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한 일
쌀쌀한 바람 속에서, 봄을 기다리며 (무농)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열흘쯤 남았다. 달력은 이미 봄을 가리키고 있지만, 공기에는 아직 겨울의 기척이 짙다. 어제의 포근함을 믿고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오전에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작은 설렘이 실려 있었다. 봄을 한발 먼저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참을 걷자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며 생각보다 매섭게 몸을 식혔다. 계절은 기대만큼 빠르게 바뀌지 않았다.
이미 집에서 꽤 멀어진 뒤였다. 돌아가기엔 아쉬웠고, 그대로 느린 걸음을 고수하기엔 추위가 만만치 않았다. 준비 없이 나온 나 자신을 탓하는 마음이 스쳤지만, 이내 선택은 분명해졌다. 원망 대신 움직임을 택하기로 했다. 걸음에 속도를 더하고, 짧은 달리기를 반복했다.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힘차게 뛰자 몸 안에서부터 서서히 온기가 피어났다. 차가운 바람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나를 위축시키지는 못했다. 환경은 그대로였지만, 나는 달라져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봄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데려오는 계절이 아니라, 추위를 견디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체감되는 변화라는 것을. 달력은 방향을 알려줄 뿐, 계절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감각과 태도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를 지켜준 것은 완벽한 대비가 아니라, 상황에 반응하는 유연함과 멈추지 않는 실천이었다.
우리의 일상 또한 다르지 않다. 계획은 쉽게 어긋나고, 기대는 종종 빗나간다. 그때마다 우리는 흔들리며 스스로를 나무란다. 그러나 삶은 준비된 장면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예상 밖의 순간을 어떻게 건너는지가 삶의 밀도를 만든다. 추위 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듯, 흔들림 속에서도 한 걸음 더 내딛는 태도가 우리를 단단하게 한다.
오늘의 산책은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따뜻함은 기다림의 결과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선택이라는 사실, 그리고 봄은 자연의 계절이기 전에 마음의 계절이라는 깨달음이다.
나는 오늘도 봄을 열망한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선물이 아니라,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스스로를 데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조용히 스며드는 시간임을. 그래서 오늘의 쌀쌀함마저 감사하다. 이 여백과 인내가 있기에, 다가올 봄은 더욱 또렷하고 따뜻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