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끝에서 우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

by 오승현





사랑하는 은비, 은율, 은우야. 아빠가 오늘 너희에게 들고 온 책은 <걸어도 걸어도>라는 책이란다.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이 만든 영화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야.


아빠와 엄마가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너희들과 함께 자주 속초에 갔지. 속초에 가면 늘 들르던 장소들이 있었어. 아빠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아인슈페너가 있는 카페 ‘어나더블루‘에서 커피를 마시고 (너희는 늘 딸기라떼를 마시지만), 그리고 속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동아서점에 들러 각자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씩 고르는 그 순례 코스 말이야.


아빠는 지금까지 가본 책방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동아서점 큐레이션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 그래서 그곳에 가면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충동을 조절하느라 늘 애를 먹곤 했단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달고, 짭짤하고, 상큼한 아인슈페너가 다시 생각나고, 속초 바다도, 동아서점도 또 가고 싶어 지는구나.


아마 그날도 그 순례 코스를 따라 동아서점에 들렀던 것 같아. 그곳에서 아빠가 고른 책이 바로 이 <걸어도 걸어도> 였단다. 영화로 이미 본 작품이었지만, 책으로 읽으면 또 어떤 감동이 있을까 싶어 자연스럽게 손이 갔던 책이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는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견디기 위함이었다고 말했어. 그는 이 책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이야기라고 했단다.




이 책의 줄거리는 단순해. 주인공 료타와 그의 가족은, 10여 년 전 바다에 빠진 소년을 구하려다 죽은 장남 ‘준페이’의 제사를 위해, 매년 여름 고향집에 모이는데. 그해, 이틀간의 이야기야.


연로한 어머니는 아들이 떠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매일같이 준페이를 기억하며 그리움 속에 살아가고 있지.


아버지는 은퇴한 시골 병원의 의사로, 조금은 권위적인 인물로 그려져. 그에게 가장 큰 자랑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던 장남 준페이였단다.


주인공 료타는 어릴 때부터 형과 비교당하며 자랐고, 그로 인해 아버지를 향한 상처와 반감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인물이야. 그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한때는 학교 공방에서 회화 복원 일을 했지만 지금은 실업자 신세가 되어 그 사실을 끝까지 부모에게 숨기고 있지.


료타는 유카리라는 여인과 결혼했어. 유카리는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아들 아쓰시를 홀로 키우는 지혜롭고 따뜻한 사람이야. 형의 기일에 료타는 아내 유카리와 아들 아쓰시를 가족에게 처음 소개하게 되고, 유카리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시부모를 만나는 일 앞에서 조심스럽고 긴장된 마음을 안고 그 집을 찾지.




이 책과 영화에서 아빠의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긴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이었어. 멀리 보이는 그 바다는 사랑하는 아들이자 형이었던 준페이가 세상을 떠난 바다였고,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준페이의 묘지가 있단다.


부모는 일상 속에서 그 계단을 바라보며 오르내리고, 이제 서른을 훌쩍 넘긴 료타 역시 예전에는 홀로, 지금은 아내와 아들과 함께 그 계단을 오르내리지.


저마다의 아픔을 안은 채,

저마다의 현실의 무게를 지닌 채,

그들은 그렇게 걷고, 또 걷지.


사실 유카리의 아들 아쓰시에게도 극복해야 할 아픔이 있었어. 영화에서는 스쳐 지나가듯 나오지만, 아빠를 잃은 어린아이가 그 슬픔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아빠는 마음이 많이 애잔해졌단다.




이 작품에는 사람마다 걸어야 할 길이 등장해. 어떤 길은 오르막 계단으로, 어떤 길은 내리막 계단으로, 어떤 길은 꼬불꼬불 평평한 골목길로, 또 어떤 길은 바다가 보이는 육교로 나타나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아픔과 숙제를 안고 묵묵히 걸어야 하는 존재들 인지도 모르겠구나.



영화의 마지막에 아버지와 료타, 그리고 아쓰시가 함께

육교를 올라 바다를 향해 가는 장면이 나와. 그 바다는 큰아들이자 형이 세상을 떠난 바다였지. 아쓰시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아버지는 그 기억 때문에 멀리서만 바다를 바라봐.


“우리가 도착했음을 확인한 아쓰시는 돌아서서 육교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조금 주저하는 듯하다. 저 끝에 보이는 바다는 형이 빠져 죽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쓰시에게 이끌리듯이, 아버지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산책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에는 다리에 마비가 와서, 계단은 고사하고 그냥 걷다가도 발이 걸려 넘어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된 아버지는 갑자기 노쇄해지셨다." (P.173)


이듬해, 아버지는 다리에 마비가 와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급격히 노쇠해지셨다고 책은 말해. 아빠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왜 인생이 ‘도착’이 아니라 ‘걷는 일’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단다.




아빠는 이 장면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인생은 함께 걷는 길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각자가 홀로 감당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서로를 향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아빠가 걸어온 길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길도 떠올랐어. 신혼 시절, 첫째 은비를 임신했을 때 아빠는 대학원생이었고 엄마는 부천에서 강남까지 출퇴근을 했지. 그땐 우리 집에 차가 없어서 아빠는 늘 지하철역에서 엄마를 기다렸고, 배가 불러 힘들어하던 엄마의 등을 밀며 가파른 언덕 위 집으로 함께 올라가던,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길이 있었단다.


또 제주 서귀포에서 살던 5년 동안, 아빠가 힘들 때마다 찾았던 새벽녘 법환포구 해안길도 생각나고. 목포에서 살던 시절, 유달산 아래 골목길과 비탈길을 오르면 나오던 놀이터에서 (제주로 출항하는 자유로운 여객선을 바라보며) 나눴던 이야기들도 떠오른다.




사랑하는 은비, 은율, 은우야.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걸을 거야.


아빠는 작년에 오른발을 크게 다쳐 입원하고, 수술하고, 재활하며 이제야 다시 걸음을 떼고 있는 중이야. 휠체어, 워커, 목발, 지팡이… 이전에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던 도구들을 쓰며 아빠는 중요한 걸 하나 배웠단다. 걷는 도구의 미세한 차이, 걷는 방식의 아주 작은 차이가 생각과 삶의 폭을 크게 바꾼다는 것.


그리고 걷는 길에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그러면서도 그 길은 각자에게 허락된 고독한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야. 그 고독한 길 위이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아빠는 몸으로 배웠어.




너희가 살아가다 보면 길이 버겁고 힘든 순간도 분명 올 거야. 그럴 때 혼자만 걷고 있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아무리 어두운 절망 속에 있다 할지라도. 걷다 보면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뜻을 만나게 되고, 예상하지 못했던 위로와 선물도 어느 날 발견하게 될 거야.


너희의 걸음에 이러한 은총의 선물이 가득하길,

아빤 늘 응원하고 기도할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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