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가야 할 모임도 있다

공감이 아닌 의존성의 함정

by 나무나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따로 나를 피해를 주는 것은 없이 그저 미워만 하고 있다면 나도 굳이 그를 만날 필요는 없다. 서로 안 보고 지내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 하겠지만 내가 이야기를 하고 오해를 풀려고 시도하고 사과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닫아버린 채 '미워하기'를 선택한 사람에게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도저히 나를 미워하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아 이전 행적들을 분석해 보았고, 한 가지 공통점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공격' 받았다고 생각될 때(이것은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이라, 객관적으로는 공격이 아니라 조언이나 도움을 주는 경우에도 가능하다) 마음을 닫고 그 사람을 역으로 공격하여 제 곁에서 치워버리는 사람이었다. 그 전까지 그는 햇살처럼 다정한 사람이기도 해서, 나는 내가 그 공격의 대상이 될 때까지 그의 이런 면모는 잘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참으로 특이해서,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은 선하게 해석하려는 특성이 있다. 가까운 지인만 떠올려 봐도, 그 지인들이 백프로 옳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한다면 비판을 할 것을, 지인이 하면 좀 덜 비판을 하게 된다. 내가 그와 내가 틀어졌다는 것을 그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이 이유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내 경험을 들어주고 공감해주지만, 그와 나를 아는 사람이 들으면 오히려 그를 두둔하거나 나를 책망하게 될 수도 있어서이다.


예전에 나는 직장에서 선배 직장인의 괴롭힘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는 그것이 괴롭힘인 줄도 몰랐고, 내가 부족해서 저러겠거니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지나고 보니 그것은 명백히 괴롭힘이었다. 왜냐하면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을, 그 사람이 내게 했던 것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불러서 야단 치듯이 말하거나 참견하거나 다 들리게 뒷담화를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내 전에 그렇게 대한 이들이 있었고, 나중에 들어보니 내 후임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름 엄격한 안목으로 제 괴롭힘 대상자를 뽑아서 그 사람에게만 제 안 좋은 모습들을 보였던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른 직장 선배에게 한 적이 있다. 그는 나를 괴롭히는 이의 동료였으며 같이 밥을 먹는 멤버였다. 그리고 무척 착하고 친절했다. 어느 사람에게나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 그리고 나에게도 무척 잘해주고 잘 챙겨준 사람이었다. 심지어 나의 실수로 그가 큰 피해를 보게 된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준 마음 넓은 사람이다. 나는 고민 끝에 내가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를 그에게 하게 되었다. 어차피 직장은 그만 둘 것이라고 반쯤 생각한 즈음이라서 눈치볼 것도 없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사려깊게 듣더니 이런 말을 했다.

"00(나를 괴롭힌 직장 선배)도 예전에 고생 많았어요. 상처가 많아요."

나는 너무 당황해서 더 무슨 말을 해야 할 줄을 몰랐다. 왜, 내가 당한 일에 다짜고짜 그가 상처가 많다는 이야기를 한 건지. 나는 나의 선배 격에 해당하는, 나 이전에 당했던 피해자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피해자는 놀랍게도 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나를 찾아와 밥을 먹자고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악마예요. 그 드라마에 나오는 나쁜 시어머니 같은 사람 있잖아. 악인. 딱 그런 사람이야."

한 직장에 다니는 동료들의 평가가 이렇게 극과 극이다. 어떤 사람은 상처 많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어떤 사람은 악마라고 한다. 그 기준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그 기준 역시 내가 그와 친한가 친하지 않은가에 따라서 바뀐다.


내가 그의 행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서 미움을 받고 난 후였다. 그와 나의 관계가 멀어지니 그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힘이 오히려 생긴 것이었다. 나는 그를 모르는 몇몇 사람들에게, 나와는 상관이 없는, 하지만 그가 '공격' 받았다고 생각했을 때에 취했던 행동 중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당시의 그 행동은 나와 그의 지인들이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그를 책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거, 수동공격이잖아."


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행동을 보고도 그를 책망하지 않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공감의 함정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함부로 판단하지도 못한다. 회사를 제대로 망칠 목적으로 입사한 사이코패스들은, 그래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인맥 쌓기'이다. 그중에 고위직 관리자들과 인맥을 쌓는다. 입사 초기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신입사원에게 너그럽다. 그럴 때, 우연인 듯 실수인 듯 고위직 관리자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나누고 얼굴 도장을 찍는다. 그러면 그 고위직 관리자는 '이 사람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고, 나중에 중간층 관리자가 하소연을 해도 쉽게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개중에 관계에서 성숙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배신을 당해도, 뒤통수를 맞아도 쉽게 노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도 잘못은 잘못이라는 판단을 한다. 그리고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잘한 것은 잘한 것이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오늘 나와 친한 사람이 내일 나와 멀어질 수 있으며, 그 반대의 상황 역시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늘 인지하고 있다. 이 사람은 독립심이 있고 자존감이 강해서, 다른 사람의 거취나 태도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미움을 받았다는 것은, 이러한 '성숙'의 단계로 가는 하나의 계단일 수 있다. 이전의 나는 주변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공감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잘못을 해도 '좋은 사람'이라는 딱지를 쉽게 떼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과 판단을 믿을 수 없으니, 내 주변 사람은 대부분 '좋은 사람'이니 기대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내 자아를 더 축소시켰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을까. 타인이 내 판단을 백프로 대신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닌데. 이와 같은 경우에 만약 그 의존하던 대상이 내가 보기에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있다면, 나는 그를 '좋은 사람'에서 그냥 '덜 좋은 사람'이 아닌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할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를 더는 의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상으로서는, 자기는 의존하라고 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의존했다가 결국은 '나쁜 사람'으로 격하 되어 버리니 억울할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나는 비로소 그를 비롯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자아가 생겨나면서 내 나름의 판단 역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 좋게만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단지 좋게 보이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임도 알게 되었다.


미성숙한 사람에게 관계는 모 아니면 도다.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자 혹은 적. 나를 미워하는 그에게 나는 지지자가 되었다가 한순간에 적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주체에게는 세상이 얼마나 아슬아슬할 것인가.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그저 '지지자'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꼴이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이번 기회에 내 시선으로 바르게 서서, 내 판단으로 판단하며, 내가 생각한 삶을 살아가면 그만일 것이다. 어차피 관계는 멀어지고 또 가까워지는 것, 그리고 내가 바로 서게 되면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다.


요 며칠, 나는 그 사람 때문에 힘들었다. 명백히 말하면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 자꾸 모임이 만들어지고 그 사람이 거기에 끼어 있는데 나도 가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져서였다. 피하고 피했는데 이번에는 남편과 아이까지 걸려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모임이 생기고 말았다. 나는 정말 그가 보기 싫은데, 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왜 내가 그 모임을 가기 싫을까 생각을 했다. 이 긴 글을 쓰고 보니,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바로 내가 감정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였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판단이 아닌, 그의 판단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판단으로 나를 대하면 나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맞으므로 나는 그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것이었다. 나는 내가 너무 착한 것인가, 그도 하지 않는 공감을 왜 내가 하면서 힘들어하나 싶었지만 이것은 공감이 아니라 의존이 맞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제 마음을 튼튼하게 다지고 자라오지 못해서 이리저리 의존하며 자라온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오래 행복해지려면 이 의존성에서, 공감인 줄 알고 착하다는 말에 빠져 있던 이 무기력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이제 나는 더는 어른들의 판단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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