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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파파 Jun 21. 2024

020 민족의 영웅 안중근(전우용 저)

독립운동계의 아이돌, 안중근 의사


얼마 전 아내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영웅>을 보고 왔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로도 보았으나 풍성한 사운드와 현장감 덕분에 뮤지컬이 주는 감동이 더 컸다. 아내는 뮤지컬을 무척 감명 깊게 보았는지 나중에 한번 더 보자고 한다.

한국인이라면 아마 안중근 의사의 전기를 접하고 가슴 뜨거워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우리 역사 속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명이자, 독립운동의 아이콘이다.

현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안중근 의사는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아이돌'이었다. 당시 그의 사진과 엽서는 그를 존숭하는 사람들에게 수없이 팔렸고, 그의 의거는 노래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애국심을 일깨웠다.

그렇다면 독립운동가 중 안중근 의사가 특별히 더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나라를 위해 살신성인한 모습? 나 같은 범인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정신이기에 이 또한 매우 존경해야 하는 자세이지만, 안중근 의사의 대단함은 비단 이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뮤지컬을 보고 뜨거워진 가슴에 그의 일대기를 좀 더 알아보고자 <민족의 영웅 안중근(전우용 저)>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거사를 다룬 소설 <하얼빈(김훈 저)>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존경이란 단어로 가려왔던 나의 무지함을 반성하게 되었다.


만국의 평화를 바란 박애주의자 안중근  


이제까지 나는 안중근 의사를 위인으로 칭송하는 이유를 민족의 적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항일, 반일의 감정에서만 느꼈었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한 1차원적인 이해에 그쳤던 것이다. 그의 위대함이 적군의 수장을 처단한 투쟁의 한 부분으로만 기억되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투쟁에는 인류애라는, 핍박받는 민족이 갖기에는 쉽지 않은 숭고한 사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국모를 참살하고 임금을 폐위시켰으며 국가를 찬탈하려는 승냥이 떼를 보며 우리 민족은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마음에는 분노보다 절박함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뤼순 감옥에서 투옥 중 작성한 그의 <동양평화론>과 재판의 속기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절대 일본에 대한 복수를 꿈꾸지 않았다. 동양을 넘어 세계 다양한 민족의 평화로운 삶을 갈망했다. 그런 평화를 송두리째 빼앗고자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일본의 그늘 앞에 안중근 의사는 복수가 아닌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절박한 마음으로 거사를 준비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박애주의적인 모습은 여러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독립군으로 활동 중이던 시기, 일본 군사 포로를 처형하려는 동지의 결정에 반대한다. 아무리 적이고 서로에게 총칼을 겨눈다지만, 포로를 죽이면 안 된다는 전쟁 국가들의 룰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투쟁이 명분을 잃고 단순한 폭력으로 격하될 위험을 우려하였을 것이고, 또한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군인을 하나의 사람으로 우선해 보았던 것 같다.

이러한 면모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후 받는 재판에서, 하느님 앞에 이토라는 인간을 죽인 것에 대해 사죄를 한다는 발언에서 알 수 있다. 얼핏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이다. 하지만 이후 논리 정연하게 밝히는 그의 의중에서, 그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의명분이 우선하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 인류애를 상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독립운동을 행하는 용기에 기저 한 감정은 분노일 텐데, 그는 분노보다 동포애, 인류애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정신과 의지가 얼마나 굳건하고 숭고한지 경외심이 끓어올랐다.


교육과 정보가 부족했던 시대. 하지만 그의 지식과 선견지명은 시대를 초월한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1910년 3월에 집필한 <동양평화론>에는 '대한'제국과 우리'민족'의 '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주장이 이어진다.  앞의 문장의 몇몇 단어에 작은따옴표를 표시한 이유는 안중근 의사가 최신 지식을 얼마나 빠르게 습득했는지 말하기 위함이다.

'대한'의 국호가 등장한 것은 1897년이고, '민족'이라는 단어의 등장은 1900년대 이후이다. 또한 '독립'은 고립이라는 의미로 쓰이다가 1880년대 중반 이후 자주, 자립의 뜻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조선의 지리적 위치를 '동양'으로 언급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이다.

지금이야 손 안의 작은 세상인 스마트폰을 통해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지만, 근대화가 막 태동하는 20세기 초반의 조선에서는 새로운 지식이나 문물을 접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거기에 안중근 의사는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글과 언행에서 우리는 그가 국가와 민족, 그리고 평화를 위해 얼마나 지식에 목말라했는지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는 혹세무민의 강대국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인류애적인 사고로 반박하였다. 당시 세계에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이 팽배하며 강자에 대한 약자의 억압과 약소국민들의 탄압이 만연하였다. 또한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 서방의 침입을 막겠다는 이토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은 당시 많은 이들이 찬동하였고,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대륙진출의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강자들의 지배적인 사고 속에서도 그는 억압과 찬탈이 아닌 상호 호혜적인 상황 속에 동양을 넘어 세계의 다양한 민족의 평화를 주창했다.  


각종 혐오와 갈등이 만연한 사회.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의지를 되새겨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평전을 읽고 쓴 감상문이라 그의 위업만 언급했지만, 사실 당시 적든 일제로부터 독립을 열망하고 행동한 우리의 모든 선조가 독립운동가이자 위인이다. 그분들 덕에 나는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는 바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는 지역, 성별, 나이 등 각종 갈등과 혐오 속에 빠져 서로를 반목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1908년 해조신문에 독립운동을 설파하기 위한 글을 썼을 때, 그 주요 내용은 단합이었다. 우선은 자시 자신의, 다음으로는 가족의, 마지막으로는 국가의 단합이 이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같이 사회의 사분오열을 목도하면,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강렬히 통감하게 된다.

무더워지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이다. 선조들의 숭고한 의지와 감사한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서로를 향한 미움의 화살을 조금씩 내려놓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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