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박준, <계절산문>

by 오승현





누군가 아빠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아빠는 가끔 이렇게 말해.


“존재하는 거라고.”


이 말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잘 이해하지 못해.


그래도 괜찮아.

꿈이라는 건

모두가 알아듣는 말일 필요는 없으니까.




은비야,

너는 아빠에게 참 소중한 딸이고,

아빠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느냐는

너희의 삶에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오늘은

아빠가 왜

순례를 꿈꾸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조금 남겨두려고 해.




아빠는 서울에서 태어났어.

흙을 손으로 만져본 기억이 그리 많지 않아.

가족 말고는 사람의 온기를

천천히 배워볼 기회도 많지 않았지.


스무 살 무렵,

목회자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갔고,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

정장 차림에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 앞에 서서 설교를 하게 되었어.


아빠는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어서,

누군가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어.


어쩌면 그때부터

(나의 내면을 더 가꾸기보다)

강단 위에서 겉으로 보이는

목회자의 모습을 완성시키기 위해

애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이젠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될 만큼, 정말 많이 노력했던 것 같아.


하지만 아빠에게는 문제가 생겼다.

강단 위의 내 모습과 내 삶 사이의 간극,

그 사이에서

아빠는 자주 혼란스러웠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어.


그때 처음으로

아빠는 생각했어.


강단이 아니라,

길 위에 서보고 싶다고.


‘길 위에서,

진실한 인간이 되고 깊다고 ‘


흙의 온기를 느껴보고 싶다고,

시장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고,

정의와 공의를 입술이 아니라

성경 속 선지자처럼

작은 몸으로 외쳐보고 싶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돌보는 인간.


아빠에게 성숙한 신앙은

신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어.


그게

아빠 신앙과 목회의

지금까지의 결론이야.


그래서 사람들 눈에는

조금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도 모를

순례를

아빠는 꿈꾸게 되었어.


거창한 순례는 아니고,

작은 나를 완성하는

나만의 순례란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해,

이런 피상적인 삶을 살고 죽는다면,

삶의 *골수를 누리지 못하고 언젠가 죽는다면,

눈을 감으며 얼마나 후회가 될까 생각해 본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월든’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인데, 글을 쓰다 갑자기 이 단어가 생각났어.)


그래서 강단이 아니라

길 위에 서는 삶을,

그런 순례를 꿈꾸게 됐어.




아빠가

『계절산문』이라는 책을

오랫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고,

사람들에게 자주 선물했던 이유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인 것 같아.


이 책의 문장들은

지금 여기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의 언어처럼 느껴졌거든.


계절을 느끼며 살고,

사람과의 만남을 귀하게 여기고,

자연과 음식, 기억과 그리움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


박준 시인의 문장들은

책상 위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길 위에서 혼잣말 속에서,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연인과 친구, 그리고 선배와의 만남 속에서,

제철 음식과 계절의 냄새 속에서

그렇게 길 위에서 수집된 말처럼 느껴졌어.


그래서 그 글들에는

설명보다

사람의 온기가 먼저 닿았어.


마치 나무처럼,

사계절을 견디며

자기 자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물론

그와 아빠의 길은 다르고,

지향점도 같지 않아.


하지만 아빠는

그의 글을 통해

이런 삶을 배우고 싶어졌어.


표피만 남은 삶이 아니라,

길 위에서 부대끼며

천천히 끌어올린 문장과 신앙.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낸 사람이 남긴 말로

살아가고 싶어졌어.




그래서 아빠는

순례를 생각해.


지금은

아빠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너희와 소중한 추억을 쌓기 위해

이렇게 책장만 조금씩 정리하고 있지만,


언젠가

너희가 아빠의 이 꿈을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아빠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있어.


“꾸었던 꿈과

흘렸던 땀이라

말해야 했는데


꾸었던 땀과

흘렸던 꿈이라

말하고 말았습니다.


네 앞에서 이런 잘못은

이제 잘못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


이 문장을 이해하기까지

아빠는

오랜 시간을 머뭇거렸고,

이 글을 쓰며

비로소 조금 알 것 같아졌어.


언젠가 은비가

이 문장을

너의 삶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때 은비는

이미 순례자의 첫 발을

길 위에 올려두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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