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념이 무너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적 우리 아버지께서 항상 하셨던 말이 있다. 작은 손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은 솔선수범해서 나서라. 그 말은 내 행동지침의 하나였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화장실 청소, 우유당번, 분리수거 당번 등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먼저 나섰다. 군대에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한동안은 그랬던 것 같다. 그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나의 작은 역할이라는,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내 선의가 호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무수한 경험이 축적되며 어떤 임계치를 넘은 순간이, 그 작고 비루한 나의 신념이 무너지기 시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친절이 나를 호구로 만드는 멍청한 짓이라는 피해의식이 생기기 시작했고, 사회생활에 풍파를 겪으며 그러한 생각은 내 신념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렇게 개인주의를 빙자한 이기주의가 내 마음속을 지배하였고, 돈키호테를 보며 허황뿐인 정의와 신념만큼 무용한 것이 없다고 느껴왔다. 그랬기에 소설을 읽는 내내 돈아저씨의 행동을 비난하기 바빴다.
돈아저씨는 학원 강사시절 원장이 자신의 수강생에게 과잉 수강을 종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원장과 크게 다투고 학원가를 떠났다.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 사교육계에 몸담기 어렵다 느낀 그는 잘 나가던 일자리를 걷어차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의 알량한 신념 때문에 한빈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갖고 사랑받지 못한 채 자라났다. 한빈의 엄마는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이혼을 결심한다. 가족보다 자신의 신념을 우선한 돈아저씨의 결정에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 났다. 그렇게 돈키호테에 대한, 돈아저씨에 대한 나의 반감은 고조되었다.
그런데, 독서를 이어가며 돈아저씨에게 감사하는 민피디와 김승아 씨의 에피소드가 진행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알량하고 무용하다 비하하며 외면한 신념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안온한 세상을 만든 것이라고. 자신의 처지를 핑계 삼아 도망치지 않고 불의에 맞선 사람들과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사회가 아직은 살만한 것이라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가정만 지켰다면, 민주화 시기 국민들 모두가 자신의 안위만 지켰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직업과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든 이들, 그들이 크건 작건 품고 있는 신념이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신념이 선의를 낳고 낳아 누군가에게 계속 전해지며 돈키호테의 정의는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간의 나의 합리화가 몹시도 부끄러웠다.
물론 내 가정, 나의 삶을 포기하면서 사회를 위해 이바지하는 삶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친절이라도 세상을 조금은 이롭게 만들 것이라는 어린 시절의 소중한 신념에게 내 마음속 한편의 공간을 다시 내어주어야겠다.
김호연 작가의 따뜻한 문체 덕분에, 돈아저씨의 이타적인 일화들 덕분에 나도 어린 시절의 아련한 신념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