 성적을 비관하는 친구들을 본 적이 없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도 수원에 사는 친구나 나 정도는 승부욕 때문이었는지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별도로 공부를 해본 기억은 없었다. 수업시간이 공부의 전부였다. 물론 시험기간 때에는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긴 하였다. 어떤 아이들은 오히려 시험기간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하였다. 시험기간 동안은 오전에 시험을 보고 오후에는 일찍 하교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은 지금에 비하면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고구마나 감자 또는 옥수수 같은 구황작물이 유일한 간식거리였다. 좀 더 사치를 부리자면 학교 앞에서 팔던 핫도그 정도였다. 50 원하는 핫도그에는 흰 설탕을 듬뿍 뿌려 먹었다. 안에는 작은 밀가루를 섞어 만든 소시지가 끼어져 있었다. 취향에 따라 그 시절 귀한 케첩을 뿌려 먹기도 하였다.

     



특히 눈 오는 겨울날의 핫도그 하나는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둥글고 기다란 핫도그용 튀김 기안은 언제나 먹물을 갈아 넣은 색을 유지하였다. 언제 갈았는지도 모르는 식용유에 튀겨내는 핫도그였지만 그 시절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학교 앞에 있던 핫도그 가계를 그냥 지나칠 때는 유난히 배가 고팠다. 매일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용돈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행복하였다. 걱정할 일도 없었다. 외롭다는 개념 자체도 모르며 자랐다. 그렇게 평범하게 성장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유년기의 기억이 거의 없다. 심지어 내가 짝사랑한 중학교 때의 여학생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친구를 통해 편지를 몇 번이나 전해 주었는데도 기억이 희미하다. 그 여학생이 들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도 남을 만큼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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