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旅行). 나그네 려, 다닐 행. "자기 거주지를 떠나 객지에 나다니는 일"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집 떠나면 고생 이랬던가. 그렇기에 나는 지금까지 다음과 같이 여행을 정의하였다. 여행이란 떠나기 전의 설렘, 떠나서의 고생, 다녀온 후의 추억이라고.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과정 내내 설렘이 가득했다. 지난한 회사생활도 여행에 대한 기대로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다녀온 후에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며 추억을 곱씹었다. 메마른 일상에 단비 같은 기억들이다. 그러나 막상 여행 중에는 내가 왜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집 나와 고생인지 어리둥절했던 경험이 더러 있다.
아내에게 이러한 나의 여행관을 이야기했더니 매우 어리둥절해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생각의 차이를 분석해 보니 J와 P의 차이었다. (MBTI를 잘 모르는 분들께는 이러한 설명이 죄송하다. 나 역시 얼마 전 까지는 나 자신의 MBTI 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다. 일을 할 때나 주말이나, 휴가를 떠나서나 그날, 그 순간 해야 할 일들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업무를 할 때는 꽤 유용한 기질이지만, 휴일이나 여행에는 이것만큼 골치 아픈 성격도 없다. 식사하는 순간에도 이동하는 순간에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를 갈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복기한다. 덕분에 나는 식사를 해도 점심시간을 쫓기는 직장인처럼 정해진 시간 내에 먹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보다 계획적인 성향이 적은 내 아내는 여행의 동반자로서 이런 나와 여행을 하며 압박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여행의 순간이었다.
이 책을 읽는 순간도 나는 캠핑을 떠나 있었다. 자연을 즐기고 여유를 만끽하려고 간 곳에서, 그 순간과 장소에는 등장하지 말아야 할 나의 성향이 다시 발현되어 버렸다. 주말이라 차가 밀려 계획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내가 짜놓은 계획이 어그러질까 빨리 쉘터를 설치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획한 식사를 차려 먹기 위해 분주하고 정신없이 준비해야 했다. 술도 마셔야 하고 커피도 마셔야 하고 밤에 불멍도 해야 하는데 계획보다 늦게 도착한 탓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거기에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컨디션이 떨어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한 것들을 사무를 처리하듯 진행해 나갔다. 계획이 중요했던 나는 처음부터 어그러진 계획에 전혀 즐겁지 않았고 힘이 들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같이 있던 아내 또한 전혀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밝은 햇살을 받으며 읽은 이 책에서 여행의 즐거움에 대한 큰 깨달음과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작가도 어찌 보면 나와 같은 계획형 인간이자 성격이 급한, 조금은 모난 사람일 것이다. 작가의 자성적 문장들이 나의 결점들과 꼭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여행의 시행착오 속에, 그리고 작가와 너무나도 잘 맞는 여행의 동행자인 남편 덕분에 잘못된 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여행이란 '여'기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것이라고. 이 문장이 나에게 얼얼한 충격과 반성의 시간을 선사했다.
이만큼 여행을 설명하기 좋은 문장도 없을 것이다. 내가 서두에서 말한 (나만의) 여행의 정의와는 완벽하게 대치한다. 여행의 즐거움은 가기 전, 후가 아닌 그 도중에 있다고. 여행 본질은 그저 설레고 추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순간의 내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중요한 것이라고.
나의 여행 경험을 돌아봐도 계획 하에 들렀던 박물관이나 유적지 보다, 걷다가 지쳐 우연히 들어간 카페나 골목에서 더 많은 추억을 얻었던 경우가 많다. 계획 없이 예약한 스위스의 패러글라이딩은 당시에 짜릿한 경험을 선사했고 아직 까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심혈을 기울여 찾아간 마드리드의 고급 레스토랑보다 낮잠 후 일어나 숙소 앞에 있던 식당에서 먹던 스테이크가 더 꿀맛이었다. 계획된 일정은 실망감을 가져올 수 있지만, 무계획은 애초에 기대감이 없기에 실망보다 뜻밖의 즐거움을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無) 계획' 이라던 영화 <기생충>의 대사가 떠오른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큰 비용을 초래할 수 있기에 이러한 마인드를 인생 전체에 적용하기는 무리다. 하지만 자유를 만끽하고자 떠난 여행에서 때때로 무계획이 주는 해방감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여행의 즐거움은 본전을 생각하느라 뒷전으로 밀린다. '내가 여기까지 얼마를 들여왔는데', '내가 시간을 어떻게 내서 왔는데'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보며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바쁜 현대인의 삶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본전을 계산하는 기준을 바꿔보면 어떨까? 경험의 양보다 질로 말이다. 그렇다면 여행지에서 남들이 다 줄 서서 먹는 지역 명물을 지나쳤다고 해도 그 시간에 따사로운 햇살이 주는 여유로움을 만끽했다면 그 여행은 성공한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이 있듯 여행의 즐거움을 얻는 방법도 다양할 것이기에 정답이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여행법에서 행복보다 고생을 더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한번쯤 여행의 항로를 수정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타고난 성정 탓에 나는 아직도 여행지에서 조급함과 짜증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책을 읽던 캠핑지의 기분을 되새기곤 한다. 그렇게 여행의 순간을 즐거움으로 조금 더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