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와 더불어 올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전체주의 사회가 초래할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1984는 세뇌에 의한 체제의 유지를 이뤄 가고자 한다면, 멋진 신세계는 유전적 개량을 통한 세계의 안정화를 추구한다. 작중의 멋진 신세계는 극도의 안정화된 사회를 바라는 알파, 베타, 감마, 입실론 계급의 신 인류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들은 각각의 계급에 맞는 유전적 개량을 통해, 비록 계급의 상하관계가 있더라도 타 계급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계급에 요구되는 역할에 완전히 만족하고 즐겁게 수행한다. 혹여 이들이 자신들의 삶에 불만이 있더라도 괜찮다. 아무런 부작용 없이 순식간에 행복감을 선사하는 약물인 ‘소마’가 부족함 없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모두 부화-습성국에서 탄생한다. 이곳에는 결혼과 출산이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인간은 잉태와 출산, 성장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배란과 습성 주입, 부화의 과정을 거쳐 특정 계급의 일원으로 '만들어'진다. 부화의 과정에서 간혹 부화습성국 직원들의 실수로 일정량 이상의 화학물질이 주입되어 미약하나마 현 체제에 반감을 가진 인물들이 간혹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반체제적인 사상을 드러내면, 그와 동시에 머나먼 곳으로 전출(이는 곧 추방)되어 사회의 안정을 훼손하지 못한다.
알파 계급인 주인공 버나드는 휴가기간에 야만인 사회로 떠난다. 작중 세계에서 야만인 세계로 가는 여행이란 다소 위험하지만 절대 이해하지 못할 문화와 사회를 유지한 곳으로 떠나는, 완전한 낯섦을 선사하는 여행이다. 이곳은 아직 과거의 방식, 즉 출산으로 인류를 유지해 나간다. 이곳에서 실종되었던 베타계급의 신인류와 그녀가 그곳에서 낳은 아들 존과 조우한 버나드는 그들과 함께 신세계로 돌아온다. 그 세계에서 유일하게 출산을 통해 탄생한 존은 야만인이라 불리며 신인류의 유희 거리로 취급된다. 자유연애, 소마라는 약물이 주는 절대적 안정에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낀 그는 그러한 인위적인 안식을 거부한 채, 고통이 가득한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신인류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헉슬리가 창조한 신세계,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멋진 신세계를 구상한 헉슬리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위태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극단적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발로는 양차세계대전과 함께 세상을 폐허로 만들었고,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 가득한 퇴폐주의와 허무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기류에 헉슬리는 미래의 모습을 두 가지로 예측한다. 핵으로 무장한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자처하는 분열된 세상, 또는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한 복지국가라는 미명하에 설립된 초국가적 독재국가. 당시의 극도로 혼란한 사회에 대한 반감인지 헉슬리는 후자의 상황을 상정하여 소설을 집필한다.
현실의 혼란과는 다르게 멋진 신세계는 극단적으로 안정화된 사회의 모습을 보인다. 식량과 안보, 체제와 정치가 극도로 안정화되어 있다. 그렇기에 사회에 갈등이 없다. 국가, 민족, 인종, 나이, 성별, 지역, 빈부 등등 심각하고 다양한 갈등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무(無) 갈등의 사회가 과연 디스토피아 맞나? 유토피아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극도로 안정화된 신세계. 그 대가는 인간성의 몰락이다
안정감이란 본디 긍정적 느낌의 단어이지만 신세계에서 보이는 안정화된 사회는 어딘가 모르게 거부감이 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완전한 인류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무수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한 변화 중 갈등은 필연적이었으며, 그 갈등은 전쟁을 초래했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혼란 속에 인간성이 무시되고 말살되었다. 작중의 세계에도 9년 전쟁이라는, 현실에서의 세계 대전과 유사한 전쟁이 있었고, 파괴와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진실보다 통제되는 안정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그렇기에 멋진 신세계의 제1원칙은 안정이다.
우린 변화를 원하지 않아요. 모든 변화는 안정에 위협이 되니까.(멋진 신세계 중)
그러나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는 갈등과 폭력만이 아니다. 바로 변화를 향한 열망도 안정을 위협한다. 그렇기에 신세계 속 변화를 원하는 인물들은 반체제적 인물이라는 낙인과 함께 그 세계에서 추방된다.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발전을 갈구하는 향상심은 정체된 환경에 안주하거나 만족하지 못한다. 도파민은 기존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듯, 변화 없는 환경에 인간은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은 소마라는 약물로 억제되며 사회는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한다. 과연 그들을 행복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들은 불행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정의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신세계 속 사람들을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화학적 약물에 의해 자신들의 모든 욕구를 거세당한 정신 병동의 환자들로 말이다.
즉 멋진 신세계는 안정되어 있기보다 정체되어 있다. 인간의 본능에 박힌 향상심을 항상심으로 대체한 사회는, 폭력의 시대와는 다른 의미로 인간성이 매몰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억압. 이것이 바로 극도로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인 것이다.
먼 훗날 돌아보면 투쟁했던 날들이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부딪혀 깨질지언정 우리는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은 바로 그러한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