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죠지의 달력

도쿄 키치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충분했던 날

by 오승현


작년 여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도쿄 여행을 했습니다. 우리는 키치죠지라는 조용한 동네를 자주 찾았고, 아내가 가고 싶어 하던 카페에도 들렀습니다.


그런데 카페 도착한 지 일분도 안 되는 사이, 막내 은우가 들뜬 마음에 뛰어놀다 카페 문턱에 걸려 이마를 다쳤습니다.


은우의 이마는 깊게 파여있었고, 손수건이 금세 붉게 물들 정도였습니다. 카페에 있던 일본인들은 이런 상황이 걱정됐는지 숨죽이며 지켜봤습니다.


저는 막내 아이를 급히 업고, 아내는 구글맵으로 근처 병원을 검색하며, 남은 두 아이들과 함께 근처 병원을 향해 뛰었습니다.


키치죠지에 있었던 병원은 작은 의원이었습니다. 그날따라 환자가 많아 수술과 대기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병원에서 보호자 한 명만 남으라고 했기에. 저는 첫째 딸 은비와 둘째 아들 은율이와 병원 밖을 나와, 5시간 동안 키치죠지 골목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동생을 걱정하는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 갔던 카페에 다시 들러 커피와 케이크를 먹고, 그날 생일이었던 아내를 위해 꽃다발을 샀습니다.


아내로부터 수술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렇게 다시 걷는 거리에는 어떤 평범함보다 더 짙은 하루가 스며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문방구에 들러 아이들은 엄마에게 줄 생일카드에 정성스레 편지를 쓰고, 저는 손으로 한 장씩 뜯는 작은 달력을 하나 샀습니다.


예쁜 모빌, 엽서들 사이에 놓여 있던, 작고 아기자기한 그림 달력이었습니다.


노을 진 어스름한 저녁,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막내를 안으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패밀리마트 앞에서 아내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가족의 소중함을 모두가 경험하는 애틋한 시간이었습니다.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였지만, 그날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그 달력은 사무실 책상 위에 있습니다. 매일 한 장씩 뜯으며 하루를 넘기고, 어떤 날은 바빠서 일주일치를 한꺼번에 뜯기도 합니다. 한 장 한 장에 그려진 각기 다른 그림을 음미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오늘은 7일째 통째로 뜯는 날이었습니다. 달력을 뜯으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빴을까? 시간을 누리기보다는 시간을 처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루하루 음미하기보다, 며칠치 삶을 뜯어내듯 살아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을 뜯는 삶이 아니라, 향유하는 삶을 살면 좋을 텐데.


벌써 절반이 뜯겨버린 달력을 보며, 키치죠지의 그 문방구를 다시 떠올립니다. 다음에도 그곳에 가면 또 같은 달력을 살 겁니다.


똑같은 달력을 사더라도, 이번엔 다르게 하루를 뜯고 싶습니다. 하루하루를 더 느리게, 하루하루를 더 진심으로! 시간을 뜯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도 그 달력은 키치죠지의 노을 진 골목으로 저를 안내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삶의 온기로 충만했던 그곳으로 나를 이끌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