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에 대하여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by 오승현






사랑하는 은비, 은율, 은우야. 오늘은 아빠가 어떤 책을 너희에게 소개할까 고민하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외출하지 못하던 시절, 방 안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책이야.


이 소설은 한 편의 수채화 같은 이야기야. 소설의 배경은 근대와 현대가 교차하던 1930년대 영국. 가치관이 크게 흔들리던 격변기에 주인공 스티븐스는 평생 한 저택을 관리해 온 집사였단다.


스티븐스는 주인인 달링턴 경을 깊이 신뢰했고, 그의 저택을 관리하는 일을 자신 인생에서 가장 큰 명예로 여겼지.. 그는 그곳에 머무는 삶 자체를 ‘위대한 집사’(자칭)의 삶이라 믿으며 살았어.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아빠가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스티븐스가 끝내 한 번도 자기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어.


스티븐스는 집사라는 역할에만 충실하느라 삶이 허락한 중요한 선물들을 흘려보냈단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사랑했던 여인 켄턴 양을 붙잡지 않았지. 그 순간들은 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역할’에 밀려 흘러가 버린 시간이었어.


이 소설을 읽으며 아빠는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면 지켜야 할 가치, 붙들어야 할 사람,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놓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야.


그렇다면 스티븐스가 그렇게 충성했던 달링턴 경의 결말은 어땠을까?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친나치 성향이 드러나며 역사의 심판을 받고 몰락한 인물로 그려진단다.


스티븐스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끝까지 주인을 미화하고, 그를 섬겼던 자신의 삶 역시 의미 있는 것으로 붙들려하지. 왜냐하면 그것이 무너지면 자신의 인생 전체가 흔들릴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야. 그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시대의 잘못된 선택에 깊이 연루된 삶을 살게 된 셈이었어.




소설은 달링턴 경의 죽음 이후, (저택의 새로운 주인) 미국인 신사 페러데이의 배려로 스티븐스가 6일간 영국 여행을 떠나며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담담하게, 때로는 그리움과 회한 속에서 자신의 ‘남아 있는 나날’을 돌아보는 이야기야.


여행 중, 그는 중년이 된 켄턴 양과 재회하게 되지. 그녀는 이제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 있었고, 스티븐스는 그녀 앞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회한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놀라운 건, 켄턴 역시 스티븐스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 고백 앞에서 스티븐스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지. 그러나 소설 끝까지 그는 그녀이게 사랑했다고, 그리웠다고, 미안했다고 말하지 않아.


마지막까지도 집사라는 역할 뒤에 숨어 자신의 감정 앞에 설 용기를 내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여인을 사랑했던 감정마저도, 끝내 말로 꺼내지 않은 채 묻어 버리지.




아빠는 이 모습을 보며 생각했어. 스티븐스는 악한 사람이기보다는, 자신의 인생 앞에서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아빠는 너희가 주체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아빠가 목회자라 너희들이 어릴 때부터 교회 안에 있는 삶을 살겠지만, 신앙조차도 누군가 대신 정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고 선택하는 사람이 되기를 늘 바란단다.


세상 앞에서,

친구와 상사의 지시 앞에서,

신앙과 돈 앞에서도

너의 존엄성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먼저 너 자신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허락하신 선물을 지키며,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아빠는 이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단다. 그래서 지금도 돌고 돌아 혹독한 수업을 배우는 중이야.


언제나 기억하렴.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따르지 말고, 어떤 신념이나 종교도 그것이 너의 대지에 너를 깊이 거하게 만드는지, 아니면 그 대지를 버리거나 떠나게 만드는지 늘 유심히 살펴보며 분별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타인의 판단에 나의 가치를 맡기는 삶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삶의 키를 누군가에게 넘기지 않는 너희들이 되면 좋겠구나.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스스로 속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돌아본다는 건, 되돌릴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삶에 있다는 청신호이니까. 그 속에서 우리 모두 낙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아빠와 너희들 모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때론 수정하며, 삶이라는 항해를 계속해나가면 좋겠구나.




너희들이 좀 더 커서 삶이 무료하거나, 선택의 갈림길에서 밤을 새는 날에는, 아빠가 추천하는 이 책 <남아 있는 나날> 잃어보는 것 적극 추천한다. 그리고 이 책 읽는 것도 너희들 자유란다. 너희들의 남아있는 나날에 은총이 가득하길. 사랑하는 아빠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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