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에 김자반에 밥을 먹으며

김자반으로 대동단결

by 나무나비

최근에 의사이자 에세이스트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기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진짜로 이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감정은 아니다. 물론 생각하면 두근거리고, 계속 생각이 나고, 그의 글을 일부러 찾아보고 싶고 그러기는 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마치 연예인을 좋아하듯이, 혹은 드라마 속 주인공을 좋아하듯이, 좋아함으로 소비할 만한 대상이 생겼다는 것뿐이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도 직업적인 영향이 큰 것 같다.

같은 의사들은 그러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남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주위 사람들이 우러르는 직업.

그래서 돌잡이에서도 괜히 장난감 청진기 하나 더 가져다 놓는 것이다. 원래는 돈하고 실, 이런 것밖에 없었는데.


나에게는 의사라는 직업의 이미지를 만들어 준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나의 친구였고(하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같은 의대를 나왔고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할 것이다.(하지만 나는 각각을 만났고 셋이서 본 적은 없다)


한 친구는 고등학교 때 친구였는데, 무척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성적 같은 것은 대놓고 비교를 하지 못하니 그저 주위에서 들은 말뿐이고, 그에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피아노를 무척이나 잘 쳤다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가수이자 요즘은 라디오DJ를 하고 있는 알렉스를 닮았다. 아, 정말로 알렉스랑 비슷하다. 굉장히 부드러우면서도 때때로 핵심을 찌른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두루 친했고 친절하기도 했다. 나하고 있을 때는 유독 많이 웃는 친구였다.


또 한 친구는 대학교 때 친구인데, (같은 동아리여서 알게 되었다) 첫번째 말한 친구와는 영판 다른 성격이었다. 무척이나 시니컬하고 직설적이었다. 언젠가, 그와 함께 동아리 행사에 있는데 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목이 많이 아픈데 어쩌냐고 물었다. 그는 그때 본과에 재학 중이었고, 우리 모두가 말로만 들은 그 '실습'까지 마친 상태였다.


"원래 목에는 감기균을 방어할 수 있는 게 있는데, 감기에 걸리면 거기가 말라 버려서 방어를 못해. 그러니까 물을 많이 마셔야 해."


단순히 약을 먹어라, 쉬어라 보다 굉장히 전문적인 말이었다. 이제껏 수도 없이 감기를 걸려 왔지만 나는 이토록 전문적인 조언을 들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병원 의사들에게서도. 의사들은 그저 목 상태를 한 번 힐끗 본 후 약이나 지어줄 뿐이었다.


나는 이 의대생의(그것도 실습을 한, 본과 학생!) 조언이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에 열심히 물을 마셨다. 그러나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다. 내가 하는 꼴을 물끄러미 보던 이 친구는, 시니컬한 본성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말했다.


"물 마시랬더니 진짜 하마처럼 마시네."


내가 그나마 친했던 '의사'는 이 두 친구들이었다. 물론 이들은 의사가 되기 전, 혹은 의사지만 아직 전문의가 아닌 본과 학생까지였지만. 지금은 모두 전문의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에게 하마 운운한 친구는 신경과에 갔는데, 내가 신경정신과는 알겠는데 대체 신경과는 뭐냐고 해서 세 차례 정도 설명을 한 것 같은데 내가 전혀 알아듣지를 못했다. 의사는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의사이자 에세이스트를 좋아하게 되면서 나는 이 두 명의 친구를 떠올렸다. 왜냐하면 이 의사가 에세이를 통해 밝힌 일상들이 지나치게 인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그래서 더 좋아한 것도 있었다. 만약 이 의사의 에세이가 '나는 오늘 이런 환자를 진료했는데 나의 황금손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는 다 나았다. 하하하하.' 이런 따위였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기는 커녕 그 에세이는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에세이는 달랐다. 그의 에세이는 의사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 환자를 바라보는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치료의 대상이 아닌 그저 같이 살아가는 대상,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이웃인 그들.


그는 의사 중에서는 왠지 이방인인 듯한 느낌이었으나(이것은 실력이나 그외 다른 것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질을 말한 것뿐이다), 그런 이방인스러움이 나는 좋았다. 굳이 말하자면 최근에 본 <나의 해방일지>에서 해방일지 하나 쓰실 것 같은 이미지였다. (에세이로 이미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남다름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이 좋았다. 영원히 이방인이었으면 좋겠는, 이방인스러움을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만약 이 정도의 감정에서 끝났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김자반을 먹지도 않았겠지. 나는 아주 예전에 에세이를 메일로 받는 구독 서비스를 신청한 적이 있었다. 무척 즐겁게 아침마다 에세이를 받아 보고, 줌으로 하는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그 작가는, 내가 신청한 기수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때 에세이를 보냈던 작가 중의 한 명이었다. 혹시 줌으로 하는 모임에서 내가 그를 보았던가. 궁금해져서 예전 메일을 뒤져 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나는 모든 줌 모임에 참석하지는 않았는데, 참석하지 않은 모임 중에 그가 강연자로 온 모임이 있었다. 그것도 단독으로. 나는 그때 그를 잘 몰랐으므로 별 고민 없이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데면데면한 것이 싫기도 했을 거고. 화면을 꺼도 되지만 끄는 것이 민망해서 안 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에서 그 메일을 보니 갑자기 제 가슴을 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미 지나버린 모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거고. (게다가 그때로 시간이 돌아가면 아이는 다시 어려진다. 또 그만큼 키워야 한다. 그건 아니야.) 그래서 나는 허한 마음을 김자반으로 달래기로 한 것이었다. 밥에 김자반을 넣고 먹으니, 꿀맛이었다. 기분이 안 좋거나 아쉬운 일이 있거나 이불을 발로 찰 일이 있으면, 맨밥에 김자반을 넣고 먹어보는 것도 괜찮다. 물론 큰 기대는 말아야 한다. (내일은 마침 집에 있는 양념된 냉동 주꾸미를 넣어서 먹을 생각이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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