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8일이구만.
2024년 12월 8일. 아이와 교회에 가려고 밖에 나왔는데, 바람이 어제와 달랐다. 목도리도 모자도 없이 나온 것이 후회될 만큼 차가운 바람이 목과 얼굴을 훑으면서 내 귀한 체온을 빼앗아 갔다. 아이는 왜 저만 목도리와 모자를 해야 하냐며 나도 꼭 하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게, 다음에는 엄마도 꼭 해야 겠네. 말하며 교회에 다녀오고 나니, 문득 이 추운 날이면 생각이 나는 인물이 다시금 떠올라 왔다.
그는 1801년 12월 10일, 음력으로는 11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와는 살았던 시대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지만, 나는 10여 년 전에 그에게 푹 빠져서 소설을 쓰겠다고 자료 조사를 하고 강남에 있는 도서관까지 오가곤 했었다. 그 소설은 아직도 다 완성을 못 했다. 10여 년 전에 일단 마무리를 짓고, 도저히 이대로는 출간을 못 하겠다 싶어 그냥 두었다가 최근 몇 달 전에 다시 수정을 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올해 12월 25일, 성탄절 전에 완성해서 출간을 해 보는 것이었으나 실패했다. ‘그래, 부활절도 있어.’ 나는 다시 소망을 품었으나 안 되면 내년 성탄절이라도 출간을 하는 것이 일단 목표이긴 하다.
굳이 부활절과 성탄절을 노리는 이유는 있다. 그 인물이, 지독하게 사랑했던 인물이 바로 예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의 탄신일이나 부활절에 맞추어 출간을 하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모두가 좋아할 결론에 이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꼭 그 날짜에 맞추지 않아도 좋다. 죽기 전에만 출간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계속 가지고 있다가, ‘나 죽으면 출간해 줘’를 유언으로 남기면 글이 똥망이어도 내가 결과를 알 수 없으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나는 그 소설을 쓰긴 써야 한다.
그는 조선 시대의 천주교인이었다. 조선 시대는 유교 사회고, 성리학을 제외한 종교는 모두 ‘이단’으로 규정했던 시대였다. 그런 데다 지배층들은 외세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무조건 그들은 자기들에게 해를 끼칠 존재들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 이들에게 ‘천주교’는 서양 귀신이 우리 나라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지식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천주교’가 성리학의 폐해를 뛰어 넘을, 새로운 진리라고 확신했다. 신분과 성별에 따른 차별을 하고 지배층만 배불리는 종교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종교라고 생각했다.
황사영은 그런 젊은 지식인 중의 하나로, 당시 천주교 공동체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16세에 소과에 급제하였다. 천재로 불리는 정약용도 소과 급제는 20대 초반에 했다.(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평생을 공부해도 소과 급제를 못 하는 양반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황사영은 대대로 벼슬을 한 양반 집안에서 본인도 십 대에 급제를 했다. 지금으로 굳이 비교하자면 스무 살도 안 되어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것이다. 황사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당시 왕이었던 정조는 그의 손목을 잡으면서 ‘내 너를 스무 살에 부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정조가 황사영을 스무 살에 불러서 발이나 닦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왕이 굳이 어린 소년을 불러 그렇게 이른 것은, 적어도 정승 자리는 보장해 주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혼 후에 정약용 집안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정약용은 배교하고 벼슬을 선택했으나(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고민과 선택을 나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황사영은 왕에게 손목까지 잡혔으면서도 벼슬길을 버리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 공부에만 매진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양반 사회에서 배척을 당해야 했다. 함께 수학하던 벗들은 손절한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 그럼에도 그는 새로운 공동체에서 자신이 배운 교리를 전하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갔다.
그는 십 대에 진사시를 합격한, 양반 중의 양반이었으나 천민과 친했다. 천민 중의 한 명인, 백정 남송로라는 사람은 심지어 황사영의 집에 기거하기도 했다. 당시 천민은 ‘상종을 말아야 할 종족’이었다. 양반이 천민과 어울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황사영은, 제가 천주교에서 배운 교리대로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게다가 불구여서 아무도 어울리지 않는 이경도라는 양반에게 친히 찾아가 벗이 되어 주었고, 심지어 배교를 했다는 이유로 천주교 공동체 안에서도 배척을 당하는 이들에게 찾아가 위로를 전했다. 천주교 여성 공동체에서 배척을 받은 여성을 제집에 들이기도 했는데, 이 여성은 그 고마움에 황사영의 딸의 옷을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의 우리나라 사람이 기억하는 황사영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나오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쓴 ‘백서’ 때문이다. 그 백서는 황사영이 박해가 시작된 후에 도망가 한 토굴에서 몇 달 간 기거하며 집필한 것으로, 청나라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박해 상황의 조선의 현실을 알리고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였다. 문제가 되는 구절은 외국의 선박에 군대를 싣고 와서 우리 나라를 위협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해 달라는 구절이었다.
그 요청 때문에 역적이 된 황사영은 1801년 12월 10일, 아마도 칼바람이 불었던 어느 날에 능지처참을 당했고, 그의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아들(위에 나왔던 딸은 어릴 때 죽은 것으로 보인다)은 노비가 되어 지방과 섬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당시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는 황사영의 백서를 읽고 진노하여 천주교의 씨를 말릴 것을 명령하고 그 후에도 천주교인들만 잡으면 ‘황사영과 한 패’라고 하면서 더 엄하게 추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사영은 같은 천주교인들에게도 배척 당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를 매국노라 여기는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를 매국노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일일이 반박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백서에서 문제된 구절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박해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황사영처럼 생각한 인물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당시에 천주교인 지도자가 씨가 말라서 상의할 사람이 마땅히 없던 상황이어서 망정이지, 만약에 있었다면 이런 방식은 옳지 않다고 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자신의 공동체가 사라져 가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잡혀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 스물 여섯 살 밖에 되지 않는 젊은 지도자가 했어야 할 선택이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를 생각한다.
1800년, 정조가 죽고 나서,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 김씨는 정조의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서 천주교인들을 다 잡아 죽이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아무런 죄도 없이 오로지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잡혀가서 죽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는,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자신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계속 죽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와 자수를 했다. 그의 목이 높이 매달렸다는 소식을 토굴에서 들은 황사영은 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 억울하고 답답하고 분노한 심정은 정제되어 그의 ‘백서’에 실렸다. 아마도 외국 군대 요청도 주문모 신부의 죽음에 따른 충격 때문에 생각해 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다. 외국에서 귀한 걸음을 한 신부들을 더는 그렇게 죽게 하지 않겠다는, 황사영의 신념이 배어 있는 요청이 아니었을까.
나는 소설을 쓰면서, 토굴에서 동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곡기를 끊고 절망하는 황사영의 심경을 몇 번을 쓰고 고치고를 반복해야 했다. 아무리 써도 그의 마음에는 가 닿을 수가 없었다. 도망자의 신분으로 그는 죽기 전에 뭐라도 하고 죽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이고, 후회 없는 심경을 백서에 담았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라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지켜주지 않는데, 오히려 아무 죄도 없는 천주교인들을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유로 죽이고 있는데, 그 종이 한 장에 열망들을 담아 보내려고 한 그 마음을 내가 감히 죄라고 할 수 있을까.
나라 상황이 어지럽다. 그의 백서에 쓰인 말로 ‘천주강생후’ 2024년. 대통령이라는 자는 본인과 본인의 처를 위해 군대를 일으켜 백성들을 위협하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더는 조선이 아니며, 우리는 토굴에 갇혀서 외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실시간 우리의 상황을 SNS에 올리며, 평화적으로 광장에 모여 우리의 바람을 전한다. 그러나 그가 백서에 전한 진심이나, 우리가 광장에 모여 전하는 진심이나 핵심은 같다. 우리의 바람을 억압하지 마라. 우리가 믿고 즐기고 사랑할 자유를 보장하라. 국가라면, 마땅히 국민과 백성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명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나는, 황사영의 백서를 통해 더는 그를 반역자라고 하기보다, 그를 반역자로 만든 조선의 상황에 대해 가르쳤으면 한다. 그리고 그 사회가 반복될 수 있음을, 그럴 때에 우리가 할 역할들은 무엇일지를 가르쳤으면 한다.
아무튼 내년에, 나는 다시 한번 토굴에 들어가는 심경으로 소설을 써 보려고 한다. 그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무쪼록 내년에는 소설도 완성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어지러운 나라도 어떻게든 안정을 찾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