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의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5월 둘째 주가 시작되면서 황금연휴가 끝나고 화요일이 찾아왔다. 화요일 오전까지 테오도라는 빈소도 없는 장례식장의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다행히 연휴가 끝나자마자 부검이 이루어졌고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예정 시각은 1시 반이었는데 30분이 빨라져서 1시에 테오도라는 장례식장에서 영구차에 실려 서초에 새로 조성된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테오도라의 오동나무 관이 영구차 버스에 실리고 유족들은 버스에 올랐다. 차를 가져온 일부 친지들은 승용차를 타고 영구차 버스를 따랐다. 테오도라는 그렇게 중국산 분홍색 수의를 입고 화장용 오동나무 관에 누워서 떠나고 있었다.
장례식장을 출발한 버스는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가 잠깐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가 다시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초 화장장에 도착하였다.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새로 조성된 화장장은 아름다운 공원 같았다. 모든 시설은 초현대식이었고 화장이 진행되는 건물은 호텔 같은 이미지였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테오도라의 순서가 왔다. 또 다른 장의사의 지도하에 테오도라는 버스에서 화장장으로 운구되었다. 그리고 배정된 화로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할 시간이 주어졌다. 가족들은 관을 만지며 울고 또 울었다. 큰 오빠와 어머니의 울음은 더욱 크고 애절하였다. 유독 많이 싸우고 척이 졌던 두 사람이었다. 혈육의 정으로만은 이해하기 힘든 가족사가 많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테오도라의 사촌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관은 매끈하고 한번 왁스가 칠해진 느낌이었다. 관 위에는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그 하얀 천들 위에는 가족들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었다. 참회의 눈물이었고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관을 두 손으로 만지며 용서를 빌 뿐 하얀 천으로 덮인 관위로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눈물은 가슴속에서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눈 밖으로 전혀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 10분도 채 안 되는 가족과의 이별 시간을 마치자 테오도라는 이미 예약된 2–7번 화로로 이동하여 2시 32분에 화로에 들어갔다. 우리는 7호실 방에 들어가서 가져온 김밥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그녀가 화장되는 과정은 방에서도 모니터로 표시되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14:41-16:01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정확히 1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김밥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며 가족들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다. 그저 고통으로 얼룩진 시간들이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장례 절차 이후의 떠나는 자의 뒤처리가 주로 화재로 올랐다.
떠나는 자는 화로에 있고 남은 자는 안락한 방에서 김밥을 먹으며 화장이 되는 과정을 모니터로 체크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세계에서는 매치가 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그림이었다. 그렇게 떠나는 자는 뜨거운 화로 안에서 불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있었다. 상실이 아니라 소멸이었고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죽음의 완성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객관화시키고 있었다. 이미 마주한 죽음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죽음의 실체였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죽음의 실체는 슬픈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것이었다. 장의사들이 대하는 죽음은 일상이었고 생활이었다. 제품이 공장에서 생산되고 쌀이 논에서 경작되어 나오듯 생산된 죽음 또한 여러 사람의 노동이 제공되어 처리되는 유형의 과정에 불과하였다. 그 죽음을 동경하고 죽지 못하여 그토록 힘들어하던 나를 돌아보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가까스로 눈물을 견뎌내고 있었다. 이제는 죽음에 대한 허상이나 환상이 사라지길 바란다. 떠나는 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 침묵 속에 흐르는 슬픔은 고스란히 남은 자들의 몫이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한다.
떠나는 자는 1시간 20분 동안 뜨거운 화로 안에서 불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 과정은 실시간으로 모니터에 떠서 남은 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테오도라가 떠날 때 바로 옆에는 나이가 제법 든 중년 남성이 떠나는 자가 되어 옆의 화로에서 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이루어져서 유족끼리 서로 어색한 조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휠체어를 탄 중년 여성이 유독 소리 내어 울며 남은 자의 역할을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끝내 실신하여 구급차를 부르고 난리가 났다. 한쪽에서는 심장 흉부압박을 하고 있었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저러다 또 남은 자 마저 떠나는 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유족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은 그저 타인들의 것에 불과하였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또 다른 완벽한 타인이 되어 타인의 위태로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관계에 대한 애착이 저렇게 강할 수도 있을까를 생각하니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어머니가 화로에 들어갈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나는 독종이고 기본조차 안 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어머니나 여동생은 내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모르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예의는 상대방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첫 번째인데 나는 아무래도 공감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사람 같다.
남은 자들은 각자가 감당할 만큼의 슬픔을 얼굴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운 가족들이 대부분이지만 나처럼 눈시울도 멀쩡하고 표정에 변화가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미 죽음에 대해 정의가 되어있고 죽음 또한 삶의 일부이고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시켜본다.
나는 7호실에서 김밥을 먹으며 화장 과정을 모니터로 계속 응시하였다. 가족과 친지들에게 여동생의 사인불명에 대해 논의를 하려고 큰오빠가 녹음한 부검의의 진술을 들었다. 부검의의 소견은 예상한 대로 사인 불명이었다. 형사들은 침입 흔적이 없다고 타살의 가능성은 일단 배제하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자살이나 병사로 몰아가는 분위기여서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엇갈릴 뿐 뚜렷한 입장이 없었다. 그녀가 사망한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망 후 100일 동안이나 발견이 되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제가 먼저였다. 100일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함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미안함과 어이없음은 물론이고 철저하게 고립된 타인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결국 비난의 모든 화살은 가족들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비난에 유독 민감한 사람은 테오도라의 친오빠였다. 장남으로서 모든 일처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친사촌 오빠가 뒤늦게 7호실 방으로 찾아와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항의하듯 따져 물었다.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김밥을 먹다가 잠시 멈칫하였지만 친오빠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100일이라는 단어에 집착해봐야 현실 세계에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처리해야 할 일들과 최종 부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에 집중하자고 하였다. 그 말들을 곱씹어 보니 남아있는 자들의 변호인이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즉, 떠나는 자인 테오도라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로 들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말이었다. 책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그 말은 오후 내내 나를 혼란 속에 빠트리고 말았다.
남은 자들이 연합하여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저버리게 된 자기 합리화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자기 합리화가 아니었다. 테오도라의 잘못도 컸다. 이제 와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진다고 달라질 상황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고 복잡해졌다. 남은 자들은 그렇게 각자의 슬픔을 표현하며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죽음의 실체 앞에서 어떠한 것도 합리화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16:01분에 끝난 화장은 약간의 냉각시간이 필요하였다. 세탁기가 세탁이 끝났다고 문이 바로 열리지 않는 것과 유사하였다. 순간 왜 세탁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4시 반쯤 되자 유족들은 유골수습실로 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유골은 하얀색을 띠는 뼈만 몇 개 남아 있었다. 마스크를 쓴 직원이 가족들에게 유골을 보여준다. 그리고 잠시 후 분쇄기에 넣어진 몇 개의 뼈마디들은 곱게 밀가루처럼 뽀얀 가루가 되어 나왔다. 두 주먹 정도 되는 분량이었다. 하얀 종이에 그 가루들을 쏟아서 정성스럽게 포장을 하는 직원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였다.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족들의 표정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하나님 아버지를 애달프게 찾으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종이에 두 번 포장된 유골은 우리가 미리 준비해온 납골함에 넣어져서 연한 하늘색 보자기에 포장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유족 대표에게 인계되었다. 영정사진이 앞장서고 있었다. 올 때와는 달리 그 납골함은 버스 좌석에 앉아 있었다.
4시 50분에 장의버스는 서초 화장장을 떠나 벽제에 위치한 새롭게 조성된 추모공원으로 향하였다. 벌써 서울의 도로는 사방이 막히고 있었다. 어느 다리인지는 모르지만 버스는 어느새 한강 다리를 건너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여동생이 가루가 되어 들어있는 납골 항아리를 안고 있었다. 왼쪽 창밖으로 보이는 강변북로는 한강을 낀 채 버스는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한강의 물결들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개나리는 이미 꽃이 말라 비뚤어지고 형체만 겨우 남아있었다. 대신 초록에게 세상을 내주었다. 곳곳에 철쭉이 까치발을 들고 테오도라를 맞이하고 있었다.
운동하기 위해 토요일 이른 아침마다 반포 운동장으로 향하던 제법 익숙한 강변북로였다. 그 익숙함은 어색하고 복잡한 심경만큼이나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의미 없이 지나치던 수많은 차들과 아파트와 빌딩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두 낮은 야산처럼 느껴졌다. 시멘트로 만들어놓은 야산에는 모래알 같은 천만의 인구가 개미처럼 역동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한강은 무인도를 남북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개미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그렇게 많은 다리를 만들어 놓았고 부지런히 건너 다니고 있다. 몇 개의 다리를 지나고 또 지나서 5시 25분경에 작은 하천인 고산천을 지나고 있었다. 한강에 다리가 이렇게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벽제의 추모공원 역시 새롭게 조성된 곳으로 깨끗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자랑하고 있었다. 장의사 버스에서 내려진 테오도라는 추모공원 안쪽에 마련된 작은 성당에서 잠깐 미사를 보게 되었다. 안치하기 전에 나누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 미사에서 어머니는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몇 자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구구절절 미안함과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편지 낭독이 끝나자 직접 찬송까지 부르며 딸에게 마지막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늙은 어머니의 한이 온몸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남아있는 자가 차려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